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유론을 비롯한 3대 가문의 가주들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 이후, 군터는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들어오는 업무만 처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유론이 건넨 은근한 경고 때문은 아니었다. 군터는 그가, 혹은 그들이 경고가 아니라 협박을 했더라도 코웃음만 쳤을 것이다.
군터가 가만히 있었던 까닭은 그저 대놓고 호족들과 척을 질만한 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자신에게 그런 판단을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령관 대리였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자리의 원 주인 뿐인 것이다.
“사령관께서 허락하시리라 보십니까?”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군.”
군터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치안군의 역할을 강화하여 도시 내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 그를 위해 수하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부터 발 벗고 나설 용의가 있었다. 이는 도시에 주둔하는 군대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령관 된 막시밀리언의 의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관리가 저마다 의무를 다 했다면 바크렌이 지금 이 꼴이 되었겠는가. 이제 군터는 마냥 순진했던 십인장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때로는, 혹은 종종 법과 의무 위에 이익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분의 뜻에 달린 거겠지.”
생각해보면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가 위글로우에 부임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이제 와서 도시를 정화하겠노라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호족 가문들의 설레발이 큰 영향을 끼쳤다. 군터는 일개 관리에 불과한 그들이,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유지로 행세를 했다고 해서 뭐라도 된 양 설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유론의 생일 자리에 가서 나눈 회담을 통해 더 굳어졌다.
‘그놈들은 버러지다.’
높은 관리? 그건 좋다. 가산이 많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뭐라도 된 양 유세를 떠는 것은 좋게 봐줄 수가 없다. 그들이 귀족가였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신분을 버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아무리 돈이 많다한들 일개 평민집안에 불과하다. 직급이 높은 관리라고는 하나 그래봐야 사령관의 밑이고, 제국법의 밑이다.
물론 단지 관리로서 법의 그림자에 숨어 사익을 취한다는 사실, 혹은 정황만으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사실 그러기도 웃긴 것이, 당장에 그의 상관인 막시밀리언은 바로 그 버러지들과 손을 잡고 금광을 은폐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게 빼돌린 금은 또 다시 바크렌 군부의 중추인 리에론 가문으로 전해지고 말이다. 따라서 호족들의 부패를 문제 삼기에는 이쪽도 적잖이 낯부끄러운 상황이다.
“대장님께서는 어찌하여 호족들과 척을 지려 하십니까?”
살라스가 물었다. 군터는 즉답하지 않고 턱을 쓸었다. 길지는 않아도 까칠하게 자란 수염이 손끝에 걸려 튕겼다.
“그놈들이 싫기 때문이다.”
“예?”
“마음에 들지 않아. 가진 거라고는 돈 밖에 없는 놈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설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힘을 거머쥐고서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유세부리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 가문에서가 아니라 빈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면, 그랬어도 지금처럼 굴 수 있었을까?
이는 어쩌면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에게 부리는 유치한 투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맨몸뚱이 하나 가지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는 이 조그마한 도시에서 3대 가문이랍시고 으스대는 자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하지도 않은 자들이 대단한 척 위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배알이 뒤틀렸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없지 않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그저 허공에다 대고 욕이나 몇 마디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직접 나설 수 있었다. 허락만 떨어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좀 곤란하군.”
“…그렇군요.”
살마드에서 돌아온 막시밀리언은 군터가 제안한 치안 강화 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군터는 내심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될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광 때문입니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
말인즉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군터가 눈빛으로 묻자 막시밀리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터. 자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조그마한 도시의 일개 사령관에 불과하네. 내겐 이 도시를 잘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지. 사익을 취하든, 리에론 가문에 금을 갖다 바치든, 그건 나중의 일이야. 첫 번째로 내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이 도시의 통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장식장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 마개를 땄을 때의 향으로 보면 보드카나 그 비슷한 종류인 것 같았다. 평소 막시밀리언은 술을 마셔도 독하지 않은 것으로만 마셨었는데 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말이지. 영 쉽지가 않아. 알면 알수록 점점 어렵게 느껴져. 나는 분명히 전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올라왔는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느낌이야. 우습지 않은가?”
막시밀리언은 먼저 따른 잔을 내밀었다. 군터는 말없이 받아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잔을 따른 막시밀리언이 그것을 들이킬 때 동시에 잔을 기울였다.
“호족이라는 작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나라고 눈이 없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눈앞에 지저분한 돼지들이 있는데 치워버리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나. 하지만 말이야. 이 도시는 그들의 것이나 다름이 없어. 그들이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 세월이 얼마인가? 당장 이 도시에 사는 이들 중에 그들과 연을 한 번이라도 맺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야. 당장 그들이 부리는 사병이며 하인, 등등 고용인의 수만 합쳐도 얼마인가? 그 가족, 친척, 지인을 더하면 또 얼마지? 그들이 근 백 년. 아니, 가까운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부려온 이들과 그에 관련된 이들의 수는? 거기에 그들을 추종하는 자잘한 무리까지 더하면 또 얼마인가? 이해가 가나? 그들 모두가 소위 3대 가문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따르고 있다는 말일세. 그에 반해 나는? 사령관이라고는 하지만 굴러들어온 돌 아닌가. 물론 전시였다면 병사들을 동원해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전쟁이 멈춘 직후야. 시민들은 더 이상의 혼란을 증오하고 있네. 그들은 평화를 원하고 안정을 원해.”
막시밀리언이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또 다시 비웠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까칠해졌다.
“마음 내키는 대로 굴 수 있는 때는 어미에게 젖을 달라 울 때뿐이야. 거기서 더 큰 이후로는 더 이상 누구도 막무가내 고집을 받아주지 않아. 물론 마음대로 할 수도 있지.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네.”
“…….”
“언젠가는 저 거만한 돼지들의 살을 발라먹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네.”
막시밀리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더 이상의 어리광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
집으로 돌아온 군터는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책임이라.’
막시밀리언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면박 비슷한 것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앉아 분을 삭이고 있던 군터는 모페이브를 불렀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살라스가 더 좋았지만 지금은 야심한 시각이라 자고 있을 살라스를 깨워 데려오기는 조금 꺼려졌다. 게다가 군터는 이제 모페이브에게도 어느 정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이 잘 안 되셨나 보군요.”
“그래. 잘 안 된 데 더해 꾸중까지 들었지.”
모페이브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군터의 표정만 보고도 대략의 일을 짐작한 듯했다. 군터는 그가 가져온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리고 막시밀리언과 있었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 해주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이 그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는 조금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알 듯 말 듯하다. 처음부터 반반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화가 나는군. 이것은 그저 내 속이 좁아서인가?”
“머리로 이해하는 만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제 짧은 인생 동안에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고로 대장님께서는 정상이십니다. 당연한 반응이지요. 또, 사령관께서 대장님께 다소 까칠한 반응을 보이신 것도 당연한 겁니다.”
“말장난인가? 그럴 기분은 아닌데.”
모페이브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장난이라니. 제가 어찌 감히. 다만 각자가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각자의 사정이라…….”
“윗사람의 덕목이 아랫사람을 잘 살피고 올바른 목적지로 이끄는 것이라면 아랫사람의 덕목은 그 반대입니다.”
“내게 그것이 부족하다 생각하는군.”
“솔직히 말씀드려…그렇습니다. 대장님께서는 대가 센 분이시고 맡은 바 일도 묵묵히 잘 해내시지만 윗사람을 살피는 데는 다소 미숙하십니다. 좋게 말해 강직하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처세술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 대목에서 군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처세술? 윗사람을 살피는 눈치? 그런 능력은 그에게 없었다. 딱히 그런 게 필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 재주는 아첨꾼이나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느낀 바로는, 사람은 말로는 옳은 말 하는 이가 좋다고 하지만…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언제 들으면 귀한 조언이 되지만, 또 언제 들으면 잔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말을 할 시기를 가늠하는 것도 하나의 재주가 아닐지.”
“내게 그런 재주는 없다. 갖추고픈 마음도 없고.”
독한 술을 계속해서 들이부었다. 그러지 않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페이브의 말은 옳았다. 군터는 속이 꼬인다 하여 옳은 것을 두고 틀렸다 말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그는 모페이브의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막시밀리언에게 화가 났는지, 모페이브에게 화가 났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는 모른다. 그냥 화가 났다.
“대장님.”
“말해라.”
“말을 잘 할 자신이 없으시다면 그냥 말을 안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보고 참을 자신이 없다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게 너의 처세술이냐?”
“예.”
“흥! 그래. 차라리 그게 낫군.”
어쩌면 콧대가 높아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십인장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이렇게 크게 반감이 일지는 않았었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때는 싫어도 참아야 했다. 왜냐하면 달리 뭘 할 수 있는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힘이 생겼다. 아니, 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대뜸 이빨부터 드러내는 것이다.
“귀를 닫는 법과 눈을 감는 법은 어찌 배워야 하나?”
“달리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저 참고 또 참는 것뿐이지요.”
모페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군터도 흐리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털어넣었다.
========== 작품 후기 ==========
요 이틀? 정도 사이에 갑자기 선작 증가 수가 평소보다 배 이상 늘었군요. 딱히 연참을 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뭔지는 모르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봐 주셨다면 더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