<-- 2부 -->
도시 전체가 들떴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적어도 열에 서넛은 사령관의 혼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사석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제대로 말 한 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 타인이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한껏 들떴다. 그들은 어느새 그들의 사령관을 그들의 도시와 동일시했고, 그들의 도시를 그들과 동일시했다.
“이 또한 사령관님의 수완입니다. 지금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다지요?”
“그럴 거다.”
막시밀리언은 시민들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타고났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군터는 그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시민들을 다루려 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를 통해 무얼 얻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사령관은 똑똑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하시는 일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겠지.”
군터가 곁에 둔 이들 중 가장 명석한 두 명 중 하나인 모페이브도(다른 한 명은 살라스) 막시밀리언의 속내를 알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위글로우 전체가 사령관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시끌해질 무렵. 막시밀리언은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살마드에 다녀왔다. 파비우스 리에론과 만나 구체적인 날을 잡고 향후의 일들에 대해서 논하고 온 것이다.
“한 달 꼬박 살마드에 머무르게 됐네.”
“길군요.”
한 달 중에 식을 준비하고, 치르고, 그 뒤에 하객들과의 연회와 만찬으로 이어지는 날이 꼬박 열흘이 넘는단다. 일전에 막시밀리언을 대리하여 살마드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리에론은 허식을 참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디 그들뿐일까. 권세 있는 자들은 기회만 되면 그들의 성세를 뽐내려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알아줄 테니까. 그래야 그들의 권세가 계속 이어질 테니까.
‘바꿔 말하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권세인 건가.’
우습기 그지없다. 밖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면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치 않은 경우가 있다. 작금에 이르러 바크렌에서 행세 좀 한다는 이들의 실상이 딱 그 꼴이다. 그만큼 바크렌의 정세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다는 뜻이다.
불안할 시절에는 움츠리기 마련.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일수록,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일수록 그 정도는 더할 수밖에 없으니 귀하신 분들이 부산을 떠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자네가 고생을 해줘야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내 자네를 믿지. 그나저나 어떤가, 요즘은? 좀 익숙해졌나?”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목숨이 걸리지 않은 수 계산은 제게 맞지 않는군요.”
“하하핫! 자네가 천생 무인임이야 내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질색하는 그 일도 군인의 일이야.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장과는 멀어지는 것이 또한 군인이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예. 그렇군요.”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막시밀리언은 좋아 보였다. 이번 혼사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인 것처럼 보였다. 살마드에는 리에론에서 마련한 화려한 축제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그 축제의 주인공 중 하나는 바로 그였다. 그러니 막시밀리언은 바크렌의 주도에서 한동안 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축제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막시밀리언이 집안을 박차며 군문에 투신할 때 품었던 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군터가 보기에, 막시밀리언은 그와 어울리는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
“이것 좀 한 번 보세요. 이번에 선물 받은 건데, 이게 그렇게 피부에 좋다고 하네요. 자기 전에 바르고 자면 주름지는 걸 막아준다고 하더라고요.”
수다를 떠는 여인 앞에서 벨리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에 쥔 고급스러운 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진짜로 효과가 있는 걸까?’
옆에서 자기도 효과를 봤네, 어쩌네 떠들어대는 여인은…솔직히 말해 그다지 보고서 신뢰도가 올라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극찬하는 이 점액을 바르기 전에도 주름을 찾기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을 정도로 딱 절묘하게 오른 그녀의 얼굴 살은 아마 조금 더 살이 찌거나, 나이를 먹어 피부가 힘을 잃기 전에는 계속 저런 상태를 유지하리라.
“저희 남편도 전보다 훨씬 보기 좋다면서 그렇게 칭찬을 하더라고요. 호호.”
그녀의 남편인 미트라스는 분명 그녀의 수다에 귀가 아프기 싫어 적당히 대꾸했을 테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으리라. 벨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 미트라스의 부인인 지누아는 깔깔 웃으며 한 바구니 가득 가져온 점액을 벨리사에게 안겨주었다. 대충 보기에도 한 손에 가득 들 정도로 작지 않은 크기의 병이 십여 개는 넘어 보였다.
“이렇게 많이 주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저는 더 많이 있답니다. 써보시고 괜찮다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더 가져다 드릴 테니.”
“고마워요 부인.”
“고맙기는요. 아 참! 그나저나 이번에 엔실러 부인의 댁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가실 거죠?”
“아…그게, 아직 결정 못했어요.”
“아니 왜요?”
“그…….”
벨리사가 어물거리자 지누아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전 정말 부인이 이해가 안 돼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왜 그리 파티를 꺼리죠? 제가 부인 같았으면…….”
지누아는 벨리사에게 한 마디 끼어들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가 이번 파티에 가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맹렬함을 넘어 살벌할 정도라 벨리사는 지누아가 이따금씩 “그렇지 않아요?” 하고 물을 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수다가 끊긴 것은 하녀가 다가와 한 마디를 건네면서였다.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래?”
그 한 마디에 지누아의 뜨거운 외침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하녀의 말을 듣고 벨리사가 움직이려는데, 그보다 먼저 군터가 그녀를 찾았다.
“다녀왔어.”
“오셨어요.”
갑옷 차림으로 다가온 군터는 지누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한 팔로 벨리사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달아오른 벨리사가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그의 한 손은커녕, 한 손가락의 힘도 당해낼 수 없었다. 곧 발버둥을 포기한 그녀는 군터가 놓아주기를 기다리며 얌전히 입술을 내주었다.
잠시 후 군터가 그녀를 놓아주자 벨리사는 쪼그라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미트라스 부인도 계시잖아요.”
“내 집에서 내 아내와 입 좀 한 번 맞추는 게 실례인가?”
“…부인께 인사나 해요.”
그제야 군터는 눈길 한 번 안 주던 지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자 지누아는 찔끔하며 눈을 피했다. 그 모습이 꼭 고양이 앞에 선 쥐 꼴이라, 그녀가 고개를 숙이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은 게 다행으로 보일 정도였다.
“반갑소. 부인. 간만에 뵙는군.”
“예, 예. 그러네요.”
“오늘도 내 아내와 말동무가 돼주고 계셨군.”
“예…….”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드리지. 내 아내와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시기 바라오.”
다시 한 번 벨리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군터가 물러가자 지누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죄송해요. 제 남편이 좀 짓궂은 구석이 있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나저나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네? 뭐가요?”
“아니, 그…….”
지누아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그에 벨리사가 키득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제 남편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사람이 아니에요. 얼마나 자상한데요?”
무섭지 않다고? 지누아는 하마터면 툭 튀어나오려던 콧방귀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방금 전에도 그녀는 군터를 보자마자 몸이 바싹 굳어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군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에 대한 이견은 있을지언정, 그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데는 그녀의 남편도 그녀와 생각이 다르지 않으리라. 이따금씩 침실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남편 미트라스는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녀의 남편이 그에 대해 해준 이야기 중에는 저번 전쟁에서 그가 쌓은 무용담에 대한 것도 있었다. 혼자 말을 몰고 나가 백 명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물론 방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자상…한 것 같기는 하네.’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인을 찾고, 남이야 보든 말든 입을 맞췄다. 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러기는 힘들다. 물론 벨리사는 누구라도 눈길을 줄 정도로 아름답지만, 사내란 족속들은 열흘을 본 미녀보다는 처음 본 추녀에게 더 마음이 가기 마련이지 않은가. 아, 추녀는 아니려나? 아무튼, 마음만 먹으면 위글로우의 어떤 미녀라도 안을 수 있을 사내가 아이를 둘이나 낳은, 한 이불을 덮고 산 지 몇 년이나 지난 부인에게 이렇게 애정을 보인다는 건 꽤나 드문 일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벨리사의 아름다움에는 그녀의 남편도 일조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여인은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리고 사랑을 받지 않는 여인은 사랑을 할 수 없음이니, 지누아는 무서운 남편을 둔 그녀가 조금은 부러워졌다.
*
막시밀리언이 다시 살마드로 떠났다. 그는 최소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야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그의 부인이 된 리에론의 여식과 함께일 것이다.
위글로우의 부사령관인 군터는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리를 비운 사령관의 업무를 대리했다. 하지만 실상 그가 할 것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자잘한 업무들이야 밑의 관리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그는 그가 확인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고 판단을 내리면 되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나흘 전에 들어온 외지인들 중 일부가 바즈쇼어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막시밀리언이 사용하던 사령관의 집무실을 놔두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던 군터가 고개를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듯 쳐다보자 소식을 전한 미겔이 말을 이었다.
“움직인 놈들은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고 합니다. 저들 나름대로는 상인으로 위장했지만, 조금 허술하더군요. 아시다시피 제 부하 놈들이 상인하고는 많이 친했던지라, 척 보면 이놈들이 돈 만지는 놈들인지 칼 만지는 놈들인지 구별할 수 있지요. 놈들은 명백히 후자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 다른 생각을 품고 들어오는 놈들은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놈들이 늙은이를 만나러 들어갔다는 것이 문제지요.”
미겔이 말하는 늙은이, 바즈쇼어는 위글로우의 감찰관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살마드에서 온 놈들이라는 건가.”
“사령관께서 바친 금은 요 근래 들어 리에론의 든든한 자금줄 중 하나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리에론은 요 몇 년간 세를 넓히는 데 돈을 아끼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사령관께서 리에론의 사위까지 된다고 하니, 배알이 꼴리는 자들이 있겠지요. 뭐, 그게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니…….”
“어쩌자는 거지?”
“사전에 놈들을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그렇다면…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처리해야지요.”
처리하자니, 꽤 단호한 말이 않은가. 군터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그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맞을 수도 있지요. 만에 하나라도 늙은이가 입을 나불대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군터가 미간을 좁히고 턱수염을 쓸었다. 그러자 미겔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어차피 그 늙은이는 곧 퇴물이 될 인간이 아닙니까. 사령관께서도 차후에 입막음을 하려시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걸 좀 더 당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어차피 한 달 후면 모든 게 끝날 텐데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수염을 쓸던 것을 멈추고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