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군터는 트라벤 가의 저택을 들이쳐 가주 하이글렉을 사로잡았다. 그 과정에서 생긴 사상자는 경상자 넷이 전부였다. 창고 쪽을 친 살라스도 피해 없이 완벽히 임무를 수행해냈다.
군터의 한 손에 짐짝처럼 들린 하이글렉은 다소 살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그의 허벅지를 꿰뚫은 칸젤을 조금만 더 늦게 뽑아냈더라면 그대로 숨이 멎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칸젤은 탐욕스런 돼지의 피를 게걸스럽게 탐했다. 한동안 피 맛을 못 봐서 굶주렸던 것일까.
“으으으…….”
거칠게 들려가던 중에 하이글렉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허벅지의 고통 때문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끊어질 듯 말듯 신음소리만 줄기차게 내뱉었다.
군터는 웃으며 그의 뒷덜미를 흔들었다.
“엄살도 심하군.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어보지 그러나.”
콧대 높은 가주 3인방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꼽으라면 단연 하이글렉이었다. 외관상 혐오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모든 것이 다 하찮다는 듯이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면상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이 면상에 주먹을 꽂았던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거울이 없는 게 아쉽군. 지금 네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네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다.”
거리는 아직 조용했다. 아직까지 깨어 있던 자들이나, 얕게 잠들어 있던 시민들 중 일부는 병사들이 내는 소란에 눈을 떴는지 창문 사이로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이 꽤나 아쉬웠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위세 높던, 그렇게나 거들먹거리던 트라벤의 가주가 이렇게 추하게 끌려갈 줄 말이다. 이런 희귀한 광경은 마땅히 더 많은 이들이 구경할 수 있어야 한다.
‘아쉽군.’
그가 받은 명령은 하이글렉을 생포하여 압송하는 것까지다. 그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부디, 도시 밖의 도적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이글렉 역시 많은 시민들 앞에서 깔끔한 최후를 맞았으면 했다. 물론 그렇게 될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다른 가주 놈들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니까 말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버러지가 있다면 바로 이런 놈일 것이다. 세상이 바로 되었다면 이런 놈에게 무슨 아량이 필요할까마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
하이글렉에 대한 처분은 다음날 곧장 이뤄졌다. 그 신속한 처리는 하이글렉과 트라벤 가에 내려진 처벌 수위만큼이나 의외였다.
“…이상과 같이, 트라벤 가문과 하이글렉이 저지른 죄는 그 어떤 선처도 고려할 수 없을 만큼 악랄하고 지독하다. 비록 긴 세월 동안 제국을 위해 세운 공적이 적지 않다 하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트라벤과 하이글렉의 죄는 무겁도다. 따라서 위글로우의 사령관인 본인, 막시밀리언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무수한 인파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교수대에는 하이글렉을 비롯한 트라벤 가의 직계들이 양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파리해진 안색의 하이글렉이 악다구니를 썼다. 그에게 슬쩍 시선을 준 막시밀리언이 눈짓하자 병사가 다가와 하이글렉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하이글렉은 재갈을 피하려 필사적으로 피하려 몸부림 쳤으나 병사는 거칠게 그를 후려쳐 잠잠하게 만들었다. 엎어진 하이글렉은 핏발 선 눈으로 막시밀리언을 노려보더니 곧 여기저기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 두 가주를 찾는 것이었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금쯤 각자의 자택에서 하인이나 사병의 보고를 받으며 하이글렉의 목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통혼이니, 오랜 우호의 역사니, 전부 부질없군.’
하이글렉의 정부인은 유론의 조카이며, 히링의 어미는 하이글렉의 이모다. 당대에만 해도 이렇게 혈연으로 얽혀 있으며,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복잡한 관계가 이어진다. 솔직히 가문만 다를 뿐이지, 그들 모두가 한 가족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임에도 그들은 이렇듯 매정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선 것도 모자라 막시밀리언과 손을 잡고 하이글렉과 트라벤을 몰락시키는 데 일조하기까지 했다. 하이글렉이 빌미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독하리만큼 비정한 처사다.
철컥!
사형집행인이 형틀에 하이글렉의 목을 고정시켰다. 하이글렉은 여전히 악을 쓰며 발버둥 쳤다. 이제 곧 다가올 최후 앞에서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참 우습고 추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위글로우가 자신의 것인 양 온갖 거만을 다 떨어대던 유력가였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어찌 이렇게 처지가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몰려든 시민들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이전에 있었던 도적들의 처형 때와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모두 입을 다문 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직까지 그들은 그 트라벤 가의 가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그리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형을 집행하라.”
사형집행인이 바라보니 막시밀리언이 명을 내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끔 복면을 쓴 집행인은 큼지막한 양손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것이 육중한 바람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졌을 때, 광장은 완전한 적막에 휩싸였다.
짝! 짝! 짝!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던 적막을 깬 것은 규칙적으로 나온 박수소리였다. 한 사람이 치는 것이나, 그 소리가 수십이 치는 것만큼 커서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쏠렸다.
군터는 무수한 시선들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박수를 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어색하게 하나둘씩 박수를 치며 동조하거나, 닫았던 입을 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소란스럽게 환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군터는 눈앞의 사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맞은편의 사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웃는 낯에 싫은 소리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나, 군터는 사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전에 있었던 막시밀리언의 소개 때문이었다.
“미겔이라고 하지. 이번에 하이글렉의 악행을 알린 제보자일세. 이 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하이글렉을 쳐낼 수는 없었을 것이야.”
거기까지는 좋다. 공을 세웠다면 응당 대우해주는 것이 옳으니까. 군터는 대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의 공을 시샘하는 소인배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공을 세운 이 사내의 경력이 문제였다. 하이글렉에게 노예와 마약을 공급하던 도적. 아무리 이번 일에 공을 세웠다고는 해도 관리된 자로서 태연히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는지, 미겔이라는 이름의 도적은 애써 웃는 낯을 하고 인사를 건넨 뒤로는 자중하며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겁쟁이로군.’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저렇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도적놈은 변변찮은 놈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 확신한 군터는 미겔이라는 놈에게서 신경을 껐다.
“얼굴이나 알아두라고 불렀네. 자주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어찌 되었건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네.”
막시밀리언은 미겔이라는 자를 제법 좋게 본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본래 하던 도적질 대신 다른 일을 하며 막시밀리언을 섬기게 되었다. 그 존재가 하이글렉을 비롯한 트라벤 가의 몇몇 고위층들에게 밖에 알려지지 않은 만큼, 미겔과 그의 부하들을 사병으로서 쓸 생각인 것 같았다.
“도적질이나 하던 놈입니다. 요긴하게 쓰신다 하지만, 이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군터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도 거침없이 말했다. 막시밀리언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만큼은 군터도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말을 가려하거나 돌리지 않았다. 미겔은 다소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곧 표정관리를 했다. 거의 닳고 닳은 장사치에 준하는 감정조절 능력이었다.
“아무래도 군터님께서는 제가 상당히 못마땅하신 것 같군요.”
“그럴 수밖에.”
“제 과거가 용서받기 힘들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공으로 과를 덮으려 하니, 부디 잘 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한쪽에서 아무리 강하게 손을 후려쳐도 반대쪽이 마주치지 않는다면, 하다 못해 손을 내밀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소리가 날 수 없다. 미겔은 상대가 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고개를 숙였다. 이러니 군터로서도 더는 강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자칫 일방적으로 핍박하는 모양새로 비춰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
트라벤 가문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막시밀리언은 하이글렉과 직계 혈족의 목을 친 이후 트라벤 가문이 가지고 있던 가산을 송두리째 찢어발겼다. 가주가 죽고, 상속권이 있는 직계 혈족들마저 모조리 죽어나갔기에 트라벤의 가산에 대해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물론 찾아보면 먼 방계들 중에서 해당자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막시밀리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내가 트라벤가 상속권자요’하고 나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사실 그렇게 숨죽이는 방계들보다 더 우선적인 상속권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바로 트라벤과 통혼으로 이어진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 가문. 그들 가문에는 상속권을 주장하려면 주장할 수 있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들은 트라벤 가문의 이들과는 달리 마냥 막시밀리언이 두려워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주장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몫에 대한 이야기는 물밑에서 이미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정하군. 그래도 한 핏줄일 것인데.’
트라벤 가문에 그리몰드와 올리네이스의 여인들이 속해 있듯, 그들 가문에도 트라벤의 여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트라벤 가문의 참사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찢겨진 트라벤의 가산에만 관심을 보였다. 군터는 그런 그들이 우습고 경멸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의 눈에는 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욕망에 집어삼켜진 괴물로 보였다.
‘가문이라는 것들은 다 그런 것인가.’
위글로우의 세 가문이 유별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곳의 가문들도, 어쩌면 귀족이라는 이들도 다 비슷비슷할 것 같았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욕심이라는 것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커지는 모양이니.
“대장님. 사제단이 곧 당도한다 합니다.”
트라벤 가문의 처리로 인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던 와중에 어느덧 여명 교단의 사제단이 위글로우 부근까지 당도했다.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명을 받아 사제단을 영접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나섰다. 무슨 이런 마중 임무에 천인장 씩이나 움직이느냐 할 수도 있으나, 바로 마중 임무이기 때문에 군터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지금 위글로우로 오고 있는 여명 교단의 사제단은 보통 사제단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교단의 주교가 이끄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위글로우에서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군터가 귀찮지만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유였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