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가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나비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비는 아이를 약을 올리듯 유유히 더 높이 날아올랐고, 몇 번을 허우적대던 아이는 곧 불퉁한 얼굴이 되어 뒤돌아 달려갔다.
아이가 달려간 곳. 그곳에는 요람에 누워있는 또 다른 아이. 아니, 아기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곤히 잠든 아기에게 다가간 아이는 발뒤꿈치를 들어 요람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고사리 같은 손을 슬그머니 들이밀어 손가락으로 아기의 토실토실한 볼을 꾹꾹 눌렀다.
“우으으…….”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던 아기는 아이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볼을 누르자 점차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결국.
“으아아앙!”
아기가 빽 울어버리니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하고 계속 손가락을 눌러대던 아이도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그러다 덩달아 울상을 짓더니만 부리나케 어느 곳으로 뛰어갔다.
“엄마! 엄마!”
키득거리는 벨리사에게 달려가던 아이, 보리스는 중간에 뒷덜미가 잡혀 허공에 붕 떠올랐다. 무뚝뚝한 군터의 얼굴 앞에 대롱대롱 매달린 보리스는 놀랐는지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실비를 괴롭히느냐.”
“우…그게 아니라…놀려고…….”
목소리가 급속도로 기어들어갔다. 시선도 아래로 떨어졌다. 군터는 소리 없이 피식 거리며 아들을 도로 땅에 내려놓았다.
“네가 실비와 놀고 싶어도, 실비가 싫어한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네에.”
자유를 되찾은 보리스가 허겁지겁 도망치듯 사라졌다. 시무룩해 보였던 모습은 연기였던 것처럼, 달려 나가는 도중에 녀석의 입가엔 다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걱정이군.”
“저 나이 때는 다 그렇대요.”
“활달한 건 좋아. 자꾸 실비를 괴롭히니까 그렇지. 또래 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그래요. 보리스에겐 친구가 필요해요.”
보리스도 어느덧 네 살이다. 신나게 뛰어 놀 나이인데,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었다. 위글로우에는 또래 아이만 해도 수십 수백이 있겠지만 천인장의 아들과 어울릴 만한 아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상류층 인사의 자식과 어울릴 수도 없다. 군터가 그들과 전혀 교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어려운 문제군.’
그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그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마음 편히 뛰어 논다? 그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일이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부족 사내들의 눈치를 보고, 아낙들의 눈치를 봤다. 그때 그의 친구는 초원의 바람뿐이었다.
“차라리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나을까.”
“그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요?”
“눈에 띄지 않게 호위를 붙이면…….”
“안 돼요.”
벨리사의 더 없이 단호한 반대에 군터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지간한 일에는 모두 남편의 뜻을 따르는 그녀가 유일하게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처럼 자식과 관련된 문제에서였다. 이때만큼은 군터도 그녀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두고 보도록 하지. 그래도 할렌 녀석 아들이 보리스와 한 살 차이니까. 데리고 와서 보리스와 놀게 하면 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군터는 요람으로 다가갔다. 실비는 이제 우는 것을 멈췄다. 대신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씩씩 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즐거운 얼굴은 아닌데,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는 까닭은 뭘까. 군터는 그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슬쩍 검지를 뻗어 실비아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헌데 볼을 찌르지 않아서인지, 실비아는 씩씩거리는 것을 멈추고 앙증맞은 두 팔을 뻗었다. 마치 그의 손가락을 끌어안으려는 것처럼.
군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위글로우에는 여러 연병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군터 천인대가 사용하고 있는 연병장이었다. 때때로 군진이나 대규모 모의 전투 훈련 때 이용되곤 하는 연병장 주변을 지금 수백의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수백 쌍의 시선은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 한가운데, 맨몸으로 격돌하고 있는 사내들에 향해 있었다.
“마음만 앞섰군! 하체가 빈다!”
기세 좋게 내지른 주먹을 손날로 흘려내고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걷어찼다. 걷어차인 병사의 몸이 붕 떠서 땅에 떨어졌다. 허벅지를 부여잡은 병사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 채 바닥을 굴렀다.
“하품이 나오는구나! 이 따위 공격에 누가 당해줄 거라 생각하지!”
위축되어 내지른 발차기는 단단한 손아귀에 틀어 잡혔다. 억센 힘에 뿌리 뽑히듯 끌려간 병사는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가 긴 호를 그리며 땅에 처박혔다.
“좋다!”
이번에는 좌우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것 없이 방위를 점하며 절묘하게 들어오니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군터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우측으로 아예 몸을 돌려 맞받아치고 나갔다. 번개처럼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고 즉시 고개를 틀었다. 주먹이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쭉 펴진 팔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우악스럽게 휘둘렀다.
“커헉!”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병사 위에 동료의 몸뚱이가 틀어박혔다. 서로 뒤엉켜 엉망으로 쓰러진 둘에게 군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위험할 뻔했군. 아주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당황하여 움직임이 느려지더군. 설마하니 상대가 가만히 앉아 당해줄 거라 기대했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지 마라!”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들어와 쓰러진 병사들을 부축해 나갔다.
“다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다음 조가 들어섰다. 그들은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이전의 조가 그랬던 것처럼 원진을 짜 군터를 포위했다.
“다음!”
열 명이 쓰러지고, 또 열 명이 쓰러졌다. 열 개 하고도 네 개의 십인대가 더 무너지고 나서야 군터는 훈련 종료를 알렸다.
“후우…….”
땀으로 목욕을 한 채 숨을 가다듬고 있는 그에게 살라스가 다가왔다.
“무리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 있는 것도 훈련 때뿐이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한계를 경험해볼 수 있겠느냐.”
병력의 질을 결정짓는 데 있어 훈련의 정도나 무장의 상태도 물론 중요한 기준이겠지만,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 보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한계를 넘어, 정말 몸과 정신이 극한까지 치닫는 경험을 해본 자는 그렇지 못한 자와 엄청난 차이를 갖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훈련을 통해, 부족하게나마 병사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대장님께서 몸이 근질거리셔서는 아닙니까?”
“그런 것도 있지.”
혼자 하는 수련도 괜찮지만 역시 부족함이 있다. 상상 속에 그리는 적보다는 눈에 보이는 적이 나은 법이니, 부하 병사들의 상대도 해주면서 개인 훈련도 겸하고 있었다.
“다들 하루는 꼬박 앓아누워야 합니다.”
“기피하는 녀석은 없지 않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군터 천인대는 모두 실전을 겪은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좀 세게 얻어맞았다고 해서 기가 꺾이는 놈들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독기를 품었으면 품었지.
“그래서, 투덜대는 게 용건이냐?”
“아닙니다. 오후에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사령관님의 명이십니다.”
“회의를 또? 무슨 일이라더냐?”
“듣기로는 살마드에서 사람이 왔다더군요.”
“살마드에서?”
“리에론의 장자가 곧 생일이지 않습니까. 아마 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날 듯도 했다. 분명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파비우스 리에론의 장자가 태어난 날이 요맘때쯤이었다. 하여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막시밀리언이 직접 살마드에 축하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찾아갔었지.
“작년처럼 하면 될 것을 무슨 회의 소집인지 모르겠군.”
“작년과 다르다면, 이번에는 작년 같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사령관님의 심기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지.”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 살라스 본인도 그저 느낌을 말할 뿐, 구체적인 추측은 없어 보였다.
‘가보면 알겠지.’
곧 알게 될 일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터.
군터는 생각 대신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머리 위로 쏟았다. 달아올랐던 몸이 점점 시원하게 식어갔다.
*
“이번 로메니 리에론의 생일자리…….”
‘아아. 그래. 그런 이름 이었지.’
군터는 평시처럼 담담히 자리한 채 막시밀리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상석의 막시밀리언을 포함해 이 자리에 참석한 이는 그를 포함해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위글로우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이들로, 이들이야말로 막시밀리언의 당여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나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리에론 가문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령관께서 가주도 아니고, 가주의 자식 생일자리에 원행을 떠나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소. 저는 올바른 결정이시라 생각합니다.”
막시밀리언이 말을 마치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가야 한다와, 갈 필요 없다. 혹은 걱정스럽다와 속이 시원하다.
유이(唯二)하게 아무런 말없이 있는 이는 막시밀리언을 제외하면 가장 상석에 앉은 군터와, 끄트머리 말석에 앉은 미겔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열 명이 넘어가는 인원이라, 그들이 제각각 소리를 내니 장내는 곧 소란스러워졌다.
막시밀리언이 소란을 정리하려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진정됐다.
“나는 리에론 가문에게도,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에게도 밉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네. 난 그저 내 입지를 보다 높게 세우고 싶을 뿐이야.”
그는 싱긋 웃었다. 그는 이번 일로 따라올 수 있는 리에론 가문의 눈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 여유로워보였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리에론 가문의 막하에는 무수한 인사들이 있네. 내 비록 한 도시의 사령관이라 하나, 그래봐야 그 무수한 인사 중 하나에 불과하지. 그간에는 어쩔 수 없다 여겨 그런 대우를 용인해왔으나, 이제는 아니라고 여겨 내 목소리를 한 번 내볼 참이라네.”
3년 여 전. 트라벤 가문을 무너뜨리고 여명 교단의 주교를 초청하여 세례식을 치른 이후, 지금까지 막시밀리언은 위글로우에서의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왔다. 이제는 옛 3대 가문, 현재도 2대 가문으로 불리는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조차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일이 드물 정도였다.
이전의 그가 그저 위글로우의 사령관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글로우의 주인이었다. 단 한 단어가 다를 뿐이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
“난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에게 내게 합당한 대우를 주장할 것이야.”
후계자의 생일이라고 하나 직접 얼굴을 비치는 대신 사람을 보내 성의를 표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리에론 가문에서도 마음을 써 살필 만큼 힘이 있는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제 막시밀리언은 자신에게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리에론 가문에게 간접적으로 요청하려 하는 것이다.
“군터. 살마드에 가본 지 오래 된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나?”
“몇 년 되었지요.”
“사람을 보낸다 해도 급이 떨어지는 자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네가 내 대리로 한 번 갔다 오게. 파비우스 리에론 장군을 만나고, 그에게 내 뜻을 전하게.”
“그리 하겠습니다.”
군터는 처음 자리에 앉을 때와 똑같이 담담히 답했다.
========== 작품 후기 ==========
예약을 했는데 안 올라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