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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54화 (154/1,064)

<-- 2부 -->

사령술의 수련이 진척이 없는 탓에 다소 짜증나는 날들을 보내던 중, 간만에 유쾌한 일이 생겼다.

“흐음.”

군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는 할렌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건방진 녀석 같으니.”

고개에 허리까지 숙인 할렌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지금 할렌은 군터의 말 한 마디, 숨소리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을 터였다. 그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이 나오면 가슴이 다 철렁거리겠지.

오늘, 드디어 할렌은 군터를 직접 찾아와 루시를 달라 청했다. 혼자 속만 끙끙 앓던 녀석이 드디어 용기를 낸 것이다.

‘드디어 용기를 냈군. 겁쟁이 자식이.’

속으로는 피식피식 웃음이 났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는 정말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마음에 둔 여인이라지만, 어쨌거나 노예라면 사유재산이다. 하급자로서 상관에게 네 재산을 내게 주시오 하는 일이 쉬울 리 있겠는가. 그건 아무리 제값을 치르고 사겠다고 해도, 군터와 할렌의 사이가 가깝다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조금 더 골려주고 싶은데.’

짓궂은 마음이 들었지만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꼴이 안쓰러워 그쯤하기로 했다.

“루시는 내 노예다. 넌 루시의 값으로 내게 뭘 주겠느냐?”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엇이든 내겠다고는 하지만, 군터는 할렌이 가진 무엇도 탐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큰 집에 살고 있으며 고용인을 수십이나 두어도 남을 정도로 넉넉한 녹봉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것도 가진 거라고는 어머니 유리아와 함께 사는 집 한 채에 말 한필이 전부인 할렌에게 말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루시를 네게 주마. 면천을 시키든, 어쩌든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 후로도 루시는 지금까지와 같이 벨리사의 시녀 일을 해야 한다.”

“예? 그 말씀은…….”

번쩍 고개를 든 할렌은 기쁨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을 했다.

“보수는 주겠다. 다른 하인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네 집에서 머물며 내 집으로 출퇴근을 하는 거다.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노예가 아니라 하인으로 루시를 쓰겠다는 뜻이다.”

루시는 그의 노예였지만 벨리사와 모든 시간을 보내왔다. 그 기간이 짧았던 것도 아니라 벨리사는 루시에게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보낸다고 하면 벨리사가 서운해 할 터. 군터는 벨리사를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떠냐. 네가 그리 하겠다면 루시를 네게 주마.”

“그, 그리하겠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할렌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터는 끝내 겉으로도 피식 웃고 말았다. 순진해빠진, 겉으로만 사내였던 꼬맹이가 마침내 진짜 사내가 되는 모양이었다.

*

군터는 벨리사에게 루시를 할렌에게 주기로 한 것을 알렸다.“정말 잘 됐네요.”벨리사는 할렌이 루시에게, 루시가 할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군터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특히 할렌이 찾아와 벌벌 떨면서도 루시를 달라 애원했다는 대목에서는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그녀 자신도 노예였던 시절이 있었기에 할렌과 루시의 이야기에 더 몰입을 하는 것 같았다.

“둘이 결혼을 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루시는 당분간 시녀 일을 계속하게 될 거야.”

“겨우 한 집에서 살게 된 연인에게 너무 미안한 일 아니에요?”

군터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는 걱정이 엿보이는 벨리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그간 몸에 좋다는 것들을 강제로 먹고 바르라 안겼더니 아이의 엄마가 되었음에도 예전보다 더 피부가 좋아진 것 같았다.

“아무도 당신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누구도 노예였던 부하나, 노예 시녀의 사정을 이렇게 세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벨리사가 이러는 것은 그녀의 과거도 과거지만, 그녀 자신의 성미자체가 배려심이 많기 때문이다. 군터는 그것이 우스우면서도 기꺼웠다.

“당신은 천인장의 아내야. 오만해지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윗사람의 위치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 사교계에도 가끔씩은 나가보던가.”

“그건 좀…아는 사람도 없는 걸요.”

본디 사람이라는 것은 몇 명만 모여도 무리 짓고 위아래를 나누기를 좋아하는 터라, 자그마한 도시라지만 이 위글로우에도 상류층의 여인들이 어울리는 사교계가 존재했다. 고위 관리들의 부인, 여식들부터 시작해 그들과 연줄이 닿는 상가의 여인들까지. 듣기로는 한 달에 적어도 서너 번은 파티가 열린다던가.

“억지로 나가란 소리는 아니야. 단지 난 당신이 당신의 위치를 좀 더 즐겼으면 좋겠어.”

벨리사는 아직까지 노예로 지내던 시절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적어도 군터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바깥출입도 많지 않은 편이었고, 그나마 가끔 있는 외출도 거리를 구경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바람을 쐬는 게 전부였다. 천인장의 아내로서는 지극히 소탈하고 소박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그녀의 본래 성품에 의한 것이라면 군터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평소 그녀에게 드리워져 있는 옅은 그림자를.

군터는 그녀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꽤 노력했었다. 비싼 장신구며 옷 등의 사치품을 안겨주기도 했었고, 그녀를 막시밀리언이 주최하는 연회에 몇 번인가 데리고 가기도 했었다. 그녀와 함께 숱한 사람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고 체감시켜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바깥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군터는 그런 그녀가 내심 답답했지만, 절대 내색하지는 않았다.

군터는 벨리사의 표정이 안 좋아지려하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할렌 녀석이 루시와 결혼을 한다면 그것도 웃기겠군. 둘 모두 꼬맹이 때부터 내가 데리고 있던 녀석들인데 말이야.”

“그렇네요. 할렌은 몰라도 루시는 정말 어렸을 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과거를 떠올리는 두 사람의 얼굴에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

코르넬의 정식 직책은 사령관 보좌였다. 말하자면 부관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백인장이었으나, 그는 위글로우로 오면서부터 온전히 막시밀리언의 수하로서의 역할에만 전념하고자 했다. 하여 사령관 보좌로 진급하면서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은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의 역할은 막시밀리언이 내리는 갖가지 자잘한 명령들을 수행하고, 그의 호위 병력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본래는 호위대장을 따로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막시밀리언은 그 역할까지 코르넬에게 맡겼다. 그만큼 코르넬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달리 호위대장의 역할을 맡을 만한 인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순찰은?”

“3조가 돌고 있습니다.”

병사에게 보고를 들은 코르넬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람도 쐬고 호위 상태도 점검할 겸해서 직접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밤바람인데도 전혀 차질 않군.’

코르넬은 본래 바크렌 남부 출신이었다. 그의 고향에 불던 밤바람이 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고향의 것과 비슷한 바람을 맞으며 낯설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북부에서 보냈던 몇 년 동안 그곳의 찬바람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도 아니다. 지냈던 시간으로만 보면 북부에서 복무하던 시절은 짧았지만, 짧은 시간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강렬했었으니까 말이다.

밝은 달 아래 훈풍을 맞고 있으니 평소에는 안 하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내 나이도 이제 거의 마흔이군.’

세월이 참 빠르다 싶었다. 오늘 아침 몸을 씻고 거울을 보는데 흰머리가 이곳저곳 제법 보였다.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로도 가릴 수 없는 주름이 져 있었다. 외관 따위야 아무려면 어떻겠냐마는, 주름 하나 없던 애송이 때의 기억이 절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도시의 사령관이 되실 줄이야.’

어린 주인. 이제는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그의 주인은 군문에 들어서며 했던 말을 끝내 이뤄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만인의 우러름 정도는 받아봐야 하지 않겠나.’

상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 어려움 모르고 자란 철부지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코르넬은 그저 부족함 없이 자란 젊은이의 치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스로 가문을 뛰쳐나와 군문에 들어서고, 점차 말했던 것을 이뤄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처음에 품었던 생각은 사라지고 몇 번이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장자가 아니어서 가주 자리를 이어받지는 못한다한들, 가만히만 있어도 평생 동안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는 운명이었다. 그런 안정된 삶을 걷어차고 고생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하기 힘든 선택이다.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위치라면, 가주 직을 이어받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낫지.’

이제 코르넬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의 주인은 이제 그가 걱정할 만큼 작고 약한 사람이 아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주인의 옆에서 지켜보는 것뿐.

‘음?’

상념에 잠겨 건물 사이의 공터를 거닐 때였다. 무언가,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어느 정도 깊어 고요한 가운데, 코르넬은 희미한 소리를 감지하고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침입자.’

제법 거리가 있는 담벼락 아래로 거뭇한 형체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의 손에는 금방 뽑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하나다. 암살자인가?’

곧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올 터. 게다가 한 명이라면 굳이 병사들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으리라.

챙!

빠르게 뻗어간 검. 허나 침입자는 뽑지도 않은 검을 칼집 채로 휘둘러 받아냈다. 힘도, 반응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에 코르넬이 눈살을 찌푸리며 공격을 이어갔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코르넬이 전력으로 밀어붙였으나 침입자는 여전히 검도 뽑지 않은 채 여유롭게 그를 받아냈다.

카앙!침입자가 코르넬을 힘껏 밀어내고 다급히 외쳤다.

“잠깐! 난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니오! 난 사령관께 이야기를 전하러…….”

“아뢸 것이 있었다면 대낮에 왔어야지. 밤에 담을 넘어온 놈이 그런 말을 해도 설득력은 없다.”

침입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제야 코르넬은 그가 부상을 입은 것을 알았다. 담을 넘기 전에 입은 부상인 듯했다. 암살자의 그것 같은 검은색 옷 일부분에 얼룩이 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더 커져가고 있었다.

“젠장! 대낮에는 위글로우 어디에도 세 가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잖소. 지금만 해도 놈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혼자서 들어온 거란 말이오.”

그러면서 침입자는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던졌다.

제법 젊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가를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자였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그러니 사령관을 뵙게 해주시오. 뭣하면 포박한 채 데려가도 상관없소.”

침입자가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명백히 저항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

코르넬의 눈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보리스가 크려면 한참 남았네요... 이 녀석이 사내 구실 할 정도면 군터 나이도 마흔을 넘을 텐데, 편수로 따지면 몇 편 쯤이나 되련지... 생각한 대로 분량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아직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조금은 막막하기까지 합니다. 하하.

제 글을 봐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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