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밤을 잊은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할렌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별채에서 따로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고풍스런 음악소리를 대충 안주 삼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터로 인해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야 했다.
“다들 앉아라. 나도 한 잔 주고.”
군터는 너덧 잔을 연달아 비웠다. 그 사이 할렌은 눈짓으로 병사들을 모두 내보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일? 있었지.”
군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것이다.
‘군터. 이쪽으로 올 생각 없소?’
그 말 뒤에 파지오는 담백한 말로 그들이 얼마나 그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중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군터는 담백한 말씨에 도사린 달콤한 유혹 너머를 느꼈다. 파지오의 능숙한 말솜씨에서 틈을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듣기 좋으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을 뿐.
하지만 한 번 경각심을 가지니 계속 매끄럽게 이어지는 말 속에서 의문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내 뜻을 밝혔는데도 굳이 이리 나올 이유가 있는가.’
군터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자만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회유가 파지오의 독단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관재중신이나 되는 이가 무공 좀 뛰어난 천인장에게 이리 공을 들일 이유가 무엇인가?
‘본래 이런 자였나.’
가증스러운 낯짝을 하고서 ‘이쪽’에 넘어오면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 꿀 바른 입을 나불대는 파지오가 원망스러웠다. 거래였다고는 하나, 그는 파지오의 깊은 원한을 갚아준 바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은인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속여먹으려 들다니.
내심 파지오와의 재회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군터는 머리와 가슴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파지오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 곧 자리를 떴다. 그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거북했다.
‘뱀과 같구나.’
당장에는 파지오에게 화가 났지만, 어찌 그뿐이겠는가. 연회장에서 웃고 떠드는 이들이 저마다 독낭 하나 정도는 품고 있지 않겠는가. 그걸 모르고 좋다고 손을 내밀었다가 독니에 물린들 누굴 탓할까. 일찌감치 알고 조심하지 않은 자의 부주의일 뿐이다.
“흥!”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고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자신을 끌어들이려던 파지오와 그가 속한 쪽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넌 어찌 생각하느냐?”
할렌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떠보려는 수작이 아니었겠습니까?”
할렌은 시오도크에서의 비사를 알고 있었다. 그나마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속까지 전부. 군터가 파지오의 추천장을 받아내고서도 그것을 썩혔음을 알고 있었기에 한때는 조금 아쉬워 하기도 했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떠보려는 수작이었지. 하지만 어째서?’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설마하니 천인장 하나 등쳐먹겠다고 그랬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그의 뒤에 있는 자들을 바라본 것일 터. 즉, 막시밀리언이나…더 나아가 파비우스 리에론을 의식한 것일 테지.
‘편한 사이는 아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경원시할 수는 없다 했지.’
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이 하나는 그럴 듯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정치판이라 하지 않았는가.
‘알리는 게 좋겠지.’
혼자서 툴툴댈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군터는 위글로우로 돌아가는 대로 막시밀리언에게 오늘의 일을 보고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자가 대장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직접 은밀히 움직여 그 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넌 그 성격을 죽여야 할 게다.”
어깨를 들썩이는 할렌을 타일렀다. 백인장 씩이나 되고, 결혼하여 자식까지 본 녀석이지만 아직은 어리다. 타고난 뜨거운 기질을 이따금씩 다스리지 못하고 이렇듯 흥분하곤 했다. 그러나 말로는 질책을 하면서도 군터는 내심 웃었다. 살라스도 그렇지만, 할렌 역시 충성스럽기 그지없다. 비록 서투를지라도 믿음직스런 이유다.
“연회가 끝나면 즉시 파비우스 리에론을 만날 거다. 그러고 나면 위글로우로 돌아가자. 그때 동안 별 일 없도록 병사들 관리에 신경을 써라.”
“그리하겠습니다.”
*
연회는 무려 보름 동안 이어졌다. 군터는 연회가 끝나고 나흘 뒤에야 파비우스 리에론을 만날 수 있었다. 이틀 동안에는 연회를 주도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지쳤던 파비우스 리에론이 접견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고, 그 후에는 만나는 이들의 비중을 따져 접견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틀째에 순서가 돌아온 것도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그의 뒤로도 족히 수십, 수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만 돌아가려 합니다.”
“그래. 돌아가야겠지. 막시밀리언에게 안부 전해주게. 그리고…이것도 함께.”
시종이 파비우스 리에론이 건넨 서신을 군터에게 전했다. 군터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품에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파비우스 리에론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막시밀리언이 부럽군.”
“예?”
“자네처럼 충성스러운 부하가 있으니까 말일세.”
“…….”
순수한 칭찬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은근한 어조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군터의 낯빛이 살짝 굳어지자 파비우스 리에론이 픽 웃었다.
“루잔의 성주 파지오. 아샤즈 테오모렌의 측근이지. 시오도크에서 연을 맺은 것 같더군.”
“…그건.”
“해명을 듣고자함이 아니야. 막시밀리언이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보는 어리석은 자라고는 생각지 않아. 다만 순진한 군인에게 내 조 한 마디를 해주고 싶을 뿐이지.”
가슴이 뛰었다.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흥분이 떠오르자 파비우스 리에론이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으로 약한 것이야. 제아무리 굳게 믿는다 해도 약간의 틈만 생기면 의심이라는 놈이 어김없이 고개를 쳐들거든.”
억울했다. 허나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 애초에 구실을 만들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나 지금에서 되짚어 보면 분명 경솔한 행동이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파지오와 만났을 당시 주변에 눈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파비우스 리에론이 어찌 알았느냐는 거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던가.
“이 주도는 살벌한 곳이야.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난 이곳을 전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항시 적이 지근거리에 있는 거야. 자연히 말이며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야. 이곳에서는 그리 해야 해. 안 그러면 밟히는 거야. 전장에서 목이 날아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될 수도 있지.”
파비우스 리에론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은 목소리만큼이나 그늘졌다. 이틀을 쉬었다지만 보름간의 연회가 남긴 피로가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적어도 이곳에 올 때는 전장의 한복판에 들어선다 생각하게. 그것이 자네를 위하는 것이고, 막시밀리언을 위하는 것이야.”
“…뼈에 새기겠습니다.”
치욕스러웠다. 실책에 대한 자책과, 버러지라고 여겼던 이에게 그것을 꼬집혔다는 점이 뒤섞여 더없이 그러했다.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젓는 축객령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악 다물고 있던 이빨은 양 턱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할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좋은 판단이다. 그는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연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지만 리에론 저택은 여전히 시끄럽게 붐볐다. 이전에는 그저 거슬리기만 했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란스러움이 어쩐지 스산해보였다.
*
위글로우로 돌아가는 길은 짧게 느껴졌다. 달리는 쿠센 위에서도 생각에 젖어있던 탓이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에 묻혀있다 보니 어느새 살마드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성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위글로우에 도착한 군터는 즉시 막시밀리언에게 향했다. 막시밀리언은 하던 일을 다 미뤄두고 군터를 맞았다. 표정은 담담하지만 그 역시 살마드에서 돌아오는 군터를, 혹은 그가 가져오는 것을 꽤나 애타게 기다린 것 같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막시밀리언은 군터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바로 파비우스 리에론의 서신을 읽었다.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가던 그의 표정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아마도 서두의 개성없는 인사말 뒤, 본론에 이르러서였을 것이다.
장내의 모든 이들이 표정으로 의문을 드러냈으나 막시밀리언은 서신을 다 읽고 나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허공 한편을 응시하며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한 방 먹었군.”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 침묵 끝에 막시밀리언이 힘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제껏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그의 휘하들이 입을 열었다.
“파비우스 장군이 뭐라고 합니까?”“혹 좋지 않은 내용인지…….”
막시밀리언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 읽은 서신에 다시 가 머물렀다.
“군터.”
“예.”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에게 달리 들은 말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심에 찬 모습이다. 막시밀리언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라, 관심 없던 서신의 내용이 절로 궁금해졌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지. 서신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때 의논하도록 하세.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
그렇게 자리를 파한 막시밀리언은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대저택에 머무는 인원은 고용인과 노예들을 제외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가족들은 살마드에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고민에 찬 얼굴이시군요.”
“네가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저택의 심처에 머무는 라일라는 귀가한 막시밀리언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맞았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한결같았다. 그를 대하는 태도만 말하는 게 아니다. 외모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십대가 주름지고 흰 머리가 생기는 나이는 아니라 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가는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그녀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에 대해 물었을 때 라일라는 자신이 신의 은총을 받아 그렇다 했다. 신을 섬기는 신녀에게는 노화가 늦게 찾아온다나.
“파비우스 리에론이 답을 보냈다.”
“그렇습니까.”
“난 그저 내 입지를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내게 선택을 강요하는구나. 크게 봐줘서 고맙다 해야 할지, 밀어붙여 야속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을 뻗어 부드러운 살결을 쓸었다. 라일라는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헌데, 갈라진 두 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 너라면 어찌 하겠느냐?”
“신께 여쭙겠습니다.”
“난 신을 믿지 않는데?”
“그럼 저는 마땅한 답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모든 난제에 답을 내려주는 존재는 편리하지만 동시에 허무하다. 그래서 막시밀리언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가 품은 야망까지도 신의 자잘한 행사에 불과하다면, 삶의 열정을 태울 마음마저 죽어버리지 않겠는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스스로 헤매고, 헤쳐나가리라.
‘어찌하고 싶으냐.’
육욕에 탐닉하며 몇 번이고 되뇐다. 마음속에 깊이 숨은 그의 신이 수줍은 고개를 내밀기를 기다리며.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자꾸만 밀리네요.
더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이번 연휴에는 정상적인 루틴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쉬는 날이라 휴일일 것인데, 왜 평소보다 더 바빠지는 걸까요? 개인적으로 이번 연휴가 전혀 반갑지 않은 한 사람입니다...
능력 부족한 글쓴이와 함께 해주시는 인내심 강한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