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군터는 모페이브에게 신물이 사라져버린 일에 대해 물었다. 모페이브는 일찍부터 군터가 지니고 다니는 신물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이야기가 길어지지는 않았다.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지.”
조금 생각하던 모페이브는 금방 답을 내놓았다.
“역할을 다했다?”
“본래 그 신물이라는 것의 기능은 보신(輔身)에 있었습니다. 대장님께서 일전에 제게 말씀하셨지요. 그 신물을 얻고 난 뒤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것 같다고 말입니다.”“그랬지.”
“그 신물의 능력은 영구적으로 유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부족의 보물로 여겨지던 것이 그렇게 점진적으로, 미미하게 효과를 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 말은 둘은 군터는 마음이 좀 놓였다. 그는 내심 신물이 사라졌으니 신물이 주었던 능력까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신물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무래도 있던 것이 없어지면 아쉬운 법이니까 말이다.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법구는 심심찮게 있습니다. 다만 영구적인 향상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사실 그쯤 되면 보통의 법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요. 사용자의 육신에 영구적인 변화, 혹은 향상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생기를 직접 주무른다는 뜻이기에 그 정도 능력이라면 법보에 준한다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군터가 처음 신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모페이브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허나 그러한 힘이 무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떠한 초월적 존재의 힘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그릇에 담긴 이상 그 용량만큼의 힘을 발휘하면 사라지기 마련. 대장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물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지닌 힘을 다 소모했고, 그래서 사라졌다?”
“저는 그리 추측합니다.”
모페이브의 추측은 군터에게는 사실과 다를 바 없었다.
‘힘이 다했다라…….’
마음이 놓였다. 신물이 사라졌으니 앞으로의 수련에서는 이전과 같은 빠른 진전을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그리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연찮게 얻은 보물이었고, 그로 인해 본 덕은 어디까지나 덤이다.
‘난 아직 더 나아질 수 있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 자신감이라 해도 좋았다. 군터는 전신에 넘치는 힘을 느끼며 효용이 다한 목걸이를 목에서 떼어냈다.
*
군터는 벨리사, 보리스와 함께 외출을 했다. 벨리사와는 간간이 시장도 돌아보고 한 적이 있었지만 보리스를 데리고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빠바! 어어! 어어!”
군터의 한쪽 팔에 걸터앉은 보리스가 상인이 차려놓은 가판 한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걸렸고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군터의 두꺼운 팔이 의자 겸 벽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면 팔 따라 몸까지 기울이다가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으우우!”
보리스는 눈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을 보였다. 제대로 말도 못하는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그리도 매혹적이었을까?
“얌전히 좀 있어라. 다친다.”
“꺄아아!”
심통이 난 것처럼 계속 팔을 뻗어대더니만 이번엔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웃는다. 군터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데, 그러자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옆에서 또 벨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 녀석이 날 놀리는 것 같아.”
“설마요? 보리스는 그냥 당신이 같이 있어주니까 마냥 좋은 거예요.”
요즘 들어서는 그래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아들은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가.”
기분이 좋았다. 보리스를 받친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들이 가리키던 가판이 있는 점포에 다가갔다. 물건을 팔던 상인이 그를 보고 대번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군터의 얼굴을 몰랐지만, 뒤편에 있는 무장한 병사들을 보고 그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빠아아.”
“이거 말이냐?”
“히이이.”
목석처럼 굳은 상인 앞에서 보리스와 어울려주다가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리스는 온갖 것들에 호기심을 보였고, 그때마다 군터는 부지런히 움직여 어린 상전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음?”
보리스의 재롱을 보며 작게 웃고 있던 군터는 정면에서 다가오는 한 사내를 보았다.
대낮부터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대여섯 걸음에 한 번씩 비틀대며, 무엇보다 고개가 정면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군터는 그가 어느 정도 다가오다가 비켜 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비틀대면서 계속 걸어왔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군터가 그들을 제지했다.
툭!
아예 가슴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다가오던 그를 군터가 멈춰 세웠다. 가볍게 내뻗은 손이 그의 몸을 밀자 그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뒷걸음질 쳤다.
“아아…뭐야아?”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꾀죄죄한 몰골에 흐리멍덩한 눈. 비록 술 냄새는 풍기지 않았으나 영락없는 술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뭐냐고오오?”
보리스를 안고 있는 군터는 기세를 최대한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압도적인 그의 체구를 보면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군터를 보고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어지간히 취했다는 증거다.
“쯧! 대낮부터 볼썽사납군. 꺼져라.”
보통 때였다면 살짝 버릇을 고쳐주었겠지만 지금은 부인과 아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거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여 군터는 가볍게 노려봐주는 것으로 사내를 물리쳤다.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으나, 군터가 한 번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니 사내는 대번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히이익! 죄, 죄송합니다.”
사내는 꼴사납게 한 번 주저앉고는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며 달아났다. 보리스가 그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의 못난 꼴을 보며 즐거워하다니.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어린 아들의 싹수(?)에 군터가 혀를 차니 벨리사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당신 닮아서 그래요.”
“으음?”
“난 그렇지 않으니까요. 내가 아니면 당신을 닮은 거겠죠. 안 그래요?”
“…….”
언젠가, 아마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이런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그가 한 방 먹이는 쪽이었을 것이다.
“…글쎄. 타고난 것 보다는, 자라면서 보고 배운 거겠지.”
“네?”
“나보다는 당신하고 많이 있었잖아. 그러니 아마 당신을 보고 배웠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온 벨리사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그래놓고 자기 손이 아파 부여잡고 끙끙 거린다. 군터는 큭큭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뒤편에서는 병사들이 낯선 대장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여 입만 벌리고 있었다.
*
“물량을 늘리지.”
하이글렉이 과자를 씹으며 말했다. 먹는 중에 말한 탓에 과자 부스러기가 앞으로 튀었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히려 보고 있는 미겔이 더 부끄러웠다.
“…….”
“왜 답이 없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물량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바보 같은 생각이군. 간단하지 않나. 더 많이 사오면 되지.”
‘역겹고 무식한 돼지 자식!’
속으로 하이글렉을 잘근잘근 씹은 미겔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깨끗한 표정이었다.
“그쪽에도 그쪽의 사정이, 저희 쪽에도 저희의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군.”
쩝쩝거리는 소리가 영 거슬렸다. 그래도 미겔은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밝은 얼굴을 유지했다.
“물량을 늘리는 것이야 어떻게든 한다고 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무슨 뜻이지?”
“이제 서서히 중독 증세를 일으키는 이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리 되면 소문도 나기 시작할 텐데, 혹여 그것이 관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관부? 쓸 데 없는 것을 걱정하는군.”
하이글렉이 조소했다. 하지만 미겔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는 억지로 짓던 웃음도 접고 제법 심각한 기색을 비쳤다.
“물론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겠지요. 허나 점점 중독증상을 보이는 이들의 수가 늘어날 겁니다. 그리 되면 쉬쉬하기가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문제없다.”
“……?”
하이글렉이 한층 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든 과자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가루가 잔뜩 묻은 손가락도 쪽쪽 빨았다. 그 모습이 상당히 추하고 역겨워 미겔은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키시아의 다음 물량이 풀리기 전에 다 정리가 될 거거든.”
“그 말씀은…….”
“이 도시에는 두 발로 걷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느 거리를 가도 썩어 넘치는 게 난민 놈들이지. 그놈들은 쓰레기와 다를 바 없어. 위글로우의 모든 시민들은 그놈들이 사라지기를 바랄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들이 몇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속 시원해 했으면 했지 의구심을 갖지는 않을 게야. 관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과연. 그렇군요.”
“그래. 그런 거지. 클클클.”
하이글렉이 다시 코앞의 식탁으로 두툼한 손을 뻗었다. 이번에 쥔 것은 과자가 아니라 불그스름한 과일이었다. 자그마한 과실을 우적우적 씹으니 붉은 과즙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철 장사는 먼저 하는 놈이 임자다. 그러니 한 번 챙길 때 왕창 챙겨야지.”
살에 파묻힌 두 눈이 이글거렸다.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다음 물량을 가져와. 최소 먼젓번의 배 이상으로. 알겠나?”“…예. 그리하지요.”
하이글렉의 방을 나서기 전, 고개 숙인 미겔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번져 있었다.
‘지독하군. 실로 지독해.’
이런 자인 것을 알았기에 그를 선택했지만, 트라벤 가의 가주 하이글렉은 너무나 탐욕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자 같았다.
‘키시아를 건네줄 때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말이지.’
수목의 그늘 밑에서 자라는 키시아의 본래 용도는 약재다.
소량을 복용했을 때, 키시아는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허나 중독 증세가 있기에 복용할 때는 가루로 빻아서 소량만 복용하는 것이 본래의 용법이었다.
위글로우 주변에서는 자라지 않는, 저 먼 서쪽의 건조한 구릉 지대에서 자라는 것이라 그곳의 암상들과 거래하며 얻은 것을 미겔은 하이글렉에게 진상했다. 그저 이 선물로 일말의 호의라도 얻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키시아의 설명을 듣고 직접 복용까지 해본 하이글렉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사를 계획했다. 그것은 장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악독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하나 까딱 않는 미겔조차 약간의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값은 꼬박꼬박 제대로 쳐 주지만…너무 급하고 독하다. 저 돼지와는 조만간 손을 털던가 해야겠군.’
제 아무리 사령관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위글로우의 지배자 중 하나라지만, 하이글렉은 정도를 벗어나도 상당히 벗어났다.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었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단 일할의 불안요소라도 있다면 발을 빼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이 미겔이 터득한 생존의 비법이었다.
‘그래도 노예장사는 꽤 괜찮았는데 말이지.’
아쉬움이 남지만, 아쉬움에 발목 잡힐 생각은 없었다. 마음을 굳힌 미겔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몰랐었는데 잭팟 이벤트 대상이 되었네요. 독자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