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63화 (163/1,064)

<-- 2부 -->

막시밀리언의 자택에 위치한 회의실에는 막시밀리언과 그의 수하들이 모여 있었다.

“군터님을 보내기로 하신 결정은…조금 우려스럽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민감한 자리가 될 것이 뻔한데, 군터님이 혹 잘못 대처하기라도 하면…….”

명목상으로는 장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라 하나, 그게 구실에 불과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안다. 파비우스 리에론과 리에론 가문은 줄곧 이런 자잘한 자리들을 통해 계속해서 당여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가볍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과하게 무겁지도 않은 자리를 통해 리에론 가문의 막하들을 시험하고, 한편으로는 리에론의 세를 바깥에 드러낸다.

예전에는 필요 없던 일이다. 리에론 가문이라는 이름이 곧 바크렌의 군부를 상징하던 때는 말이다.

하지만 신 군부가 생겨나고, 리에론 가문을 위시한 기존의 바크렌 군부가 구 군부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에는 안 하던, 할 필요가 없던 집안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언은 그들의 요구에 충실히 응한 편이었다. 리에론 가문 직계의 생일이라든가 하는 가벼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두둑이 성의를 표했고, 종종 직접 찾아가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충실한 개처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해서야 짐승은 아니라 해도 바보나 다름없다. 권리란 주장하는 자의 것이다. 물론 괜히 혀를 잘못 놀렸다가는 피를 보겠지만, 준비가 된 자는 입을 열기를 주저치 않는 법.

“내 생각은 달라. 이 일은 군터가 제격이다.”

막시밀리언은 수하들의 속내를 짐작했다. 그들이 지금 아쉬운 소리를 내는 것은 금방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이유도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하는 일도 없이 막시밀리언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터에 대한 질시의 마음이 큰 때문일 터.

그럴 만도 하다. 군터와 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와는 달리, 위글로우에서 새로이 얻은 지금의 이 수하들은 군터가 받는 대우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군터가 세운 공을 모른다.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이다.

‘하기야, 그 녀석이 일을 할 기회가 없었지.’

요 수 년 간 군터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트라벤 가문과 하이글렉을 칠 때 나섰던 정도다. 그 외에는 회의 때마다 말없이 자리나 지켰던 게 전부이니, 감히 그에게 대놓고 뭐라 할 이는 없어도 뒤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을 주고받았을 법하다. 일도 하지 않는 자가 대우를 받는 것은 누가 봐도 즐겁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리에론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짜증스러울 테지. 이제껏 말 잘 듣던 개가 갑자기 꼬리를 흔드는 대신 으르렁거리니까 말이야.”

“그 무슨 말씀을…….”

신랄한 말에 수하들이 말끝을 흐렸다. 허나 비유가 과했더라도 틀리지는 않은 말이었기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르던 개가 말을 안 들으려 하면 주인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지. 하나는 다정하게 달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몽둥이를 드는 것이야.”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어찌 해야 하는가. 몽둥이를 드는 주인 앞에서 개는 어찌해야 할까.

몸을 숙이고 다시 꼬리를 흔든다면 주인의 분노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으르렁거린 보람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리에론 가문에게,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에게 강단 있게 나설 수 있는 자가 필요한 것이네. 내 대리로 나설 만큼 지위도 있어야하겠고. 뭐로 봐도 군터만한 적임자는 없어. 군터는 리에론의 가주가 아니라 성주나 총독 앞에서도 기죽지 않을 사내라네. 배짱이 필요한 이런 일을 맡기기에 그 이상 가는 적임자는 없어.”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복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 웃음이었다.

“혹여,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이 사령관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합니까?”

웃고 있던 막시밀리언의 입매가 씰룩였다.

“그럴 일은 없네. 그 자는 오만하지만, 그래도 셈을 할 줄 아는 자라네. 물론 다소 불쾌해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국 득실을 따지게 될 것이야.”

그리고 득실을 따지고 나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 세력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리에론 가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으니. 게다가 위글로우는 소도시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이권을 지닌 곳이었다. 드러난 금광만 해도 하나에,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숨겨진 금광이 더 있지 않은가. 막시밀리언은 그런 도시에 꽤나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령관이었다.

자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눅 들지도 않는다. 막시밀리언은 냉정하게 자신의 위치를 재단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던졌다. 그것이 그가 지금 이렇게 여유롭게 웃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

시일은 넉넉했다. 짧게 잡아도 열흘 정도 여유는 있었지만, 군터는 뭉그적거리는 대신 움직이기로 했다. 위글로우에서 살마드까지의 길이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까운 것도 아니니 가는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장한 병력이 움직이는데 건드릴 간 큰 놈들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전쟁이 멈춘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바크렌은 소란스러웠다.

“출발한다.”

군터는 수하 기병 이백을 이끌고 위글로우를 나섰다. 리에론 가문에 전달할 선물을 잔뜩 실은 수레 두 대와 수레를 관리하는 짐꾼과 기타 인원을 포함하면 이백 오십 여에 이르는 인원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덜 자란 꼬맹이의 생일을 위해 먼 길을 나섰다.

물론 그것은 명목상의 이유일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레에 가득 담긴 선물 중 생일을 맞은 꼬맹이에게 향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리에론 가의 장자를 위한 선물은 지금 군터의 허리춤에 있었다. 은여우의 가죽으로 감싼 보검 한 자루가 그것이었다. 꼬맹이를 위한 선물은 그게 전부이고, 수레에 담긴 것들은 파비우스 리에론을 위한 것이다.

‘유치한 짓이지.’

어린아이들이 하는 치기어린 짓과 별 다르지 않지만, 이런 방법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리에론 가문은 후계자의 생일 연회를 공개적으로 크게 주최하니 그 자리에 참석하는 얼굴들은 살마드 정계가 모두 알게 된다. 즉, 여러 세력들에게 있어 피아의 식별의 장이 된다는 뜻이다.

‘리에론이라.’

만약 막시밀리언이 직접 살마드로 가 연회에 참석했다면 훈훈한 분위기가 됐을 것이다. 작년에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나 오가다가 끝이 났겠지.

하지만 올해는 아니다.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가문에 변화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리에론 가문이 어찌 반응할까? 어쩌면 도전이나 항명이라고까지 여길 수 있는 일이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들이 기어이 받아들이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피곤한 자리가 되겠군.’

차라리 검 한 자루를 쥐어주고 칼춤을 추라면 추겠으나, 이런 종류의 일은 영 자신이 없다.

하지만 별 수 있겠는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예를 지키되, 필요 이상으로 굽힐 필요는 없네.’

군터는 위글로우를 떠나기 전, 막시밀리언이 따로 가진 자리에서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충성하지 않아. 그저 주고받을 따름이지. 그들이 나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면 나 역시 그들에게 보답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갈라설 뿐이야.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보지만.’

요는 당당하게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 없는 일을 맡게 되어서도 지금처럼 담담할 수 있었다.

“긴장 되느냐.”

하지만 그와는 달리, 할렌은 살마드에 가까워질수록 제법 긴장이 되는지 표정이 굳는 빈도가 늘어났다. 위글로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일이었다.

“음…조금은 그렇습니다. 리에론 가문이라면 어쨌거나 바크렌 최고의 명문 무가 아닙니까. 가주인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도 바크렌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고요.”

뭣 모르던 아쿼러즈 소년이었던 할렌도 이제는 어엿한 제국의 백인장이었다. 세상 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크렌 최고 권력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모양이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 그래봐야 무위장일 뿐이니.”

“…대장님처럼 대범할 수 있는 사람은 바크렌 전역을 뒤져도 몇 안 될 겁니다.”

“소심한 자에게는 평범한 자가 대범해 보일 수 있겠지.”

할렌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딱히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군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파비우스 리에론이든, 리에론 가문이든,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은 분명하지만…그렇다고 그 이름값에 특별히 감흥이 있지도 않았다. 이미 그는 그들보다 더 대단한 자를 대면한 적이 있었으니까.

‘아란딜 페레모어.’

제국의 황제가 직접 임명한 흑포장군. 말레이드 군을 이끌고 반군과의 전쟁을 총괄하다시피 한 그는 패전에 가까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전쟁 영웅이라 불릴 만했다. 스스로의 생을 불태워 수천 괴마병(怪魔兵)과 수만 야만족을 상대로 살마드를 지켜낸 그의 공은 아직까지도 떠돌이 음악가들의 노래로 칭송될 정도였다.

그에 반해 리에론 가문을 비롯해 소위 구 군부라 칭해지는 이들은 자리를 부지한 것이 용할 정도로 무능하고 한심한 작자들일 뿐이다. 적어도 군터는 그리 생각했다.

*

“살마드입니다!”

앞서 가던 정찰조가 목소리를 높이며 돌아왔다.

보름여에 걸친 무탈한 여정이었다. 무거운 짐들을 실은 수레가 있었고, 일찍 움직인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지라 조금은 느긋하게 일정을 잡았기에 출발한 날짜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도착이었다.

“와! 많이도 변했군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도시가 내려 보이는 고지에서 할렌이 감탄하며 말했다. 군터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렌의 말처럼 살마드는 그가 기억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성벽 밖으로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삼중 해자가 파져 있었고, 성벽 역시 이중으로 변해 있었다. 기존에 있던 성벽을 허물지는 않았을 테니 안쪽에다 새로운 성벽 하나를 더 높게 지은 것 같았다.

‘함락 직전까지 몰렸었다더니.’

이전의 화려하기만 했던 도시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북방의 적들을 향해 굳건하게 버티고 선 요새도시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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