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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65화 (165/1,064)

<-- 2부 -->

리에론 가문의 대저택에서 연회가 열렸다. 파비우스 리에론의 장자이자 리에론 가문의 후계자인 콘체스 리에론의 열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연회였다.

어지간한 저택 십여 채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리에론의 대저택이 통째로 시끌벅적할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시시해 보이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옷차림만 보아도, 걸음걸이만 보아도 은연중 몸에 베인 당당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몇 걸음마다 한 번씩 공손히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제 아무리 어디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한들, 오늘 리에론의 대저택을 찾은 이들은 너무나 면면이 화려했던 것이다.

군터는 연회의 주 무대라 할 수 있는 파비우스 리에론이 자리한 중심 자리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나, 애초에 자리를 권하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위글로우에서는 꽤나 행세하는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흔하게 널린 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좋군.’

귀찮게 구는 자가 없으니 혼자 술을 마시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눈치를 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 전에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눈도장 한 번은 찍고 가야함은 물론이다. 연회에 참석 했다는 것은 확인시켜줘야 하니까 말이다.

“선객이 계셨군.”

“……?”

어떻게든 파비우스 리에론과 그의 곁에 몰려든 권력자들의 눈에 띄려 주변을 얼씬거리는 이들을 피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자가 있었던지,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아니…그대는 군터 공이 아니오?”

뒤돌아봤을 때 바로 얼굴을 알아봤다. 마찬가지였던지, 먼저 아는 체를 한 것은 상대였다.

“성주님이 아니십니까.”

고풍스러운 평복을 입은 중년인. 그는 시오도크의 성주였던 파지오였다. 군터는 일전에 그의 성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그의 은밀한 일을 도와주기도 했고 말이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우연이구려.”

“그렇습니까?”

우연이라. 리에론의 연회에 참석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이런 한적한 곳에서 재회한 것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공교로웠다. 군터가 아는 그는 권력자의 앞에서 파리처럼 손을 비비는 자는 아닐지라도, 굳이 멀찍이 떨어져 나올 자도 아니었으니까.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니 파지오가 겸연쩍은 얼굴을 한 채 씩 웃었다.

“허, 참. 내 연기가 너무 어설펐소?”

“그런 것도 있지요.”

“후후. 그런가? 아무튼, 그대가 짐작하는 바가 맞소. 나는 일부러 그대를 찾아왔소.”

“어째서 저를.”

“공은 내 은인이지 않소. 다시 만나고 싶었지. 또, 받아간 추천장을 어째서 썩혔는지도 알고 싶었고.”

“단지 그뿐입니까.”

“달리 뭐가 있겠소? 자랑은 아니지만, 이 몸은 나름대로 출세했다오. 어쩌면 머지않아 이름이 길어질지도 모르지.”

“예?”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던 군터는 잔잔히 미소 짓는 파지오를 보고서야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감축 드립니다.”

“확실한 건 아니오. 만약 정말로 성사가 된다면 내 그대에게 연회의 초청장을 보내리다. 물론…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오.”

“폐는 무슨. 그럴 리 있겠습니까.”

“모르는 일이지. 그대의 상전과 나는 서로 다른 길에 서 있잖소.”

그 말에 군터는 파지오를 따라 쓴웃음을 지었다.

*

군터와 파지오는 만난 곳에서 조금 걸어 자리를 잡았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에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 되어 있었다. 그들과 같은 손님을 위해 미리 마련해둔 것인 듯했다.

“솔직히 놀랐소. 난 우리가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거든.”

관재중신에게 닿는 추천장을 마다할 이는 적어도 이 바크렌의 땅에는 없을 것이다. 파지오는 두 사람에게 추천장을 내어줄 당시에 당연히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재회한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황당하게도,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또 다른 한 사람인 군터는 당시 일개 천인장에 불과했던 그의 상관에게 돌아가 버렸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파지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그대와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묻고 싶었소. 어째서요?”

사실 지금도 제법 잘 풀린 편이다. 백인장이었던 그가 천인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추천장을 이용했더라면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리 되었을 것이다.

“따르던 분을 계속 따른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 허나 그대의 경우는…충분히 이상한 일이오. 출세를 바랐다면 바로 눈앞에 훨씬 더 나은 길이 있었으니까.”

“사령관께서 내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 없고, 오히려 줄곧 후대를 해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분을 배신하겠습니까.”

“배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제국의 관리라 함은 모두가 황제폐하의 신하일 뿐이지 않소. 마음속에 황제폐하에 대한 충심만 간직하고 있다면 몸이야 어디에 두든 무슨 상관이겠소.”

“제 귀엔 변명으로 들립니다.”

“변명이면 어떻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 하나 정도 그 무리에 편승한다 하여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라고.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보취급 받는다오.”

“제 선택이었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쯤 해두시지요.”

“그럽시다. 불편했다면 사과하리다.”

“아니.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군터는 파지오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찾았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는 얼굴을 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만큼 리에론의 연회라는 것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적잖이 그리워지는 장소였다.

“용케도 저를 찾아오셨군요.”

“못 찾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대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내라오.”

“그렇습니까.”

군터는 가볍게 듣고 웃으며 넘겼지만, 파지오의 말은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 스르로 기세를 갈무리한들, 은연중에 풍기는 사나운 분위기와 무부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큰 체구는 관심 없이 지나던 사람들도 한 번 씩 눈길을 주게 만드는 특별함이었다. 괜히 사람 많은 곳에 있어도 그의 주변으로 공간이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저를 찾으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불편한 자리에 친히 발걸음을 하면서까지.”

공식적인 정전. 비공식적인 패전 이후 불어온 숙청의 바람 앞에 무수히 많은 관리들이 잘려나갔지만 관재중신은 자리를 보전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윗분들의 은밀한 사정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됐다.

황도로부터 내려온 신세력. 기존에 바크렌을 지배하던 구세력. 그리고 그들이 각기 문과 무로 나뉘어 총 네 개의 세력이 현재 바크렌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들은 구군부와 신군부. 그리고 구정부와 신정부로 일컬어졌다. 파지오가 모시고 있는 관재중신은 그 중 구정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속한 정도가 아니라 파벌을 이끌어가는 거두 중의 거두였다.

얼핏 생각해보면 황도에서 굴러들어온 돌인 신군부와 신정부에 맞서 기존 바크렌의 구세력들이 사이가 좋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의 생리란, 그것이 애초 어떻게 태어났고 굴러왔던가에 상관없이 현재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이치로, 현재의 정세만 놓고 보면 구군부와 구정부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군터는 그리 알고 있었다.

“그리 불편하지는 않소.”

파지오가 싱긋 웃었다.

“지금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언제 다시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설령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라도 이런 자잘한 경사 같은 것에는 살갑게 축하해주곤 한다오.”

“언제 줄을 바꿔 탈지 모르기 때문입니까?”

“그런 건 아니고.”

파지오가 다시금 웃었다.

“그런 일은 은밀하게 선을 댄다네.”

“성주께서도?”

“물론. 안 그런 사람이 없어. 그나마 나는 덜한 편이오.”

중앙 정치라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더니, 다들 맨발로 걷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는 가죽 신발, 누구는 강철 군화.

‘신 없는 자들에게만 살벌한 칼날이군.’

재미있다. 우습기도 하고.

“그래서…다시 여쭙습니다만, 저를 찾아오신 용건은?”

“여전하군. 천인장으로 몇 년 있었으면 조금 바뀔 줄 알았는데…시오도크에서 봤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려.”

“변하는 사람은 변하고, 안 변하는 사람은 안 변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처음이오. 변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은.”

파지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군터는 그가 시오도크에서 봤던 때보다 훨씬 더 노회해졌다고 느꼈다. 시오도크의 성주였던 시절의 그는 이따금씩 표정이나 기색을 통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가 유독 흔들렸던 것일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면 그때의 파지오는 마음에 품었던 계집을 잃고 원수의 얼굴을 매일 보면서 복수심에 몸부림치던 사내였다. 어쩌면 지금의 이 모습이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좋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파지오가 웃음기를 지웠다. 그의 분위기가 일변하니 군터도 자세를 바로 했다.

“군터. 이쪽으로 올 생각 없소?”

“…….”

군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시에 굳게 다문 입매가 꿈틀거렸다.

*

“많기도 하구…ㅁ요.”

“거 참. 그 말투 하나가 그리도 안 고쳐지더냐?”

미겔이 뒤따르던 부하에게 핀잔을 던졌다. 습관적으로 저렴한 말투를 구사하려던 부하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혀를 찬 미겔은 울퉁불퉁한 길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얇은 옷을 입은 마른 몸매의 중년인이 내려오는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얼마나 나왔소?”

“스물일곱 수레입니다.”

“전보다 는 것 같은데? 한 달 전만 해도 스물 조금 넘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중년인이 좁은 어깨를 펴며 힘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파면 팔수록 고갈이 되기는커녕, 점점 산출량이 늘고 있습니다. 이 광맥은 그야말로 보물구멍입니다.”

자그마한 구멍에 손을 넣으면 넣는 대로 보물이 잡혀 나온다는 꿈만 같은 동화.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바로 이 광맥과 같으리라. 파면 팔수록 번쩍이는 금이 나 캐가쇼 하고 모습을 드러내니 죽어나는 건 마구잡이로 투입되는 노예들이었다.

“스물여덟 번째가 나오는군요.”

얼마나 내려갔을까, 또 하나의 수레가 번쩍이는 것이 섞인 돌덩이들을 가득 채운 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야말로 보물구멍이구만.’

지하 특유의 쾌쾌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으나 느껴지는 것은 향긋한 돈 냄새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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