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오랜만에 다시 찾은 살마드의 거리를 감상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군터와 그의 수하들은 살마드에 도착해 도시출입 절차를 마치자마자 리에론 가문으로 향했다. 생일날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아 있었으나 그 전에 먼저 리에론 가에 인사를 하고 공물…그러니까 생일 축하 선물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어마어마하군요.”
리에론 가문의 저택에 도착해서 느낀 감상은 할렌과 군터가 동일했다. 위글로우에서도 가장 좋은 축에 속하는 저택에 살고 있는 군터였지만 그런 그의 저택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리에론 가문의 저택은 차원이 달랐다. 과장 좀 보태서 저택의 정문이 도시의 성문만 했다. 활짝 열린 문 주변으로는 무장한 병사들이 철통 같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사람과 수레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만 못하다 해도, 리에론은 리에론인가.’
군터는 내심 감탄했다. 그가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리에론은 여전히 명문이었고 권세가였다. 그것을 장사진을 친 인파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 생일날까지 열흘 가까운 시일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이 정도라니.
“어디서 오셨습니까.”
군터 일행은 기병만 이백인 대 인원이었다. 그러다보니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리에론의 군졸들이 다가와 신원을 물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군터의 휘장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위글로우에서 왔다. 기다려야 하겠는가?”“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신원을 확인한 군졸들이 군터 일행을 안내했다.
“편히 지내십시오. 혹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거나 말씀 전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시종을 통해 언제든지…….”
리에론의 손님 대접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명문가의 품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은 언제 뵐 수 있겠소.”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주님을 뵙고자 하시는 분들의 선약이 상당히 밀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인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만이 싹텄다.
위글로우의 은폐한 금광에서 산출한 금의 반 정도가 리에론 가문에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숫자놀음에 관심 없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양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바쳤건만, 그저 수많은 가신들 중 하나에 불과한가.’
설마하니, 파비우스 리에론이 선착순으로 저택에 들어선 자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밀렸다는 약속의 순서 기준이 무엇이겠는가.
‘이게 리에론이란 말이지.’
막시밀리언이 등불이라면, 리에론은 높이 뜬 해와 같았다. 대지만물을 밝게 비추는 해에게 있어 등불의 자그마한 빛이 눈에 차기나 하겠는가.
‘그래봐야 지는 해일 뿐.’
먼 길을 온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 해서 삐친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군터는 리에론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입장이었다. 만약 살마드 공성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던 전대 가주. 그가 죽지 않고 살아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면…그랬다면 이리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본 적은 없으나, 그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제법 멋진 것들뿐이었다. 그 최후까지도.
하지만 그 자식은……. 군터는 파비우스 리에론을 알고 있었다.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으나, 일전에 그가 오테론으로 왔을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노예 사냥꾼이라는 달갑지 않은 오명까지 썼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제 아비와 선조들의 유산을 갉아먹기나 할 자.’
명예롭지 못한 자이고, 한 몫 챙기기 위해 군을 이끌 정도로 가볍고 욕심이 많은 자다. 그런 자가 어찌 바크렌의 군부를 휘어잡을 수 있겠는가. 당장에 일개 천인장에 불과한 그조차 속으로 이렇게 반감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그가 보기에, 리에론의 아래에 머무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위글로우에서 들었던 막시밀리언의 당부를 떠올리며, 군터는 그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후. 드디어 군터는 파비우스 리에론을 만날 수 있었다.
측근으로 보이는 수하들이 수십 명 씩이나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하나 같이 내려 보는 눈이었다. 이는 곧 그들의 신분이 하나 같이 천인장 아래가 없다는 뜻이리라.
군터는 그들의 깔아보는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생전 본 적도 없는 큼지막한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의 고개는 정면을 향해 있었고, 시선은 여섯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상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앞으로 걸어간 군터는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군례를 취했다.
“위글로우의 천인장 군터입니다. 위글로우의 사령관 막시밀리언님의 명으로…….”
통상적인 인사와 축하의 말이 오갔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극히 형식적인 대화였다.
“막시밀리언은 늘 나를 기쁘게 하고, 또 부담스럽게 하는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매번 이렇게 버거울 정도로 선물을 안겨주는가.”
너털웃음을 흘린 파비우스 리에론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도열해 있던 이들 대다수가 고개 숙인 채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
군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끊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걸 내가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막시밀리언이 내게 등을 돌리려 함인가?”
군터는 고개를 들었다. 팔걸이에 올린 팔로 턱을 괴고 있는 파비우스 리에론이 보였다. 수염 때문인지 수 년 전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제법 원숙해 보이긴 했으나, 인상은 그대로였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혹 막시밀리언이 지금 중한 병이라도 앓고 있는가? 내 나름대로 귀를 열고 산다 자부하건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건강하십니다.”
“허면? 줄곧 직접 찾아오던 자가 느닷없이 수하 하나를 달랑 보내는 저의가 무엇인가. 막시밀리언이 리에론을 그만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 아니냔 말이야.”
파비우스 리에론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일관되게 조곤조곤했다. 허나 비틀린 속내가 말 한 마디마다 듬뿍 묻어나니, 누구라도 그가 불쾌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여기가 기로임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막시말리언이 그를 보낸 이유가 드러났다.
높게 자리한 상석에서 따가운 시선이 떨어졌다. 무릎 꿇으라, 굴욕적으로 조아리고 사죄하라 소리 없이 외치는 듯했다. 대단치 않게 여긴 자의 시선이었으나, 의외로 꽤나 무거웠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어찌하여 장군께서는 축하드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이 몸을 반가이 맞아주시기는커녕, 도리어 핍박을 하십니까.”
“뭐라?”
파비우스 리에론과 군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모시는 사령관께서 단 한 번이라도 리에론의 사사로운 일을 지나치신 적이 있었습니까.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부족함 없이 성의를 표하셨고, 지금 또한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마음을 보이셨습니다. 헌데 장군께서는 이번 한 번 그 분께서 이 몸을 대신 보내셨다 하여 이리 대하시는군요.”
군터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켰다.
“무례하다! 감히 어느 안전에서!”
“일개 천인장 주제에 건방지게! 무릎을 꿇어라!”
좌우로 도열한 인사들 가운데 몇몇이 언성을 높였다. 개중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한 발 앞으로 나서는 자들도 몇 있었다. 군터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들을 깔끔히 무시했다. 그것이 더 노기를 끓게 했는지 한 발 앞으로 나선 이들이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락만 내려준다면 당장 이 건방진 놈의 무릎을 꿇리겠다는 듯이.
허나 파비우스 리에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당차군.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지?”
“죄 지은 바가 없으니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핫!”
파비우스 리에론이 크게 웃었다. 다만 호의가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웃음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즐거움, 분노, 우스움 등. 군터는 그의 파안대소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뭐랄까…신선하긴 하군. 내가 이 자리에 앉은 후에, 아니지. 그 전까지 통틀어도 너 같은 자는 처음이다. 막시밀리언이 날 웃게 할 작정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허나 뭐든지 적당해야 좋은 것이야. 더 이상의 재미가 없어. 그러니 농담은 여기까지 하지.”
파비우스 리에론은 한 순간 표정을 바꿨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그 변화는 너무 급작스러웠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막시밀리언을 대리하여 왔다면…좋다. 말해보아라. 왜 녀석은 직접 오지 않았느냐? 또한 너 같은 자를 보내어 날 능멸하는 저의는 또 무엇이냐.”
“능멸하지도 않았고, 저의도 없습니다. 또한 직접 오지 않은 것을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
파비우스 리에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푹신한 모피가 깔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방금 전까지 노기로 가득 차 있던 장내는 한풍에 쓸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 말이 네 기분대로 뱉은 것이라면 넌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사령관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파비우스 리에론이 코웃음 쳤다.
“녀석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 나다.”
“공로에 따른 보상이었고, 이제껏 보답한 은혜였습니다.”
“그렇군.”
군터는 조금 놀랐다. 거기까지 들은 파비우스 리에론이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말을 전부 수긍한 것처럼 말이다.
표정관리가 조금 흐트러졌던 것일까. 파비우스 리에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고…대담하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필시 자네 같은 수하를 두어서겠지? 신뢰할 수 있는 부하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야.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그것을 알았지.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수하라고 해봐야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정도거든.”
지금 방에 남아 있는 이들은 처음 자리했던 인원의 오분지 일 정도였다. 여기 있는 이들을 신뢰한다 함은, 바꿔 말하면 나머지 오분지 사는 신뢰할 수 없다는 뜻.
“녀석의 뜻을 알겠다. 자네의 임무는 끝났어. 이제 돌아가는 날까지 원껏 즐기다 가게.”
“…옛.”
가벼운 손짓에 군터는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난 후, 줄곧 침묵하고 있던 자들 중 한 사내가 입을 떼었다.
“과분한 자리에 앉은 자가 과욕을 부리는군요. 원하는 대로 해주실 생각이십니까?”
“하는 짓이 귀엽지 않은가. 분수를 잘 아는 놈이고, 지킬 줄도 아는 놈이야. 거기에 능력도 적당히 있는 편이니… 자네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뢰할 만한 녀석이지.”
“하오면…….”
“사람 하나가 아쉬운 시기다. 가볍게 내어주고 묶어둘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바크렌 전역을 제 앞마당처럼 여기던 철부지 후계자는 이제 없다. 가주의 자리에 올라 모든 것을 책임지기 시작한 후부터 파비우스 리에론은 빠르게 변해왔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았고, 사람을 쓸 줄도 알았다. 그가 보기에, 막시밀리언은 쓸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 분수를 잘 아는 놈이지.’
그렇기에 자기 몸집이 커졌음을 알자마자 더 큰 우리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비록 그 수단이라는 것이 꽤 놀랍기는 했지만.
========== 작품 후기 ==========
드디어 올립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제 컨디션을 찾고 연재도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