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55화 (155/1,064)

<-- 2부 -->

“이건 또 웃기는 일이군.”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뒤섞여 있는, 자신을 둘러싼 무리를 보며 미겔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콧방귀 한 번 뀌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거나, 겁에 질리거나,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며 울부짖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설마하니 그런 돼지새끼에게 뒷덜미를 물리다니.’

아마도 조금 얕봤던 모양이다. 돼지의 간교함을. 그리고 과한 정도를 한참 넘어선 탐욕을.

“언젠가 밑에 놈들 중에 배신하는 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만, 그래도 그게 너일 줄은 몰랐다. 정말 의외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익숙한 얼굴 중에 하나는, 그가 거의 항시 대동할 만큼 가까이 지내고 후대하던 부하였다. 일전에는 새로운 거래처를 틀기 위해 그리몰드 가의 연회에도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런 녀석이었건만, 그 녀석이 지금은 칼잡이들을 데리고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소. 두목. 그 쪽에서 내건 조건이 너무 후했어. 바보만이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 거요. 내가 바보가 아니었던 걸 원망하시우.”

“뭘 주고받기로 했는데?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궁금한 거나 알고 가자.”

“…우리 모두를 트라벤 가문에서 받아주기로 했소. 이제 우리는 트라벤 가문에서 정식으로 봉급을 받을 거고, 당연히 군졸들에게 쫓기는 일도 없을 거요.”

“뭐, 그렇다 치고. 그 다음은?”

“뭐가 더 필요하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여유롭던 미겔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은 떡하니 벌어졌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게 전부라고? 받는 것도 없이 그냥 돼지새끼의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게 전부란 말이냐?”

“안전을 보장받는 거요. 그것보다 중한 게 뭐가 있어!”

바보 취급을 받는다 생각했던지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정작 화를 내고 싶은 것은 미겔이었다.

“그 돼지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겁쟁이 놈을 알아보고 딱 알맞은 미끼를 던졌어. 하하! 부려먹기 쉬운 놈이라 생각해서 곁에 두었더니, 내가 부려먹기 쉬운 놈은 다른 놈도 부려먹기 쉬운 놈이란 걸 몰랐구나. 멍청한 짓을 했어. 멍청한 짓을…….”

미겔은 자조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자, 수다는 이쯤에서 끝내자. 난 이제 내 살길을 찾아봐야겠다.”

말을 마치고 그는 곧장 정면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수십 개의 칼날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날 보자고 했다고?”

상념에 젖어 있던 미겔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 사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를 표하려 했으나 두 팔을 묶은 굵은 포승줄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예는 됐다. 담을 넘어온 자에게 그런 것을 기대치는 않아.”

“그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나 제가 사령관을 뵙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이 그 방법뿐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안다. 그게 내가 지금 네놈을 만나고 있는 이유다.”

막시밀리언은 포박되어 무릎 꿇고 있는 침입자에게 꽤나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코르넬의 말에 의하면 보통 놈이 아닐진대, 말하는 것만 보면 미친 놈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뜻.

“좋아. 한 번 들어나 보자. 야밤에 담을 넘어서까지 날 보고자 했던 이유가 뭐냐.”“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 네 목숨을 위협하느냐?”

“트라벤 가의 가주. 하이글렉입니다.”

“…하이글렉?”

막시밀리언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하이글렉이라니, 굉장히 예상외의 이름이다.

“소인은…자그마한 도적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미겔은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도적단을 이끌었다는 것과, 작은 거래를 통해 하이글렉과 연을 맺게 된 것. 그 뒤 그의 요구에 맞추어 노예를 공급해온 것과 근래에 들어 키시아를 공급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키시아?”

“몸의 활력을 돋우는 약초입니다. 허나 중독성이 있어 복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요. 하이글렉은 그것을 통해 난민들을 중독 시키고 노예로 팔아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팔려간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이글렉은 트라벤 가의 가주다. 트라벤 가문은 위글로우의 손꼽히는 명가 중 한 곳. 야밤에 담을 넘어온 수상쩍은 자의 말은 믿을 수가 없군.”

“증좌가 있습니다.”

“장부라도 남겼단 말인가?”

“하이글렉은 탐욕스럽지만 나름대로 철저한 자입니다. 게다가 이런 거래를 하며 장부 같은 것을 쓴다는 것도 우습지요.”

“허면?”

“키시아에 중독되어 노예로 전락한 이들. 팔려가기 전에 그들이 갇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곳을 덮친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이 곧 증좌가 되지 않겠습니까?”

“…….”

“하이글렉은 전부터 키시아의 공급을 대폭 늘릴 것을 요구했으나 제가 그것을 거절한 바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앙심을 품었는지, 그는 오늘 저를 죽이고 제 휘하의 무리를 통째로 먹어치우려 했습니다.”

“네가 살아서 도망친 것을 알면 움직임을 취하겠군.”

“예. 때문에 하이글렉을 치시려면 지금 뿐입니다.”

막시밀리언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이글렉. 하이글렉이라…….’

탐욕이 덕지덕지 붙은 두툼한 얼굴이 떠올랐다.

난민이라 하나 위글로우의 시민이고 제국의 백성이다. 그런 그들을 계획적으로 마약에 중독 시켜 노예로 만들었다함은 고리대금보다도 훨씬 질이 나쁜 중범죄였다. 듣기로 피해자의 수가 수백을 헤아린다 하니 제 아무리 명가의 가주라 할지라도 극형을 면치 못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트라벤 가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사령관인 그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기회는 기회인데…나머지 두 가문이 어찌 나올지 모르겠군.’

스스로의 이름을 미겔이라 밝힌 이 침입자의 말대로 증좌가 있고, 그것을 무사히 손에 넣었다는 전제 하에 명분은 이쪽에 있다. 허나, 만약에 다른 두 가문이 트라벤의 편을 든다면 일처리가 상당히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명분이 확실한 만큼 그쪽에서도 대놓고 맞서거나 하지는 못하겠지만,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도 곤란함을 줄 수 있는 방도는 많다. 특히나 막시밀리언은 금광 채굴이라는 사업을 그들과 연계하여 벌이고 있었다.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위험하지만…역시 놓치기에는 아까운 기회다.’

곧 마음을 굳힌 막시밀리언이 감았던 눈을 떴다.

*

유론과 히링은 준비되어 있던 차를 들며 막시밀리언의 말을 기다렸다. 잠자리에 들려다 불려왔기에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굳이 하이글렉은 빼놓고 그들 둘만 부른 사령관의 저의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마음이 편치 못했다.

“우선은…이 야심한 시각에 그대들을 청한 결례에 대해 사과하리다.”

“아닙니다. 사안이 급하다면 하늘에 달이 떠 있든 해가 떠 있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론이 담담히 대꾸했다. 개의치 말라는 듯 말했으나 그걸 바꿔 말하면 곧 사안이 급하지 않은데 불렀다면 상관이 있다는 뜻이다. 즉, 시시한 일로 불렀다면 재미없을 거라는 의미다.

“어인 일이십니까? 더군다나 하이글렉님은 빼놓으시고 저희 둘만을 청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음. 그에 관해서는 미리 언질을 들었을 터인데.”

“그랬지요. 허나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세 가문은 서로 끈끈하게 엮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청하는 자리를 만들면서 한 명을 빼놓고 불렀을 때에는 당연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그들에게 부름을 전하러 갔던 막시밀리언의 수하들은 이 자리가 하이글렉에 대해 논하는 자리임을 미리 전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이다. 그대들이 내 부름을 거절치 않고 이곳에 왔다는 것은 내가 수하들 편에 전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겠지?”

“관심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한 번 들어나 보자 하여 온 것입니다.”

막시밀리언이 그들에게 전한 말은 ‘하이글렉이 저지른 중죄에 대해 논하고 싶다’는 한 마디였다. 사안이 급박하니 속히 만나길 원한다는 첨언이 있었으나 본론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관심이 있는 것이겠지. 그러니 하이글렉에게 말을 전하지 않고 곧장 날 보러 온 것이 아니오.”

두 가주의 얼굴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찌푸려졌다.

“사람을 붙이셨습니까?”

“어찌 그러시오. 피차일반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믿는 관계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애초에 그 믿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서로 긴 세월 동안 얽히고설키며 통혼까지 한 사이에서도 하나가 약점을 보이자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오지 않는가.

“하이글렉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소.”

막시밀리언은 미겔로부터 전해들은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그 내용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전하는 막시밀리언의 말은 느긋하기만 했다. 듣고 있는 두 가주가 답답함을 느낄 만큼.

“…지금 하신 말씀에 거짓은 없겠지요.”

“믿을 만한 수하가 전한 정보요. 내가 지금 한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소.”

미겔의 말만 듣고 가주들을 불러 모은 것은 아니었다. 수하들을 풀어 확인 작업을 끝내고 확신을 얻은 후에 움직인 것이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유론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명분이라는 주도권을 쥔 것은 막시밀리언임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하이글렉이 저지른 일은 확실히 중죄에 해당한다. 만약 거리의 왈패가 그런 짓을 했다면? 모두 잡아들여 목을 베어도 좋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트라벤 가문의 가주라면? 어찌어찌 유야무야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충 희생양 몇을 정해 대신 죄를 받게 해도 좋고 말이다.

하지만 젊은 사령관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하이글렉에게 죄를 묻겠다고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선까지 죄를 묻겠다는 것인가?

“그대들도 알겠지만, 위글로우는 자그마한 도시요. 이 작은 도시에 네 개의 머리는 너무 많지 않소이까?”

“…그 말씀은.”

두 가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히링 같은 경우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기세였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그대들과 같은 말에 올랐소. 그러니 어지간한 일이라면 한 말을 탄 이들과 얼굴을 붉히고픈 생각은 없소이다. 허나 하이글렉이 한 짓을 보시오. 이런 미련한 망아지 같은 작자와 불안해서 함께할 수 있겠소이까? 내가 그대들에게 믿음을 준 만큼, 그대들도 내게 믿음을 줘야할 게 아니냐 이 말이오!”

쾅!막시밀리언이 대뜸 얼굴을 붉히며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찻잔이 엎어지고 찻물이 상 위를 적셨다. 막시밀리언은 부릅뜬 눈으로 두 가주를 연달아 노려보았다.

“이 자리에서 당장 선택하시오. 못된 망아지 놈을 쳐내고 계속해서 나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나와 갈라서고 망아지 놈과 함께 할 것인지. 전자를 택한다면 내 망아지 놈이 가진 것을 그대들과 함께 나눌 것이나, 후자를 택한다면…놈과 함께 내 분노를 나눠야 할 것이오.”

유론과 막시밀리언, 막시밀리언과 히링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

군터는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고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 천천히 뒤따라 와라.”

칸젤을 비스듬하게 내려 쥔 채, 트라벤 가의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수십 명의 병사들이 느긋하게 따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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