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49화 (149/1,064)

<-- 2부 -->

그의 자리는 주인공인 유론의 자리에 이은 두 상석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의 자리에는 트라벤 가의 가주 하이글렉이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올리네이스 가의 히링이 자리해 있었다.

“실은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차였소.”

자리에 앉은 유론이 웃으며 말했다. 겉모습만 보면 생일날을 맞아 즐거워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직접 당사자에게 초대까지 받았는데 그럴 리가. 일이 있어 조금 늦었소이다. 사과하겠소.”

“아니오. 아니오. 사사로운 자리에 참석하는 일이 공무에 앞설 수는 없지. 오히려 내가 바쁜 분께 번거로움을 안긴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

군터는 답하지 않고 자리에 미리 준비된 술을 들었다. 과실주였다. 달지만 진하지 않고 은은하게 맛이 입 안 가득 적셨다. 제법 나쁘지 않았다.

탁!

하지만 취향은 아니었다. 군터는 한 모금만 마신 과실주를 도로 내려놓았다.

“맛이 별로요?”

“술 맛은 좋소. 내 입이 싸구려일 뿐.”

유론 같은 작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도통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유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웃고는 입지만 그의 입매는 조금 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연신 입술을 씰룩대고 있는 하이글렉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도 쉽고 말이다.

“자. 그럼 기다리던 귀빈께서도 오셨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유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단이 들어왔다. 각자 크고 작은 악기를 든 이들이 수십씩이나 우르르 몰려와 미리 준비되어 있던 구석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 다음은 속이 비칠 듯 말 듯 얇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들어왔다. 연한 화장이 왠지 모르게 더 야시시해 보이는 미인들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안 그래도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수백의 시선을 받으며 여인들은 유론의 앞, 좌석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에 와 섰다.

곧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니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느릿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객들이 다소 떨어져서나마 흥취를 즐겼다.

“오늘, 이 유론의 생일을 맞아 여러 고마우신 분들이 많이들 자리해 주셨소이다! 여러분을 위해 그리몰드 가문이 부족하나마 성의를 다해 준비하였으니 모두들 즐겨주시기 바라오.”

“그 무슨 말씀을. 부족하다니요!”“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군터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유론의 수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섬김을 받는 유론은 마치 귀족이나 왕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위글로우에서는 나름대로 목소리 좀 낸다는 이들이 이렇게 단 한 사람에게 바짝 엎드려 충성 경쟁을 하는 모습은 조금 충격적이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이것이 3대 가문의 힘인가 싶었다.

“하하하. 고맙소. 얼마나 더 살까 싶기는 하지만, 사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여러분과 어울리도록 하겠소이다.”

당장 생일을 맞은 것이 유론이 아니라 막시밀리언이었다면 어땠을까. 인파야 지금 이 자리와 비슷하게, 어쩌면 더 모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열렬하게 환호하는 분위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과시를 하고 싶은 건가.’

살라스도, 모페이브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야기 했었다. 피차간에 편한 사이도 아닌데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거나 서신을 이용한 것도 아니고, 굳이 직접 찾아와 초대를 한 것은 꼭 와줬으면 좋겠다는 의사의 표현. 성대하게 준비한 자리에 사령관 대리를 불러 체면을 세우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지금 와 보니 그깟 사령관 대리가 있으나 없으나 그의 체면은 이미 더 세울 것도 없을 정도로 높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

일부러 이런 자리에 초대하여, 자신들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함. 그 이유뿐이지 않겠는가.

“자! 모두들 잔을 드시오! 첫 잔은 모두 함께 하십시다.”

유론의 말에 모두가 잔을 들었다. 흐뭇하게 웃은 유론이 별 다른 말없이 먼저 잔을 기울이니 모두가 그를 따랐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의 눈길이 슬쩍 좌측으로 움직였다. 마시지도 않은 술을 그대로 내려놓는 군터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론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

연회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건만, 정작 주인공은 따로 나와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나머지 3대 가문의 가주들과 군터가 참석해 있었다.

형태는 방이지만 방치고는 너무 넓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회장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그 넓은 공간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는 달랑 그들 네 명 뿐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그러니까 살라스와 할렌, 그리고 3대 가문의 사병들은 바깥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로 따로 자리까지.”

“하하. 군터 공이 시끄러운 자리는 그리 좋아하시는 것 같지 않아 조용하게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번 자리를 마련했소이다.”

연회장에서는 이제 극단까지 등장하여 연극을 하고 있었다. 제법 실력 좋고 유명한 극단이라고 하니 연극이 다 끝날 때까지는 잠잠할 것이라나.

그러나 그런 친절한 설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군터는 이 자들이 자신을 이런 조용한 곳에 불러 하려는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공께서 사령관 대리라고는 하나 유론님은 그리몰드 가의 당대 가주이시자 위글로우의 사무총관이시오. 말씀을 좀 더…….”

올리네이스 가의 가주, 히링이었다. 그는 점잖은 투로 말했으나, 내용을 들어보면 영락없는 나무람이었다. 그것이 군터의 심기를 거슬렀다. 사실 원래 마음에 든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만 합시다.”

“하나만 하자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리몰드 가의 가주인지, 위글로우의 사무총관인지 하나만 하자는 거요.”

하링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론의 얼굴도 조금은 불편해 보였다. 태연한 것은 하이글렉이 유일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과자를 씹었다.

“군터 공. 내 그대를 직접 청하고, 이렇게 따로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숨기는 것 없이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오.”

“하시오.”

유론의 얼굴이 허탈함에 물들었다. 군터는 그의 오해를 덜어주기 위해 다시 입을 떼었다.

“난 배운 것도 없고, 경험한 것도 적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말을 타는 것과 싸우는 것뿐이오. 그러니 그대들처럼 말을 친절하게 잘 하지도 못하오. 그대들이 나와 터놓고 말을 하고 싶다면, 좋소. 얼마든지 하시오. 난 딱히 개인적으로 그대들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소. 하지만 난 사령관님의 뜻을 받들 뿐이오. 그러니 내게 말을 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소이다.”

없는 말주변으로 최대한 길게 풀어내자 굳어졌던 유론의 얼굴도 다시 풀어졌다. 그는 평정심을 되찾은 듯 다시금 본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공께서 사령관의 충직한 수하임은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는 사령관이 가장 아끼는 심복이자 그의 오른팔이 아니오.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는 사령관과 커다란 사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소. 그러니 특별히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멀지도 않은 사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사실 관리와, 아니. 호족 가문의 수장과 도시 사령관의 사이는 그 정도면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오. 공의 생각은 어떻소?”

“글쎄. 솔직히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보다는 관심이 없다.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실한 군인이시군. 좋소. 좋아. 진심이라는 걸 알겠소. 하지만 우리 내친 김에 조금만 더 솔직해집시다. 사령관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대는 흔히 세간에서 3대 호족 가문이라 하는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부인하진 않겠소.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시오. 사령관께서 명하시지 않는 한, 내가 독단으로 움직여 그대들을 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공이 생각하는 우리보다, 실제 우리는 더 크다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

“그대는 힘이 있소. 때문에 그대가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라 해도 우리는 긴장해야 하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이제야 이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 것 같았다. 군터는 이제까지의 무뚝뚝한 표정을 풀고 냉소를 머금었다.

“사흘 전의 일을 말함인가. 죽어야 할 버러지들이 몇 죽은 것에 왜 그리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를 못 하겠소.”

“시궁창이 지저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고, 가지 않아도 될 곳에 가서 진창에 발을 담구고, 그러고서 더럽다 하는 것은 지극히 불필요한 일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곳은 위글로우요. 이 도시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삶이 있고, 규칙이 있소이다. 그것을 조금 더 존중해주셨으면 하오.”

“위글로우는 제국의 도시오. 제국의 땅에서 제국의 법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 외에 다른 건 필요 없소. 제국의 법도에 따라, 위글로우를 통치하는 건 오직 사령관이신 막시밀리언님 한 분 뿐이오. 규칙을 정할 자격이 있는 것도 오직 그분뿐이지.”

누구 하나 언성을 높인 이는 없었다. 하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언성을 높이고 거친 욕설을 주고받은 것보다도 더 차갑게 변했다.

“할 말 다 했다면 난 이만 일어나겠소.”

군터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유론을 비롯한 세 사람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침묵을 깬 것은 하이글렉이었다. 연신 과자를 우물거리던 그는 더 이상 집어먹을 과자가 없자 혀를 찼다.

“엄청나게 완강하군. 저 정도면 고지식한 정도를 넘어선 것 같은데.”

“공신명부에 이름이 적힐 정도로 큰 공을 세워 천인장이 되었습니다. 자부심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오만한 작자군요.”

“뭐,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듣기로 한 전투에서 백 명의 목을 베었다 하던데.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목 따위 언제든 벨 수 있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쯧! 짓궂기는. 그쯤 하게나 하이글렉.”

“흐흐. 과자 맛이 좋은데, 더 없수?”

낯빛을 굳히고 있던 히링이 헛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그릇을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것을 냉큼 앞으로 끌어온 하이글렉이 다시금 과자에 손을 뻗었다.

하이글렉이 과자를 탐닉하느라 빠지니, 자연스럽게 대화는 유론과 히링이 이어갔다.

“어찌해야 할까요. 말로 해서는 알아듣지 못할 자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따로 손을 쓰자니 사령관의 눈치가 보이고.”

조금 전 군터가 있을 때 유론이 말한 것이 그들의 속내 그 자체였다. 그들은 젊은 사령관과 척을 질 생각도, 그렇다고 가까이 붙어 그와 같은 말을 탈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적당히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모양새였다.

다행히 애송이 사령관은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그는 적당히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받아갈 것은 받아갈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합리적인 사내였다.

그런데 그의 심복이라는 작자가 문제였다.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것 같다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킨다. 그것은 군인답다거나, 할 일은 똑바로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글로우를 손 안에 쥐고 주무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영 달갑지 않은 행동이었다.

고른 평지에서는 땅과 수직으로 서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경사가 있는 언덕이나 산에서는 기울어 선 것이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위글로우에는 위글로우의 규칙이 있다. 3대 가문이, 오랫동안 힘이 있던 자들이 만들고 유지해온 규칙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작자가 잘못되었다 트집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제일 쉬운 방법이 실패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간단한 일이네. 내어줄 건 내어주고, 받을 건 받고. 그러면 되는 일이 아닌가.”

“사령관이 어서 돌아오길 바라야겠군요.”

하이글렉이 클클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 사이 저 자가 잠잠하게 있어주기도 바라야지. 그렇지 않소?”

어린 아이처럼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하이글렉을 보며 유론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길 바라야지.”

========== 작품 후기 ==========

미세먼지가 또 심해졌는지 하루종일 목이 아프더군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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