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늦은 밤. 살라스는 군터의 저택을 찾았다.
위글로우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훌륭한 저택을 앞에 두고, 살라스는 차분히 마음을 비웠다. 그리고 저택의 호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지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늦은 시각이나 그의 상관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상관은 지금쯤 연무장에서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이냐?”
한창 굵은 땀방울을 비 오듯 흘리던 군터는 돌아서서 살라스를 맞았다. 땅과 수평으로 내뻗은 칸젤을 내리지도 않은 채였다.
그는 무슨 일이, 그것도 가볍지 않은 일이 터졌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살라스가 사전에 기별도 없이 이렇게 찾아올 리 없다.
“…….”
담담하던 군터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연무장 바깥에 멈춰 선 살라스가 대뜸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음에 분명했다.
군터는 칸젤을 내렸다. 몸도 돌렸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살라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죄를 청합니다.”
“다시 묻겠다. 무슨 일이냐.”
두 번째 물음에 살라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분하려고 노력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떨림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라스는 자세히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미겔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한 명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사람을 붙인 것. 그 일이 틀어져 수하들이 사로잡힌 것. 마지막으로 조금 전 홀로 나가 미겔과 일을 마무리 지은 것까지.
“대장님의 명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른 저의 어리석음 때문에 대장님께 피해 갈 일을 만들었습니다.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말을 마친 살라스는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목에 칼이 떨어져도 그대로 목을 내놓을 기세였다.
“…하아.”
군터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도 생긴 것이지만, 그럴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던 살라스가 이런 사고를 쳤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실망스러웠고, 화도 났다.
“대체 왜 그런 거냐.”
“…그 도적놈이 참기 힘들 정도로 거슬렸습니다.”
살라스가 어렵사리 낸 그 한 마디로 의문이 풀렸다.
‘그래. 그랬지.’
잊고 있었지만, 살라스는 도적놈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과거가 있었다. 그 이후로 도적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것이 살라스였는데, 그 부분을 간과했었다.
“그래서, 그놈이 이번 일은 그냥 묻자 했다고?”
“예. 말은 그리 했습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놈의 말을 믿어도 되겠더냐?”
“…모르겠습니다.”
사실 도적놈의 말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놈의 목을 날린 것도 아니고, 뒤를 밟다가 걸렸을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해 막시밀리언에게 문책을 당한다 해도 큰 벌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실망스런 눈총이야 받겠다마는.
“그래. 알겠다. 물러가 쉬어라.”
살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찌하여…벌을 내려주지 않으십니까.”
“사람이라면 한두 번 정도 실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일은 용서하마.”
“한두 번의 실수가 당연한 것처럼, 잘못에 대한 벌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저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실 수도 있습니다. 저를 벌하지 않으시면…….”
“그놈이 조용히 묻자 했는데도 넌 곧장 내게 찾아와 모든 일을 고했지.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면 숨고 도망가려 하기 마련인데, 넌 그러지 않았다. 내게 와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죄를 청했어. 그 태도에 나는 상을 주고 싶다. 하지만 네 말처럼 네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 상은 네 과로 덮겠다.”
“…….”
“물러가라.”
몸을 돌리며 단호히 다시 명하니 살라스가 일어나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다시 홀로 남은 연무장 위에서 군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일방적으로 불쾌한 상황에서 덮자?’
보통 사람이었다면 화를 내는 게 정상이다. 막시밀리언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하든 어쩌든 말이다.
헌데 녀석은 도리어 자기가 먼저 나서서 덮자고 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고, 손익 계산이 빠르다는 뜻이다.
‘장사치 같은 놈이군.’
만약 놈이 막시밀리언에게 달려가 이번 일에 대해 고하고, 막시밀리언이 문책을 했다 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적놈을 더 안 좋은 눈으로 보게 되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쥐새끼 같은 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땀이 다 식었군.’
그래도 아직 몸이 다 식지는 않았으니, 그는 곧 다시 격렬히 연무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
미겔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막시밀리언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를 통해 군터는 자신과 척을 지고픈 마음이 없다는 미겔의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여 군터는 미겔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껐다. 본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굳이 먼저 건드릴 필요는 없다.
‘한 걸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방법일지도.’
군터는 태도를 분명히 하기로 했다.
막시밀리언의 일은 막시밀리언의 일이다. 그를 위해 일한다고 해서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자신은 자신이고, 막시밀리언은 막시밀리언이니까.
그렇게 마음먹으니 이전에는 마음에 걸렸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한 다리 건너 불구경을 하는 느낌이랄까.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별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군터는 자신의 일에 보다 몰두할 수 있었다.
천인장의 업무를 처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하며, 본신의 수련에 매진했다.
여러 것들에 영향 받으며 한없이 늘어졌던 하루는 이제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날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간간이 까먹을 정도로.
*
사령술의 수련은 여전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음?’
무언가을 느낀 것은 어김없이 두툼한 벽에 끝없이 머리를 박던 와중이었다. 술력을 밖으로, 더 멀리 뻗어내려 안간힘을 쓰다가 문득 몸의 이상을 느꼈다.
‘착각인가?’
한 번뿐이었고,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라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때문에 착각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며칠 뒤에 또 다시 그런 느낌이 들고, 또 다시 며칠 뒤에 같은 느낌이 반복되니 의심은 점점 깊어졌다. 그게 하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뭐라도 해보려 아등바등 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뭐라도 변화를 주고, 돌파구를 찾고 싶어 별 짓을 다하던 중에 단 한 번 칸젤을 침실에 두고 홀로 지하실에 앉아 수련했다.
‘음?’
도저히 뚫을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벽이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안간힘을 써서 술력을 밀어붙이니 벽에 균열이 가고 작게나마 벽 너머로 기운을 뻗칠 수 있었다. 잔념을 망령화 시키는 데는 끝내 실패했지만, 그래도 군터는 희열을 느꼈다. 반쯤 체념해 있던 모페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 때문이지?”
그간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이라 생각했으나, 다음날에 도로 벽에 막히고서야 그게 아님을 알았다.
“무언가 요인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전날에 비해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뿐이었으니까. 바로 전날에는 침실에 두었던 칸젤을 수련하는 자리 옆에 세워두었다는 것. 전날에 비해 달라진 것은 바로 그 하나뿐이었다.
“이 녀석이…문제였던 건가.”
군터의 목소리는 허탈함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 동안 그리 노력을 해도 안 됐던 이유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애병 때문이었다니.
“그런 것 같군요. 여태 단 한 번도 이상한 점은 전혀 느끼지도 못했습니다만…….”
칸젤이 사령술의 수련을 방해한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확실해졌다. 칸젤을 멀찍이 떨어뜨려놓을수록 몸 밖으로 술력을 발출하는 것이 수월해졌다.
“사령술 뿐만이 아니라, 기운이 몸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막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방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보신(保身)의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보신?”
“여러 실험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대장님의 창은 단지 술력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본래 몸 안에 머물러야 할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음이니, 이는 몸을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지요.”
“술법을 쓰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요. 체력이 빠져 몸이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로운 일입니까, 해로운 일입니까?”
“이로울 건 무엇이고 해로울 건 또 뭔가.”
“바로 그렇습니다. 대장님의 창은 복잡한 구분 없이 그저 물을 담아둔 잔처럼 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작용을 하는 기저에는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즉 보신을 위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간단하군. 칸젤을 되도록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사령술을 연습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러면 되겠지요. 헌데…….”
“뭐가 또 있나?”
“그렇게 열심히 익힌다한들, 대장님께서 술법을 실전에서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지?”“대장님께서는 무인이시지 않습니까. 무인이 싸움터로 나가며 병기를 떼어놓는 법은 없지요.”
“아…….”
그제야 군터는 모페이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칸젤은 단순히 손때가 많이 묻은 애병이 아니었다.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고, 손에 쥐고 있으면 평시보다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느낌뿐이 아닌 실질적인 힘이다. 지금에 와서 칸젤은 그에게 있어 쿠센 이상 가는 전력의 큰 일부였다. 그런데 실전에 나서며 칸젤을 떼어놓고 나간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칸젤을 들고 나간다면 기껏 술법을 배운다 해도 쓸 수가 없으니, 말짱 무소용이 아닌가.
“난처하군. 어찌 해야 하는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원인은 알아냈으니 전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습니다.”
그 뒤로 모페이브는 열성적으로 관찰에 임했다. 그는 때때로 소스라치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칸젤에 손을 대기도 했으며, 수련에 임하는 군터를 가까이서 매의 눈을 하고 지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군터에게 수련을 할 때의 느낌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처음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군터가 여러 차례에 걸친 경험으로 확신한 몸의 이상에 대해 들려주자 어느 정도 수확이 생겼다.
“몸의 이상이라시면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뭐랄까…조금 더 편해지는 느낌? 나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군.”
“편해지는 느낌이라…….”
모페이브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모페이브는 한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대장님의 창은 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뭐라?”
군터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만큼 모페이브가 한 말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아니. 정정하지요. 술법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장님께서 끌어올리신 술력으로 무언가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대장님의 육신에 영향을 끼치는 것일 겁니다. 아마도 긍정적인 효과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내가 비록 술법에 대해 아는 바가 적지만, 그런 내 귀에도 그 말은 상당히 헛소리처럼 들리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도 아직까지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그나마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 이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확인에 들어가지요.”
“확인?”
“지금까지도 열심히 하신 것을 압니다만, 지금부터는 그보다 더 나아가셔야 합니다. 탈진하실 때까지, 그야말로 한계까지 하셔야 합니다. 매일 두 번 하시는 무술 수련도, 술법 수련도 말입니다.”
이어지는 모페이브의 말은 듣기에 꽤나 곤혹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군군신신부부자자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굉장히 이상적인 말이지만, 그대로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힘든 일이고, 소설에서도 힘든 일입니다. 아마 소설이라는 것이 장르 불문하고 일정, 혹은 상당부분을 현실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