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위벨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왜소한 체구가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사이 더 홀쭉해진 것 같은 그는 그래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막시밀리언의 앞에서 보고했다.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은 사령관님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 하겠다 했습니다. 다만 그는 식을 살마드의 리에론 본가에서, 되도록 빠른 시일에 치르길 원하고 있습니다.”
“선선히 수락하던가?”“예. 별 고민 없이.”
“변했군. 아니, 성장했다고 봐야 하나.”
“무슨 말씀이신지?”
“본래는 내줘야 할 것도 아까워서 끌어안는 자였거든. 욕심이 많았지. 허나 자리가 사람을 만들었는가, 이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사령관께서는 그를 시험하신 겁니까?”
“겸사겸사. 중요한 선택을 내리기 전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는 좋든 싫든 리에론과 함께 가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파비우스 리에론이 모자란 인물이라면 그건 더할 수 없는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에론의 가주는 보통 이상은 되는 자였다. 적어도 현재까지만 놓고 보자면 말이다.
“내 장인 될 사람은 만나보았는가?”
“예. 여기.”
위벨이 품에서 서신을 빼어 막시밀리언에게 전했다.
“어떻던가?”
“담담하더군요. 어차피 힘 있는 가문에서 정략혼은 흔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다만 사령관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더군요.”
“흐음? 어떤 것들을?”
“시시콜콜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령관께서 어떤 사람인지, 위글로우는 어떤 곳인지…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부인 될 분을 많이 아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이번에 살마드로 가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사령관님의 부인 되실 분이 미인으로 이름이 알려지셨더군요.”
그 말에 그제까지 잠자코 있던 미트라스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호오? 감축 드립니다.”
“감축은 무슨.”
“어쨌거나 앞으로 평생 함께 사실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마땅히 감축드릴 일이지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만하게나. 부끄럽구만.”
서른이 훌쩍 넘는 나이에 첫 결혼이다. 속내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비치는 모습은 순진한 예비신랑의 그것이다. 막시밀리언은 수하들과 가벼운 농을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화제는 착실히 바뀌어갔다.
“식을 마치고 나서 위글로우로 돌아올 때 말이야. 내 부모님을 모시고 싶네.”
“어르신 내외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가업이야 형님이 물려받아 운영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고, 살마드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으나 시끄럽게 북적이는 일이 없으니 이곳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내 군문에 들어선다고 집을 나선 이후 오랫동안 잘 못 뵈지 않았는가.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못 다한 자식 역할도 부족함 없이 하고 싶어.”
“떠나기 전에 말씀해주셨다면 이번에 찾아뵈었을 때 말씀을 전했을 텐데요.”
위벨이 말했다. 그러자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런 것은 내가 직접 하는 게 좋아. 어차피 식 전에 한 번은 미리 살마드에 가 봐야 하니 그때 말씀드리면 될 일이야. 내 자네들에게 미리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그저 알아두라고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갑자기 상전이 머리 위로 뚝 떨어지면 당황스러울 테니까. 뭐, 내 아버님이나 어머니께서 활발하게 나다닐 분들은 아니지만.”
“허면 거처는 어찌 준비를 해야 할지.”
“내 집 가까이. 부족함 없는 것으로 마련하게.”
“그리하겠습니다.”
*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언도, 파비우스 리에론도 딱히 막지 않았다. 오히려 막시밀리언 같은 경우는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는 소문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덕분에 위글로우에는 오래지 않아 젊은 사령관이 리에론의 사위가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모르는 이들은 대단하다며 숙덕거렸고,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발 빠르게 사령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이 주의를 기울이던 3대 가문, 이제는 2대 가문이 된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는 한동안 갈팡질팡하는 것 같더니 곧 막시밀리언과 회담을 제의했다. 이전에도 사업상 몇 번이고 만난 적이 있었으나 이번의 회담은 그 성격이 상당히 달랐다.
군터는 그 자리에 동석했다. 그의 격이 두 가주에 비해 떨어지지 않으니, 2대 1로 구성이 맞지 않는 자리를 채우기에 적절했다. 유론과 히링은 조금 꺼려하는 기색이었으나 반대할 수는 없었다. 회담을 제의한 것은 그들이고, 급한 것도 그들이다. 막시밀리언은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
“혼례를 올리신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경하 드립니다.”
“경하 드립니다.”
성찬이 가득한 큼지막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가주가 먼저 입을 뗐다.
“하하. 고맙소. 사실은 지금도 좀 많이 떨립니다. 어쩌다보니 혼기를 놓쳐버렸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 안사람을 맞이하게 되니 얼떨떨하고…생각도 많습니다.”
“누구나 그렇지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십니다. 아마 식을 올리시고 나서도 한동안은 적응이 되지 않으실 겝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와중에 군터는 묵묵히 음식을 들었다.
전혀 원치 않았던 이 자리에서 그의 역할은 두 가주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기세는 마주한 이들을 주눅 들게 했다.
“나도 어떨 때 자네를 보면 섬뜩할 때가 있어. 하하하.”
최근에 사석에서 막시밀리언이 한 이야기였다.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군터의 수하들도 간간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나날이 살벌해지신다면서 말이다.
본래 평화적이지 않은 얼굴에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수염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군터와 모페이브는 그 이유를 보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를 이번에도 칸젤에게서 찾았다.
“대장님의 검창에는 신의 파편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일으키는 작용 역시 신의 힘. 어떤 식으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발현되는지 저로서는 짐작도 할 수가 없군요.”
그 어떤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널뛰는 기운을 다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사람은 본래 인상이라는 것이 있고,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의 인상이나 분위기를 결정하는 요소는 외관. 즉, 생김새나 차림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러니까 범인(凡人)의 테두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들부터는 특유의 기세가 더해지기 시작한다. 보통 평탄한 삶을 살지 않은 이들이 거기에 속한다. 독한 마음을 품고 사람을 꽤 죽인 살인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무언가를 쟁취한 바 있는 어떤 방면의 대가, 등등 그 사람의 경험이 쌓아올린 삶이 그 사람의 기질에 녹아드는 것이다.
군터와 같은 무인, 군인들의 경우도 그런 경우다. 특히나 생사를 오가는 전장을 겪은 바 있는 이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기질을 나타내기 마련. 허나 칸젤의 작용으로 군터는 그런 이들과도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수하 중 한 명이 말하기를, 두렵다고 했다. 적의를 드러내지도, 하다못해 언성을 높이거나 따로 노려보지도 않았건만 그저 곁에 있음에 두려운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중에 더 자세한 말을 들은 바, 그것은 일종의 위화감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앞둔 느낌.
큼직한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 발톱을 지닌 맹수가 앞에 앉아있다면 사람은 맹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맹수가 배가 불러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다 해도, 심지어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지레 겁을 먹게 된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런 현상은 사람이 맹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자리를 뜨거나, 맹수가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덩치가 줄어들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군터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맹수의 심정을 느꼈다. 그건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사내를 앞에 둔 왜소한 사내가 보이는 반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동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지금도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는 두 가주를 보며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탁!
술 한 잔을 털어 넣고 탁자 위에 잔을 놓는다. 별로 크지 않은 소리였건만 지루하게 이어지던 흐름이 단번에 잘려나간다. 두 가주의 시선이 그를 향하니, 군터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령관님.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아아. 그랬지. 이거이거, 두 가주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군.”
거짓이다. 이 뒤에 이어지는 약속 따위는 없다. 하지만 말을 꺼낸 군터도, 받아치는 막시밀리언도 능청스럽게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했다.
두 가주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속을 짐작했다. 지루하게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라는 압박을 알아챈 것이다.
“사실, 이렇게 자리를 청한 까닭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다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유론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수 년 간 저희 두 가문은 사령관과 함께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랬지. 따지고 보면 내 리에론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사업 덕분일지 모르오.”
본론으로 들어갔음에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유론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고, 막시밀리언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간 저희는 주도의 파벌 싸움에 얽히고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는 이미 오래전 몰락에 가까운 풍파를 겪은 바가 있습니다. 선대들의 노고에 힘입어 간신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에게는 큰 욕심이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잃지 않기 위해 크게 바라지 않는 것이지요.”
“이해하오.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대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게 하여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소이다. 이건 내 진심이오.”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미 상호간에 알 것은 다 아는 상황이다. 꾸미는 말 따위는 외려 서로의 심기를 상하게 할 뿐이니, 이제와 돌려 말하는 것은 필요가 없었다.
유론이 작은 한숨 뒤에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령관께 여쭙고 싶습니다. 저희가 모든 것을 털어 놓았으니, 사령관께도 진실한 답을 원합니다.”
“그리 하리다.”
“리에론의 막하. 그 중심에 가까이 가시매, 사령관께서 바라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보신(保身)이오.”
“…더 자세히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명(功名)을 원하지만, 그를 위해 앞서 나설 생각은 없소. 내게 있어 첫 번째는 내가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오. 위험부담을 자처해서 지며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소. 겁 많고 소심한 사내로 비칠지 모르나, 이게 내 진심이오.”
유론과 히링, 두 가주는 잠시 말없이 막시밀리언을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언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보라는 듯이.
“답이 되었소?”
“충분히.”
“그럼 이제 내가 답을 들은 차례인 것 같군.”
두 가주는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의자를 밀며 일어선 그들은 공손히, 허나 결코 비굴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해서 낮에 눈을 좀 붙였더니 너무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