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군터의 저택도 위글로우에서 굉장히 넓은 축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그리몰드의 것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3대 호족 가문은 그야말로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위글로우의 유지였으며 권력가였다. 본래 사람이나 집단이나 힘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힘을 가졌음을 외부에 보여주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사는 집을 으리으리하게 짓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몰드의 저택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픈 그들의 욕구를 충실히 반영했다고 할 수 있었다. 족히 수백이 훌쩍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음에도 넉넉하다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말이다. 저택이 차지한 부지의 크기도 크기고, 건물들 하나하나가 허투루 지어진 것이 없었다.
“어마어마하군요.”
그러나 그런 저택보다도 어마어마한 것은 저택 안팎에 바글거리는 인파였다. 무슨 시장바닥 한복판을 보는 것 같은 광경. 그러나 그와 다른 것은 저 우글거리는 이들의 옷차림이 하나같이 꽤 그럴싸해 보인다는 점이다. 즉, 저들 모두가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할렌이 혀를 내두르자 살라스가 말했다.
“위글로우에서 장사하는 이들치고 3대 호족 가와 어떤 식으로든 연이 닿지 않는 이들이 없다 하더군요. 처음 들었을 때는 과장이려니 했는데,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도시 내에 자신의 점포를 가지고 장사하는 이들을 다 합쳐도 저 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저 수백의 인파에는 상인은 물론이고 관리와 그 외 힘 있거나 돈 있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저들 모두와 인사 한 마디씩 나누는 것만 해도 고역이겠군요.”
“그럴 일 없을 거다. 저들 중 유론과 마주보고 인사할 만한 이는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테니까.”
“예? 어째서요?”
“올려다봐야 커 보이는 법이지 않느냐.”
할렌은 살라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터 역시 그의 비유를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개나 소나 다 상대해주면 체면이 손상된다는 거겠지.’
아무나 다 상대해주면 쉬워 보일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수의 몇몇만 직접 상대해주면 그 상대해주는 몇몇에게는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다는 식의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몇몇은 더욱 그리몰드 가문과 유론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될 터. 기초적인 용인술이다.
‘자신의 생일마저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가.’
세간에서 하도 명망 높은 호족 가문이라고 떠들어대니 뭔가 특별하게 봐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까놓고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그들도 그냥 장사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차이점이라면 직접 물건을 팔거나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정도? 허나 그들이 움직이는 기저에 깔린 사고는 상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챙길 수 있는 잇속 계산에만 철저히 골몰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단해 보이고 조금은 부럽기도 하던 으리으리한 저택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우습게까지 보였다. 저 저택도 결국은 남들에게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애틋한 허영심과 자기기만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피식 웃은 군터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라스와 할렌이 좌우의 뒤편에서 그를 따랐다.
*
우적우적
흉터가 가로지른 입술이 쉼 없이 꿈틀거렸다. 육즙이 살살 흘러나오는 고기 요리가 이따금씩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이거 맛 좋은데?”
“거…대장. 우리 좀 사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옆에 있던 그의 부하가 슬쩍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우리도 정당하게 초청장을 받아서 온 건데 몸 사릴 이유가 뭐가 있냐.”
“그렇기는 하지만…크흠. 아무래도 우리가 눈길 끌어서 좋을 건 없잖수. 군부 인사들도 꽤 올 게 뻔한데.”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딱히 당장 눈앞에서 잘못을 저지른 건 없어도 그들의 일이 일이다 보니 괜히 마음이 불안해지고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다.
“네가 겁쟁이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대범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이런 곳을 왜 온 거요?”
“장사를 하려면 먼저 터를 봐 놔야지. 기본 아니냐.”
그러면서 그는 또 한 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 쥔 것은 가느다란 나무 꼬치에 꽂힌 야채와 과일 요리였다.
“음! 이것도 훌륭하군. 너 정말 안 먹을 거냐?”
“…대장이나 많이 드쇼. 난 지금 먹었다간 체할 것 같아.”
“쯔쯔! 허약한 놈 같으니.”
소심한 부하를 보며 혀를 찬 그는 굵은 과일 한 알을 쏙 빼먹었다. 입 안에 남아있던 고기의 느끼함이 달콤한 과즙으로 싹 씻겨나갔다. 그는 흡족한 표정을 한 채 부지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꼬치를 내려놓으며 씹고 있던 과일도 대충 목구멍으로 삼켰다.
“잠깐 여기 있어라.”
“어디 가쇼?”
부하의 물음에 답도 않고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과일을 만지면서 묻은 물기가 있어 쉬이 손길 가는 데로 쓸렸다.
“저, 혹시 부코님 아니신지?”
“음? 맞소만…그대는?”
암적색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든 채 주변을 둘러보던 배불뚝이 중년인은 느닷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모르는 얼굴의 사내에게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내는 오는 길에 바지를 문지르며 깔끔하게 물기를 제거한 손을 내밀었다. 적당히 공손하고, 적당히 힘 있는 동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겔이라고 합니다. 부코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일전에 어깨너머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배니긴님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였지요. 실은 그때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당시에는 너무 바빠 보이셔서 그냥 나왔었습니다.”
“아아…그랬소? 미처 몰랐군.”
아는 이름이 나오자 일말의 경계심도 누그러진다. 애초 이것을 노리고 그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바글거리는데 혼자 있으면 자신감이 떨어지니까 말이다. 그럴 때 다가와 말 걸어주는 이는 과장 좀 보태서 은인처럼 보이는 법이다. 물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혼자 고독을 씹는 것을 낙으로 아는 부류도 있기는 하겠지만 부코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있는 것. 더 정확하게는 초라하게 있는 것을 못 견뎌하는 부류다
“그런데 난 왜 그대 같은 자를 못 봤는지 모르겠군.”
부코가 그를 보지 못한 건 당연하다. 왜냐면 그는 그 자리에 간 적이 없으니까.
“바빠 보이시더군요. 주변에서 계속 말을 거는데 저 같은 자가 눈에 들어오셨겠습니까.”
“하긴, 그때는 정말 정신없었지. 어찌나 말들을 걸어대는지 그날은 목이 타서 물 몇 번 마신 것 말고는 제대로 음식을 먹어보질 못했어.”
미겔은 자신이 얼마나 인기인인가를 강조하는 부코의 자랑을 웃는 낯으로 계속 들어주었다. 일방적으로 떠들고,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비정상적인 대화가 끊긴 것은 장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면서였다.
“뭐지?”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부코가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미겔은 소란이 이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던 차였다.
“왔군.”
“나는 안 올 줄 알았다네.”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나? 듣자하니 유론님께서 직접 초청하셨다더군. 면전에서 당사자에게 초대를 받고 응하지 않는 것은 심한 모욕이지 않은가.”
“그래도 그 자라면 언제나 자기 내키는 대로 할 것만 같아서 말이야. 며칠 전만 해도 백주 대낮에 사람의 목을 베어 광장에 내다 걸지 않았던가.”
“그거야 이유가 있었지 않은가.”
“모르지. 그 이유라는 것도 그 자 측에서 내놓은 것이니. 그저 길을 걷다 자기 기분에 거슬려 죽인 것일지 누가 알겠나.”
“쉿! 이제 그만 하게. 내 듣자하니 그자는 백보 바깥의 말소리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듣는다더군.”
“그 소문은 나도 들었네만, 에이, 설마하니. 정말로 그러면 그게 사람인가?”
“혼자서 백 명을 베어 죽이는 건 그럼 사람인가?”
“…….”
거기까지 들은 미겔은 그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굳이 이름까지 듣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아는 데는 충분했다.
‘소문의 그 일당백인가.’
혼자서 말을 타고 달려가 수백이 지키는 적장의 목을 베었다던가. 그러고 나서 또 곧장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움직여 총대장까지 죽였다. 그 와중에 직접 죽인 적병의 수만 백에 달한다고 했다. 믿기 힘든 소문이지만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떠들어대는 말이고, 말레이드에서 온 자들이 증언까지 하니 소문의 신빙성은 이제와 의심하는 자가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사령관의 오른팔. 지금은 자리를 비운 사령관을 대리하고 있다더니.’
저 뒤에 혼자 남아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을 녀석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돌아가자고 난리를 쳤겠지.
“뭐야? 무슨 일이지?”
눈치 없는 배불뚝이가 아직도 상황파악 못하고 연신 두리번거렸다. 미겔은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 알려주었다.
“군터님께서 오셨나 봅니다.”
미미하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부코의 자그마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들어설 때와 다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가득 들어차 있던 인파가 그의 앞으로 깔끔하게 갈라졌다. 재빨리 길을 트는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군터는 생일잔치에 오는 사람답지 않게 평시와 다를 바 없이 무장을 하고 온 상태였다. 크기가 큰 칸젤은 두고 왔지만 허리춤의 검은 차고 왔다. 입구를 지키던 사병들이 얼굴 가득 곤란함을 띄운 채 무기는 두고 들어가시면 안 되겠느냐 물었지만 군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병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대신 살라스와 할렌은 순순히 검을 맡겼다. 그들 역시 군터와 마찬가지로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군터님.”
회장에 들어서고 몇 걸음 떼었을 때. 한 사내가 부하 대여섯과 함께 다가왔다. 입구를 지키던 사병들과는 한 눈에 봐도 차이가 있는 자였다. 무장의 수준부터 체구, 기세까지 말이다. 척 보기에도 제법 지위가 있어 보였다.
“송구합니다만 이곳에 계시는 동안 검은 저희에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기쁘고 즐거운 자리에 무기를 반입하심은…….”
“소개부터 해라.”
군터와 그의 시선이 뒤엉켰다. 그는 큰 키였지만 군터보다는 조금 작아 군터가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군터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얕잡아보는 것처럼 보였다.
지켜보는 이들도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라면 당사자가 역시 마찬가지다. 사내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감정이 상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그리몰드의 저택을 지키고 있는 카델리즈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귀에 익었다. 아마 이 카델리즈라고 하는 자가 그리몰드의 사병대장일 확률이 높았다. 그 정도도 되지 않는다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자의 이름 따위가 귀에 익을 리 없겠지.
“다시 말씀드리자면, 가지고 계신 검은 저희에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너희도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저희는 저택과 회장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몸은 내가 지킨다. 또한, 무인이 자기 무기를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그리몰드의 체면은 내 부하들의 검을 거두어가게 둔 것으로 충분히 세워주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안 그래도 굳어있던 카델리즈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변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군터의 시선을 맞받았다. 두 무인의 기세가 서서히 크기를 키워가는 순간, 뒤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카델리즈. 그 이상 군터 공에게 무례를 범하지 마라.”
“가주님.”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자 그리몰드의 가주인 유론이었다. 그는 고개 숙이는 카델리즈를 지나쳐 군터의 앞에 섰다.
“부리는 수하가 무례를 범했소.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려던 것이니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딱히. 괜찮소.”
“하하. 이름난 호걸답게 마음도 넓으시구려. 이쪽으로 오시오. 자리가 준비되어 있소이다.”
차갑게 굳어가던 장내의 분위기는 유론이 등장하면서 한 순간에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는 군터를 앞에서 안내하며 마치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겠다는 듯 시종일관 여유로운 기색을 내비쳤다. 좌중의 시선은 어느새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조금 전의 마찰에 대한 기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작품 후기 ==========
사람이 모여 사는 존재인 이상 라인타기는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