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60화 (160/1,064)

<-- 2부 -->

세례식이 있은 후에도 주교 에르몬드는 위글로우에서 닷새를 더 머물렀다. 막시밀리언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닷새 동안 막시밀리언이 개인적으로 주최한 연회에 모습을 비추었다. 위글로우의 관료들과 유지들이 대거 참석한 자리에서 막시밀리언과 친근한 분위기를 보이니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막시밀리언은 공을 들인 것 이상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사령관에 대한 주변의 불신과 경직된 시선이 트라벤 가문의 철저한 몰락과 여명 교단의 주교를 통한 세례식을 통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이제 위글로우에서 그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거나 감히 넘보려 하는 자는 없었다. 3대 가문. 이제는 2대 가문이 된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조차 자중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막시밀리언의 입가에서는 매일매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웃음꽃이 피었다. 미트라스를 비롯하여 군부의 인사들 중에는 술이 들어갈 때마다 영민한 사령관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 뜨거운 분위기에서 할 발 벗어나 있는 이는 오직 군터 뿐이었다. 군터는 참여해야 하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으나 대부분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딱히 그를 이상하다 보는 이는 없었다. 그는 본래 과묵한 자였고, 먼저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여 모든 이들이 군터에 대해서는 그저 평소와 같다고만 여겼다. 무표정한 얼굴에 가린 그의 불편한 속내를 짐작하는 이는 그를 따르는 수하들 중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

인생이라는 것이 당장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다 하더니만, 정말로 그러했다. 미겔은 요 사이 가파른 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정말 모른다니까. 인생이라는 건.’

시작은 별 것 아니었다. 위글로우에 진출해 보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어떻게 운이 닿아 트라벤 가문에까지 거래를 트게 됐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은 좋았다. 트라벤 가의 가주 하이글렉은 욕심은 많아도 신용은 있는 자였고, 물건을 주는 만큼 대가는 확실히 챙겨줬으니까. 그와의 거래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탐욕은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기는 했지만 그에게 키시아를 건넸던 것은 실수였다. 지나간 일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그래도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하이글렉과 트라벤 가문이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거래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음…아마도 그랬겠지?’

그러나 혹시 모르는 일이다. 하이글렉의 탐욕은 그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으니. 별 다른 구실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무리를 날름 삼키려 들었을지도.

‘잘 됐지. 죽기 싫어서 한 선택이었지만,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단 말이야.’

자신이 한 선택이지만 참 대견스러운 결단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도적놈 주제에 도시의 사령관을 만나러, 그것도 야밤에 담을 넘다니. 곧바로 목이 잘려나가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미친 척하고 움직여 만난 사령관은 그에게 있어 더 없는 귀인이었다. 그는 칼날 끝에 간당간당하게 걸려 있던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나아가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나지는 못할지언정 목 날아갈까 걱정 하는 일 없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며칠 전에는 그의 자잘한 고민을 해결해주고 막대한 상급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만 놓고 보면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었다.

“두목.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좋은 일? 물론 있지. 요즘에는 그냥 숨 쉬고 사는 하루하루가 전부 좋고 즐겁다. 넌 안 그러냐?”

“아. 그야 그렇죠.”

뒤를 졸졸 따라오던 부하 녀석이 실실 웃으며 답했다. 배신 때리고 목이 날아간 녀석을 대신해 새로이 곁에 두고 부리는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그 두목이라는 호칭 좀 떼라고 몇 번 말하냐. 이제는 두목이 아니라 대장. 자식아. 대장이라고 부르라고.”

“아차. 입에 붙어서. 죄송합니다. 대장.”

미겔이 쯔쯔 혀를 찼다.

부하 녀석을 탓할 일이 아니다. 당장 그조차도 대장이라고 불리면 귀에 익지도 않고 몸도 살살 가려운 것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하지만 그래도 익숙해져야 한다. 이제는 엄연히 도적질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가. 관적에 이름이 오르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사령관을 위해 일하는 준 관리인 셈인데 언제까지 두목 소리를 듣고 살아야겠는가.

‘반 년 전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 말했다면…미친놈이라 했을 텐데 말이야.’

술이 꽤나 들어가서 그런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면 밤공기가 간만에 기분 좋게 선선하여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미겔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잠 든 도시의 공기를 만끽했다.

“…….”

완만하게 휘어진 채 반쯤 감겨 있던 미겔의 눈이 슬쩍 게슴츠레해졌다. 동시에 뒷짐 지고 있던 두 손이 미세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뒤쪽의 부하는 아직도 눈치 없게 앞만 보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굉장히 은밀한데. 어떤 놈들이지?’

기분 좋게 몸을 늘어뜨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한껏 이완된 몸에 정신이 평온해지니 주변의 정령들이 그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를 더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만약 정신이 말똥말똥했었더라면 듣지 못했을 소리고, 그러면 따라붙는 이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몇 명이냐.’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셋인데, 하나 둘 쯤 더 있을지도 모른다. 기척을 숨기는 솜씨를 보면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렇겠지.

‘왜 진즉에 덮치지 않았지?’

어쩌면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좁은 길목에 들어설 때나, 혹은 또 다른 동료들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에 닿을 때를.

‘선수를 치는 게 최선인가.’

미겔은 슬쩍 손을 움직여 자그맣게 수신호를 보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던 부하도 곧 그것을 보고는 낯빛을 굳혔다. 다행히 어둠이 드리워 표정 변화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

자그마한 다리를 지날 무렵. 미겔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리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뒤를 부하가 바짝 따랐다.

“들켰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리는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미겔을 보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암살자가 아닌가?’

암살자라면 한 번쯤은 맞서 싸울 생각을 할 법도 한데, 저들은 발각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려 했다. 물론 단지 그 일면만을 보고 암살자가 아니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놓칠 수 없지!’

당장 저들 서넛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뒤를 밟게 한 뒷배가 문제였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고서는 편히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미겔은 이를 악 물고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빌어먹을! 빨라!”

“쳇! 도망치긴 글렀다! 맞서 싸워!”

미겔이 거의 달리는 말에 준하는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자 그들도 달아나기를 포기하고 검을 빼들었다.

‘암살자가 아니군. 이놈들…군졸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투기는 날카로웠지만 정직했다. 전직 도적두목으로서 암살자들과도 몇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던 미겔은 암살자 특유의 음습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정체를 군부의 병사들이라 단정 지었다.

‘아니. 군부의 병사들이 대체 왜?’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미겔은 그 생각을 지워내고 눈 앞의 적들에 집중했다. 지금은 그럴 때였다.

*

“…….”

살라스는 부하의 보고를 듣고 말없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었고, 다문 입을 뚫고 튀어나가려는 고성을 억제하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뜨끈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쨌든 다들 무사하다 이건가.”

“…예. 그렇습니다. 자잘하게 부상을 입긴 했지만 죽은 녀석은 없고, 크게 다친 녀석도 없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굴욕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완벽하게 제압당했다는 것이니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어지는 내용 때문에 더더욱.

“어디라고?”

“남문 옆, 빈민가의 창고에서 기다리겠다고…….”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아니면 무슨 함정이라도 파 둔 건가.”

“그,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무심코 생각을 내던 병사는 내리꽂힌 서늘한 시선에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고문도 없고, 심문도 없이 그저 윗선에게 전하라 했다고.”

답을 하려던 병사는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곤 입뿐 아니라 눈까지 질끈 감았다.

옳은 선택이었다. 살라스는 답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도적놈의 두둑한 배짱에 우스웠을 따름이다.

저쪽이 배짱을 부리는데, 이쪽이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살라스는 처분만 기다리는 부하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안내해라.”

*

버려진 창고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미겔은 창고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이거 놀랍구만. 혼자 오실 줄이야.”

“도적놈도 아니고, 혼자 길을 못 나설 이유가 있나.”

미겔은 놀랐다. 하나는 혼자 나선 상대의 배짱. 또 하나는 그가 기다리던 윗선으로 추측되는 상대가 자신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젊은 사내라는 사실.

그에 비해 상대가 살라스라는 이름의, 예상했던 대로 천인장 군터의 심복이라는 점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술했듯 이미 예상했던 바이기 때문에.

“뭐 어쨌든 놀랍군. 놀라워.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글프구만.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군터 나리께서 이 몸을 이리 미워하시는지 모르겠어.”

“내 독단이다. 그분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소? 그거 참 다행이군. 안타깝게도 별로 믿음은 가지 않지만.”

“말장난이나 하려고 불렀나?”

“에헤이. 말은 바로 합시다. 내가 불렀나? 그 쪽이 먼저 내 뒤를 팠지 않소? 그러니까, 당신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말이지.”

“도적놈이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도시를 활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내가 사령관의 명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서도?”

“…….”

상대의 침묵을 통해 미겔은 한 가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뒤를 밟은 것이 눈앞의 젊은 백인장의 뜻이든, 아니면 천인장의 뜻이든 사령관과는 관계없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그는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어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군. 내가 비록 사령관께 그리 중요한 수하는 아닐지라도, 사령관의 허락도 없이 그분의 수하를 캐는 것이 온당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쪽도 모시는 분께 피해를 끼치긴 싫을 거 아뇨?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도 그분과 척 지기는 싫소. 무섭거든.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합시다.”

시종일관 굳어 있던 살라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얼굴에 짙은 의구심이 떠올랐다.

“없던 일로 하자?”

“그 쪽 말대로 내가 도적놈이었던 건 사실이오. 그 때문에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뭐, 딱히 할 말은 없지만…어쨌거나 같은 분을 모시고 있는 입장 아닌가. 나도 사령관을 모시는 입장으로 욕먹을 짓은 안 하도록 노력할 테니, 그 쪽에서도 잘 좀 봐달라는 거지.”

“…….”

“군터님과 척을 지고 싶지 않다는 건 내 진심이야. 정말로 그쪽 독단이라면 필요 없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 말을 그분께 전해주쇼.”

“…….”

“그쪽 부하들은 데려가시고. 나름 다치지 않게 노력은 했는데, 원체 실력들이 좋아서 생채기 몇 개는 어쩔 수 없었소. 그 정도는 좀 양해 부탁드리고.”

미겔이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서 있던 그의 부하도 자세를 바로 했다.

“먼저 갑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뭐 그럴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한데, 기왕이면 서로 좋은 얼굴로 봅시다.”

미겔은 태연히 등을 돌리고 창고를 나섰다. 등에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칼이 함께 꽂히는 일은 없었다.

창고를 나서고 한동안 걸은 뒤, 그는 억눌렀던 긴장을 긴 한숨과 함께 토해냈다.

“이런 지미. 술 다 깼다.”

“돌아가서 한 잔 더 하시죠.”

“그래. 그래야겠다. 간만에 떡도 좀 치자.”

사흘 전에도 양 팔에 계집을 두 명씩 끼고 신나게 뒹굴었다는 점은 중요치 않았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것이니.

‘그나마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젊은 백인장은 젊어서 그런가 말이 좀 통하는 듯했다. 미겔은 차라리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번 일이 그의 독단이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젠장. 그 괴물 같은 놈은 역시 무섭단 말이지.’

조금 전 창고에서 했던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천인장과 척을 지고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생각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전편의 QnA입니다.

슈퍼테크닉님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만쉴래님 친해졌다고 하기는 뭐합니다. 모페이브는 목숨이 아깝고 달리 갈 곳이 없어서, 군터는 쓸 만해서. 서로의 목적(?)이 부합되어 함께 하고 있다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으악으아악님 남 부럽지 않습니다 ^^;;

皇龍柔潔天劍結님 최소 2명(보리스 포함) 입니다.

내가길을안다님 아무래도 서양 배경 판타지를 쓰려고 하다 보니 주인공의 캐릭터성과 유사한 이미지의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몇몇 후보군이 있었는데, 군터라는 이름이 딱딱하고 무거우면서도 간결한 느낌이라 택했습니다.

QnA끝.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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