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56화 (156/1,064)

<-- 2부 -->

‘이백 년에 가깝다고 했던가.’

트라벤 가문의 역사에 대해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역사가 이백 년을 넘었다고 했는지 거의 이백 년이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 대충 흘려들은 탓이다.

‘넘었으면 어떻고, 못 넘었으면 어떤가.’

트라벤 가의 역사 따위는 전혀 쓸모없다. 이백 년이 아니라 삼백 년이라 해도,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아무 의미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때는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던 놈들이 이제는 마약 장사라니.”

저질스럽고 추하기 짝이 없다. 감히 겁도 없이 제국민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으니 오늘 당장 몰락한다고 해도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웬 놈들이냐!”

트라벤 가의 사병은 백삼십 남짓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드러난 것이 그 정도이고, 드러나지 않은 수까지 합하면 그 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병의 수만 해도 오십이 훌쩍 넘어 보였다. 군터가 이끌고 온 병사들의 배 이상인 것이다.

그러나 배가 넘는 수를 앞에 두고도 군터는 태연했다.

“사령관님의 명을 받들어 죄인 하이글렉을 잡으러 왔다. 트라벤 가의 사졸들은 저항하지 마라. 저항하는 놈들은 모두 하이글렉과 한패인 것으로 간주, 중죄인으로 처벌하겠다.”

대놓고 하이글렉을 잡으러 왔다 하며 중죄를 운운하자 트라벤 가의 사병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 그들은 결연히 무기를 빼들었다.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답을 행동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래도 돈 값은 한다 이건가.’

3대 가문의 사병들이 후한 봉급을 받는다는 사실은 위글로우의 시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신입을 기준으로 정규군에 비해 반 배 이상 더 받는다니 말 다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비싸게 먹이고 재운 보람이 있는지, 사병들은 감히 정규군 앞에서도 이빨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실로 잘 훈련된 개와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자기 집에 발을 들인 외인에게는 이를 드러내니까 말이다.

“개라서 그런지, 사람 말은 소용이 없군.”

사실 이렇게 나오기를 바랐다. 그래서 칸젤까지 들고 온 거다.

늦은 시각에 갑자기 막시밀리언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싶었는데, 이런 통쾌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턱!

사병들 중 눈에 띄는 무장을 갖춘 사내가 덤벼들었다. 군터는 몸을 돌려 그가 내지른 검을 피하고 검을 쥔 손목을 움켜잡았다.

“윽!”

사내가 다급히 발을 차올렸으나, 그보다 먼저 우악스러운 힘이 그의 손목을 으스러뜨렸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을 쥔 손이 축 늘어졌다. 군터가 손을 떼고 난 손목은 물 먹은 종이마냥 멋대로 늘어져 춤을 췄다.

“끄어억!”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걷어차 뒤따라 달려오는 사병들을 막았다. 사병 서넛이 날아가는 사내의 몸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적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쳐라!”

사실 말 위가 아니라 땅 위에서라면 무거운 철창보다는 검이 더 낫다. 특히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맞붙는 싸움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난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군터는 달랐다. 그에게는 육중한 칸젤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를 수 있는 괴력이 있었다.

콰직!

창이 아니라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칸젤이 움직이는 궤적에 걸린 모든 것이 박살이 났다. 무기도, 사람도, 무엇하나 멀쩡히 버티는 경우가 없었다. 군터가 한 발을 뗄 때마다 꼭 한 명 이상씩이 꿰뚫리고, 베이고, 부서져 쓰러졌다.

트라벤 가의 사병들은 군터를 포위하려 했으나 군터를 따라온 병사들이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수는 밀릴지라도, 군터가 데려온 병사들은 모두 쉽지 않은 전장을 몇 번이나 겪은 경험이 있는 용사들이었다. 한낱 사병 나부랭이들 따위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악!”

듣기로는 트라벤의 사병들도 위글로우가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을 당시 참전하여 싸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군터의 병사들과는 비할 수 없다. 두 무리의 병사들은 부딪치기가 무섭게 한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압도하는 것은 당연히 군터의 병사들 쪽이었다. 더군다나 군터가 선두에서 마음껏 날뛰니 막아섰던 트라벤의 사병들은 곧 모두 쓰러지거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하이글렉은 어디에 있나.”

“으음!”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자에게 물었으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살고 싶어 항복은 한 주제에 그래도 주인이라고 의리를 지키는 것인가. 군터는 입을 다문 자의 즉시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에게 똑같이 물었다. 이번에는 답이 술술 튀어나왔다.

“아, 안채에! 지, 지금쯤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고 계실…….”

“이놈! 네놈이 감히 가주님의 은……!”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헛소리를 하려던 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다시금 조용해진 상황에, 군터는 협조적인 사내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안내해라. 순순히 협조한다면 네놈 본인은 물론, 네놈의 가족들까지 모두 무사할 것이다.”

“…….”

안색이 파리해진 사내가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수가 꽤 되는군.”

위글로우의 외각. 험한 인생들이 득시글거리는 골목 한 쪽에서 살라스는 병사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몇 채의 건물을 중심으로 둘러싼 채 살라스의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중이었다.

‘흐음.’

살라스는 신중했다. 그는 천천히 트라벤의 사병들이 지키고 있는 건물들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창고로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 치고는 지키는 인원의 수가 너무 많았다. 건물 안에 있을 인원까지 더하면 적어도 서른 이상.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성질 급한 할렌이 속히 공격할 것을 은근히 촉구해왔다. 그는 벌써부터 전투에 돌입한 것처럼 살짝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적의 수가 꽤 되어 보이는데, 정면으로 들이쳤다가 괜히 사상자라도 생길까봐서 그런다.”

“싸우다 보면 사상자야 당연히…….”

“피할 수 있는 피해라면 피하는 게 좋은 것이다.”

할렌은 납득하지 못한 듯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병사들을 이끄는 것은 살라스였다.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살라스는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히고 명령을 내렷다.

“병사를 둘로 나눈다. 할렌. 자네가 병사 열을 이끌고 바깥쪽의 창고를 쳐라. 최대한 소란을 피우면서 말이다. 그럼 트라벤의 사병들이 자네에게 몰려올 것이니, 그때를 노려 내가 놈들의 뒤를 치겠다.”

“옛. 맡겨주십시오.”

위험한 임무를 맡았건만 할렌은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반면 살라스는 걱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사를 조금 더 끌고 올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갑작스레 떨어진 명령이었다. 트라벤 가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신속히 움직여야 했기에 최소한의 병력만 끌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정예 병사들은 거의 트라벤의 저택을 치는 데 동원되었기에 살라스가 끌고 온 병사들은 구 막시밀리언 천인대의 병사였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이 약졸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군터를 따라 전장을 누볐던 구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보다는 처질 수밖에 없다.

“움직인다.”

살라스는 스물 남짓한 병사를 이끌고 할렌과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어둠이 그들의 모습을 가려주었지만 인적이 드문 거리는 그들로 하여금 숨소리마저 조심하게끔 강요했다.

그래도 무사히 자리를 잡고 몸을 숨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할렌의 고함소리가 잠 든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적이다!”

경계를 서던 트라벤 가의 사병들이 먼저 달려가고, 곧 건물 안에서도 무장한 인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았다.

“좋아. 이대로 놈들의 뒤를 친다.”

“옛.”

살라스는 곧장 적의 뒤를 치러 움직이는 한편, 약간의 병사들을 남겨 혹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지키게끔 했다.

“뭐야?!”

“적이다! 뒤에도 적이!”

난데없이 뒤를 잡힌 트라벤 가의 사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선두로 나선 살라스는 당황한 적들을 자비 없이 베어 넘겼다. 적의 기세가 줄어들자 수세에 몰려 있던 할렌 쪽도 다시금 기운을 얻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

한 번 기세가 꺾인 트라벤 가의 사병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반 수 정도가 속절없이 쓰러지자 하나 둘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는 자들이 늘어났다. 곧 스무 명에 달하는 적들이 무릎을 꿇으니 살라스는 병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포박하게 하는 한편, 본인은 곧장 창고로 향했다.

“빌어먹을 놈들.”

살라스와 함께 창고로 들어온 할렌은 내부의 풍경을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내뱉은 목소리만큼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살라스 역시 정도는 덜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창고 안에는 큼지막한 우리가 몇 개 있었다. 팔 하나 정도나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촘촘히 박힌 쇠창살 사이로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엉겨 붙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하나당 족히 스물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젊은 사내들이었고, 한 개의 우리에만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을 마약에 중독 시켜서 노예로 팔아먹는다니…도시 바깥의 도적놈들보다 더 악질이 아닙니까!”

할렌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살라스는 대꾸 없이 다른 창고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른 창고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짐승을 가둘 때나 쓸 법한 지저분한 우리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빼곡하게 갇혀 있었다. 하나 같이 상태가 안 좋은 것이, 마약의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글렉이라는 놈. 편히 죽지는 못하겠지요?”

“글쎄.”

할렌의 진한 바람이 섞인 물음에 살라스는 말끝을 흐렸다. 트라벤의 저택으로 군터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뒤로 어찌 일이 흘러갈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하이글렉을 잡는다 해도, 그 다음 부터는 높으신 분들의 사정에 달려 있었다. 그 같은 일개 백인장이 무엇을 알겠는가.

“나도 그 자가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군.”

이백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이렇게 참담한 꼴이 되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

“허억…허억……. 빨리, 빨리 달려라 이놈!”

하이글렉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보다도 더 거친 숨을 쉬는 수하를 닦달했다. 그러나 그의 수하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가, 가주님. 조, 조금만 쉬었……”

“허억! 쉬기는! 허억! 놈들이 곧 추격해올지! 허억! 모르거늘!”

하이글렉의 노성에 수하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억!”

등에 얹힌 하이글렉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업고 있던 수하가 쓰러지니 업혀 있던 하이글렉도 덩달아 돌바닥을 굴렀다.

“이런 쓸모없는 놈!”

하이글렉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돌에 쓸린 탓에 얼굴이며 팔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쓰러진 수하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아닌 밤중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러나 그는 경황없는 와중에도 대강의 사정은 추측하고 있었다.

‘젠장. 그 도적놈이 애송이 사령관에게 밀고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설마하니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이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두고 봐라. 내 여기를 나가기만 하면…….’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푸욱!

“커헉!”

허벅지를 꿰뚫은 큼지막한 창 한 자루에, 하이글렉은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허벅지로부터 밀려오는 격통은 그로 하여금 편히 기절하는 것도 허용치 않았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온 몸이 상처부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이었다.

“아…으아아아……!”

눈을 뜨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오직 뚜벅거리는 발소리만이 어렴풋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고작 여기까지 밖에 못 오다니. 어지간히도 여유롭구나.”

비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하이글렉은 정신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간만에 운동 좀 했더니 삭신이 그냥... 내일 하루종일 골골댈 게 눈에 훤하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