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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67화 (167/1,064)

<-- 2부 -->

다음날 아침에 다시 논하기로 했으나 막시밀리언은 그날 밤에 몇몇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수하들 가운데서도 정말 흉금을 다 터놓을 수 있을 만한 심복들만을.

막시밀리언을 위해 준비된 상석에 가장 가까운 두 자리는 군터와 코르넬의 것. 그 옆으로 열 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 띄엄띄엄 자리했다.

모일 이들이 모두 모이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막시밀리언이 가벼운 차림을 하고 들어섰다. 맞이하며 일어선 이들을 손짓으로 앉히고, 그가 입을 열었다. 오후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군. 특히 군터. 먼 길 오자마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말이야.”

“아닙니다.”

“아니긴. 좀 전에는 내 경황이 없어 제대로 치하도, 위로도 하지 못했네. 고생 많았어. 쉽지 않은 자리였을 터인데 말이야.”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지. 안 그런가?”좋은 경험이라…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경험이었음은 분명하다.

“예.”

“그래. 익숙해져야지. 이제부터는 가끔씩 자네가 내 대신 움직일 일이 있을 게야.”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리에 따른 책무. 막시밀리언의 최측근이자 천인장이며, 위글로우의 부사령관 직까지 겸하고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잘한 일에는 자잘한 인편을 쓰겠지만, 이번처럼 중한 일에는 격에 맞는 대리인이 나서야 할 테니.

“표정들만 봐도 생각이 다 읽히는군. 서신의 내용이 궁금했겠지. 안 그런가?”

대뜸 ‘그렇습니다’하고 답하는 이는 없었다. 군터가 은근히 풍기는 묵직한 기운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언이 가벼워 보이는 친근함으로 수하들을 대한다면, 군터는 무겁게 자리를 지킴으로 자칫 헝클어질 수 있는 기강을 바로잡았다. 이는 위글로우에서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살짝 기세를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위압감을 전할 수 있는 자는 흔치 않다. 경지에 이른 무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

지금만 해도 그렇다. 칼 한 번 제대로 쥐어본 적 없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나름대로 군문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이들조차 위축된다.

‘이런 촌구석에는 어울리지 않는 양반이야.’

막시밀리언으로부터 가장 먼 말석에 얌전히 자리한 미겔은 내심 감탄했다.

기세라는 것은 굴뚝의 연기처럼 쉽게 지피고 싶을 때 지피고 끄고 싶을 때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군터는 그걸 자유롭게 해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인인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과거 도적두목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미겔도 이러한 경지에 오른 무인은 몇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몇 되지 않는 이들은 모두 그 무명이 여러 도시에 걸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자리에 맞지 않는 이들이지. 저 양반도, 사령관도.’

자리가 큰 게 아니라 사람이 크다. 처음에는 그저 한 목숨 부지하려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든 막하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진심으로 막시밀리언을 섬기고 있다. 젊은 나이임에도 사령관으로서 그의 수완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만 보아도 그 리에론 가문을, 파비우스 리에론을 상대로 흥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자칫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위태로운 시도였으나 지금 그의 안색을 보건대 일이 잘못 풀린 것 같지는 않다. 곧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 기대가 되는 이유다.

“서신의 내용 말이야.”막시밀리언이 마침내 입을 떼니 모두의 귀가 쫑긋 섰다.

“파비우스 리에론이 내게 통혼을 요구하는군.”

“통혼…말입니까?”

그리고 입이 떡 벌어졌다. 통혼이라니! 막시밀리언은 미혼이고, 자식도 없다. 그러니 리에론의 여식을 그에게 보내겠다는 뜻이 아닌가.

“헌데, 제가 알기로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은 딸이 없는 것으로…….”

“형제의 여식이다. 사키드 리에론의 첫째 딸이지.”

“사키드 리에론이라면…….”

리에론 가의 전대 가주 윌리스 리에론은 슬하에 사남 이녀를 두었다. 그 중 첫째는 파비우스 리에론이고, 지금 이름이 나온 사키드 리에론은 셋째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급이 낮다고는 하지만 바크렌의 장군으로 있다.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 뛰어난 능력은 없으나 조용하고 수더분하여 가문 내에서나 그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다 하더군요.”

상관의 총애를 받으려면 충성스러운 것에 더해 능력도 있어야 한다. 여기 있는 이들은 막시밀리언이 나름대로 고르고 골라 자신의 수족으로 삼은 이들인 만큼 생각의 깊이가 어느 정도 있고 귀도 열고 사는 이들이다. 그런 만큼 살마드의 동향에 대해서는 현지에서 어정쩡하게 기웃거리는 이들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다. 당연히 리에론 같은 유력 가문의 사정은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사항이다.

사키드 리에론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그의 신상을 줄줄이 읊은 것은 많아봐야 삼십 줄을 갓 넘었을 것 같은 젊은 나이의 사내였다. 크지 않은 키에 빼빼 마른 몸은 그가 칼이나 창 대신 펜을 쥐는 이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눈에 어린 총기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의 근거처럼 보였다.

그의 이름은 위벨. 위글로우의 한미한 관리로 지내고 있는 것을 2년 전에 막시밀리언이 직접 발탁한 자였다. 그가 막시밀리언과 함께한 지 이제 2년일 뿐이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봐야 이제는 직계도 아니다.”

“파비우스 리에론에게는 여식도 없지만, 어차피 있다한들 직계와 엮이는 통혼은 사령관님의 위치에서는 노릴 수 없습니다.”

신랄한 말이나 막시밀리언은 불쾌해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아무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리에론의 인정이었는데, 그들은 내게 목줄을 걸려 하는구나.”

가주의 친형제라지만 사키드 리에론의 자식들은 한 세대가 지나면 방계로 갈라질 이들이다. 파비우스 리에론이 아낀다지만 그래봐야 사키드 리에론은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제대로 된 실적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이름뿐인 장군이다. 가문 내에서나 군부에서나 실권은 갖지 못하고, 리에론이라는 이름값에 기대어 체면이나 차리는 인물에 불과하다. 그런 이의 여식과 혼인한다 하여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리에론 가문의 위세 한 두 점. 그에 반해 운신의 제약이 생긴다.”

리에론의 여식과 통혼을 한다는 것은 리에론의 울타리에 완전히 들어선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막하에 있는 경우야 상황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몸을 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단 한 가족이 되고 나면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혈연으로 묶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다고 할까.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묶이는 것을 거부한다면 리에론과는 척을 지는 셈입니다.”

“그래. 그렇지.”

무려 가주인 파비우스 리에론이 직접 제의한 혼담이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건 파비우스 리에론과 리에론 가문의 체면에 상처를 내는 것이고, 곧 리에론과 끝까지 함께할 생각이 없음을. 다시 말해 상황이 안 좋아지면 배를 갈아타겠다는 뜻을 명백히 내비치는 일이다. 이 혼담의 거절은 곧 리에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금의 채굴량을 조절할 것을 그랬어.”

막시밀리언이 자책하며 혀를 찼다.

베이고르의 망령과 야만인들이 일으킨 전쟁 이후, 바크렌이 반쪽이 났다. 이후 바크렌의 상황은 열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험난하게 흘러갔다. 살 곳을 찾는 난민들이 넘쳐나고, 덕분에 살던 곳에서 잘 살고 있던 이들도 덩달아 혼란에 휩싸였다. 타 주에서 식량이며 물자들이 수송되어 왔지만 혼란을 다 잠재울 수는 없었다. 먹고 살기가 힘드니 각지에서 도적들이 일어났고,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그 심각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오히려 북쪽 전방 지대가 훨씬 더 평온할 지경이었다. 적어도 그곳엔 유사시를 대비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만 배고파 눈이 돌아간 도적들이라 해도 감히 군대가 버티고 있는 곳에서 날뛸 수는 없으니, 자연히 주둔 병력이 적은 후방이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 사고가 터지니 자연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일반 백성들이야 살던 곳을 떠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모험이니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산다 하지만, 지방에서 유지로서 행세하던 이들은 갑작스레 사는 곳이 위태로워지니 안전한 대도시로 옮겨갔다. 허나 가진 재산이 대부분 현물이라 옮기는 데 힘이 들었다. 그걸 다 가지고 움직이다가는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 그들은 가진 재산을 쉽게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재화로 바꾸었다. 보석과 금, 은 같은 귀금속이 바로 그것이다.

찾는 이들이 많아지니 귀금속의 값은 계속해서 올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일어선 베이고르와, 초원의 야만인들이 세운 타칸 연합국의 영토가 되어버린 북쪽 땅. 그곳의 진귀한 물품들을 돈벌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암상들이 제국의 땅으로 가지고 오면서 귀금속의 값은 또 다시 폭등했다. 암상들이 그들의 상품에 대한 대가를 오직 귀금속으로만 받은 것이다. 제국의 화폐는 북쪽 땅에서는 소용이 없다면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심지어는 제국의 금화를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 쓴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금의 순도를 따지는 암상들의 기준이 깐깐하다 못해 철저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인해 막시밀리언이 보유한 금광의 가치는 그야말로 이야기 속의 보물구멍처럼 귀해졌다. 염탐꾼들도 크게 늘어 광산을 지키는 병력을 배 이상으로 늘렸을 정도다.

“금광이 내 명줄이다. 아마 파비우스 리에론도 뒷감당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내 목을 베고 금광을 빼앗고 싶겠지.”

위글로우의 금광은 단순히 금광 하나라고 치부할 정도가 아니다. 3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만고만한 금광 두어 개를 합한 정도의 채굴량을 보이고 있었다. 세간의 눈을 피해 은폐한 탓에 지금보다 산출량을 크게 늘릴 수는 없지만, 대신 더 오랫동안 꾸준히 금을 캘 수 있으니 그를 단점이라 할 수도 없다.

“허나 사령관께서 이 혼담을 거절하신다면 그는 어떻게든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욕심이 위험부담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거침없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면 막시밀리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

그러니 이 혼담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혼담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맥없이 목에 줄이 감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

“무엇을 받아내고자 하십니까?”

“이 도시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리.”

막시밀리언이 단호히 답했다.

========== 작품 후기 ==========

다들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오늘부터는 어찌어찌 글을 쓸 짬이 날 것 같습니다. 내일도 연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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