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군터는 할렌을 비롯해 수하 기병 이백 기를 이끌고 위글로우의 접경지역까지 나왔다. 곧 당도할 사제단을 맞기 위함이었다.
사전에 전령을 통해 정했던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니 할 거라곤 떠다니는 구름을 구경하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다.
“주교면 어느 정도나 높은 겁니까?”
기름천으로 검을 닦던 할렌이 문득 궁금해졌다는 듯 군터에게 물었다.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군터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답했다.
“글쎄. 일단 사령관님과 비슷한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제국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다. 허나 가장 우러러 섬기는 것은 원신(根源)이라 불리는 존재로, 제국에서는 원신을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으로 여겼다. 세상의 창조자이며 모든 신들의 아버지인 원신과 그 자식인 지신(枝神)들이 거하는 만신전(萬神殿)이 바로 제국의 종교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제국에는 신을 섬기는 교단이 여럿 있었다. 흔히 원신을 섬기는 여명 교단과 8대 지신이라 불리는 지신들을 섬기는 여덟 개 교단이 가장 대중적이며 힘이 있었는데, 특히 여명 교단의 경우는 교단에 속한 모든 사제들이 제국 전역에서 준 귀족 대우를 받을 만큼 권세가 드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명 교단의 교조(敎祖)가 바로 제국의 황제였다. 제국의 황제는 원신의 제사장을 자처하며 매년 성일(聖日)마다 성대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 제국의 절대자인 황제가 교조로 있는 교단인 만큼 그 세가 어마어마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군터는 여명 교단의 직위체계가 어찌 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주교라는 위치가 결코 낮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황제부터가 성직자임을 자처하는 이상, 제국은 관과 종교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단의 성직자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대로만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 정도입니까?”
할렌은 정말 깜짝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군터는 슬쩍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천인장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종교인들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할렌의 무지를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제국민 대다수가 성직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생각할 뿐, 그들이 가진 힘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뭐랄까, 흑막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직자들은 고관들보다도 더 무서운 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주교라는 분이 까탈스럽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도 그러길 바란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우선 괜히 책잡힐 일 없게끔 해라.”
“예.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할렌도 이제는 제법 애송이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백인장다운 모습을 보였다. 물론 급한 성질머리는 여전했지만 어쨌거나 부하들에 대한 통제력은 상당했다. 그것이 비록 일신의 무력에 기댄 것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군터가 보기에 할렌은 제법 쓸 만한 장교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부관 겸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아직 어리기는 하나, 자잘한 일들에 대해 믿고 맡길 정도는 된다.
‘어쨌든, 저 녀석 말대로 까탈스럽지 않은 작자였으면 좋겠군.’
여러모로 귀찮고 우려스러운 임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책무였기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 군터는 다음날 정오 무렵에 사제단이 당도할 때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
“워, 워.”
선두에서 말을 몰던 자가 언덕 위 군터와 병사들을 발견하고는 말을 세우고 목청을 높였다.
“위글로우의 군사요?!”
“그렇소!”
그들은 먼저 서로의 깃발을 확인하고, 사람을 보내 소속확인을 했다. 바로 전날까지 전령을 통해 서신까지 주고받았기에 다소 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전쟁 이후 바크렌의 치안이 아직까지 혼란스러웠기에 필수적인 절차였다. 더군다나 지금 사제단에는 귀인이 계시지 않던가.
꼼꼼한 절차를 모두 마친 후, 군터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사제단에게 다가갔다.
‘많기도 하군.’
사제단은 백 명을 훌쩍 넘는 규모였다. 거의 군터가 이끌고 온 병사들의 수와 비슷했다. 구성을 보면 은은한 연갈색 법복을 입은 사제들의 수는 열 명이 조금 넘어 보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을 호위하는 여명 교단의 병사들로 보였다. 교단의 병사들이라고는 하나 무장 정도나 절도 있는 모습들은 군부의 정예병 못지않았다.
“주교님은 마차 안에 계시오. 곧 나오실 테니 기다리시길.”
처음 선두에서 말을 몰던 사내였다. 병사들과는 전혀 다른, 전신을 다 덮는 판금 갑옷을 걸친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군터는 그에게서 극도로 절제된 기세를 읽을 수 있었다. 가벼운 호승심이 일 정도로 날카롭게 갈린 기세였다.
“그럽시다.”
군터와 사내의 시선은 사제단 무리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차에 고정 되었다.
여섯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는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별다른 화려한 장식 같은 것은 없었음에도 차체에 쓰인 목재의 때깔에서부터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끼익-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린 사제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사내가 내렸다. 얼굴만 봐서는 갓 중년이 된 것 같았으나,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노인의 그것과 같은 완연한 백발이었다.
군터는 그를 보자마자 군례를 취했다.
“위글로우의 천인장. 군터입니다. 사령관이신 막시밀리언님의 명을 받아 모시러 왔습니다.”
“허어. 이 보잘것없는 몸을 위해 이리 멀리까지 나와 주다니. 고마운 일이군.”
군터는 주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꽤나 기괴한 자라는 생각을 했다. 굉장히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많이 잡아봐야 40대 정도 되었을 것 같은 주교의 목소리가 70대 늙은이의 그것처럼 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도, 말투도, 모두 나이 지긋이 먹은 노인의 것과 다르지 않은데 오직 얼굴을 포함한 외관만이 젊었다. 그 극심한 부조화는 굉장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군터는 자칫 얼굴이 굳어질 뻔했던 것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원행에 노고가 크셨을 줄로 압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다행스럽게도 주교는 우려했던 것처럼 까탈스러운 자는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위글로우까지 가는 길에 일절 간섭하거나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위글로우까지 가는 동안 거의 마차 안에 들어가 있었으며, 멈춰서 쉴 때나 간간이 어린 사제들과 함께 야영지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그는 군터와 병사들에게는 더 없이 편한 호송 대상이었다.
무탈하게 흘러간 나흘 뒤. 그들은 위글로우에 도착했다. 미리 전령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던 막시밀리언이 성대한 인파를 뒤에 두고 위글로우의 성문 앞에서 환히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
주교가, 그것도 여명 교단의 주교가 도시에 왕림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위글로우 같은 별 볼 일 없는 도시는 더욱 그랬다. 하다못해 귀족도 없는 도시에 여명 교단의 주교라니. 때 아닌 축제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막시밀리언은 축제를 열었다. 그의 사비와, 기념할 만한 그의 세례식을 위해 위글로우의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부담했다.
그렇게 열린 성대한 축제는 무려 엿새 동안이나 이어질 계획이었다. 사전에 이와 같은 정보를 접했던 상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사판을 벌렸고, 그러지 못한 상인들은 울상을 지으며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사전에 준비를 마친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부담했던 유지들이거나, 그와 관련된 이들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온 도시가 떠들썩해진 와중에, 군터는 그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그는 막시밀리언으로부터 이틀의 휴가를 받아 집에 틀어박혀 가족들과 함께 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그는 팔을 베고 누워 있는 벨리사와 함께 천장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된 화제는 여명 교단의 주교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래. 정말 이상했어. 분명 얼굴만 봐서는 많이 쳐봐야 40대인데, 그 외에는 전부 70대 노인 같았거든. 눈처럼 하얀 머리칼이나 수염은 제쳐둬도 말이야.”
“희한하네요. 신께서 축복이라도 내려주셨나?”
“글쎄. 축복이라.”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신께서는 어찌하여 몸의 털은 그대로 흰색으로 두셨을까. 만신의 아버지께서는 흰색을 좋아하시나?
사실 신에 대해 재단하거나 추측하는 것도 불경이라면 불경이나, 군터는 그런 개념도 없이 순수한 의구심을 품었다. 벽지의 무지렁이 아쿼러즈에 불과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애초에 신에 대해 그리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당장 그와 하나가 되다시피 한 창검에도 신의 일부가 묻어있지 않던가. 물론 그 신은 이제 더 이상 신이라 불릴 수도 없는, 제국에서는 사신이라고까지 부르는 존재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린 사제들을 데리고 다니더군. 마차에 같이 타는 것은 물론이고, 어딜 갈 때도 항상 데리고 다니더라고.”
“어린 사제요? 얼마나 되어 보였는데요?”
“글쎄. 많아봐야 열 살이나 조금 넘어 보이던데.”
“남자였어요?”
“모르겠어. 성별 구별이 갈 정도로 나이가 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다 예쁘장했거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실은 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은 탓이 컸다. 게다가 군터는 첫날 이후에는 주교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주교와 그의 마차에 대한 경호는 여명 교단의 병사들이 했고,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선두에서 길을 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주칠 일이 없고, 관심도 없는데 마차 안에서 나오는 일도 드문 어린 사제들이 사내인지 계집인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주저 말고 해. 우리밖에 없는데.”
잠깐 주저하던 벨리사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입을 떼었다.
“그…어린 애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혹시 그 주교…님도 그런 취향인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완벽한 불경이고 신성모독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없는 자리에서는 누구라도 욕할 수 있다. 물론 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그러지 못하겠지만.
“아니. 그건 좀 그런데.”
“역시 그렇죠?”
“가슴도 안 나온 아이들한테도 욕정이 드나? 도무지 이해가 안 돼.”
군터는 슬쩍 벨리사의 얇은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리스를 낳고 나서 약간 더 커진 가슴이 큼지막한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여자 아이가 아니라 남자 아이 쪽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군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역겹군.”
순간적으로 벌거벗은 주교가 사내아이의 몸을 더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추잡한 상상을 지워버리기 위해 군터는 벨리사의 가슴에 머리를 가져갔다. 안쪽에 넣어둔 손으로 옷을 잡아당기니 탄력적인 가슴 한 쪽이 옷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단숨에 가슴 가운데의 유실을 머금었다.
“이럴 때 보면 당신이나 보리스나 비슷해 보이는 거 알아요?”
“내 자식이니 날 닮았겠지.”
나름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내심 자평하며, 군터는 욕정에 몸을 맡겼다. 벨리사의 늘씬하면서도 탄력 있는 두 다리가 활짝 펴졌다가 곧 군터의 등을 휘감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