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46화 (146/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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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는 학식이 얕았다. 무술 전반이나 전투에 관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했다. 괴상한 소리만 가득한 책을 수백 권 이상 읽은, 정치의 한복판에서 닳고 닳은 이들과 크고 작은 일들을 논할 주제가 못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 회의 때마다 빈 상석 앞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 귀만 열어두는 것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만약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이려 했다면 머리 아플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이야기라고 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았다. 막시밀리언의 대리로 있는 이상 최소한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었다. 사령관 대리로서의 책임감이라고 할까.

“후우.”

오늘도 그는 머리에 안개가 잔뜩 낀 채로 집으로 돌아와 갑옷을 벗었다. 뒤따라 들어온 모페이브가 공손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제법 자세가 나오는 것이, 누가 보면 시종 일을 몇 년은 한 줄로 알리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그래. 고생이라면 고생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첫날에 비하면 이제는 그래도 익숙해진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웠다. 그저 자리를 지키며 안건에 대해 듣고, 그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것뿐인데 말이다. 잉크쟁이들이 워낙에 혓바닥을 매끄럽게 굴리는지라, 끊어야 하는 말도 계속 듣게 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교묘한 말장난은 기본이고, 복잡하게 얽힌 이익관계를 은밀히 숨기는 수작들도 예사였다. 문제는 그걸 알아차려도 따로 탓할 수 없게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이들 중 왼쪽 편에 위치한 이들은 하나 같이 뱀이었다. 오른쪽 편은 곰이나 멧돼지고. 곤혹스러운 것은 압도적으로 전자지만, 후자 역시 편한 것은 아니었다. 뭐만 하면 들이받으려고 하니까 말이다. 일방적으로 편을 들 생각이라면 모르지만, 중재자로 있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쪽도 그저 난처할 뿐이다.

덕분에 엊그제는 미트라스가 와 치안유지군 숙소 신축 안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군터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차마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긴 술자리로 그를 달래어 돌려보냈다.

“이런 자리는 내겐 어울리지 않아.”

“하고픈 것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확실히 눈치 싸움 같은 것은 대장님께 어울리지 않지요.”

모페이브는 저택의 집사로 일하고 있음임에도 여전히 군터를 대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가 고용인이 아니라 수하로서 군터의 밑에 있음을 뜻했다.

“맞다. 내가 무식한 것도 무식한 것이지만, 한 번 회의장에 들어설 때마다 심력이 고갈되는 것 같아. 그런 것은 전장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몸에는 힘이 넘치건만 정신이 피로해지니 몸도 덩달아 처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적응하셔야 할 겁니다. 백인장이셨을 때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되지만 그 위부터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특히 대장님께서는 사령관을 따르고 계시니…앞으로 이런 일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겁니다.”

모페이브의 말은 군터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신경 써야 할 것은 더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어찌 보면 출세에 따른 대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별로 달가운 말은 아니군.”

막연하게 출세를 바랐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그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십인장일 때 그렇게 씹어댔던 탐관들은 지닌 권세로 마냥 쾌락을 탐닉하는 것 같았는데, 어째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뭐, 사실 책임감 같은 것만 버리면 비슷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역시 그러고 싶지는 않다.

‘편히 놀고먹을 운명은 안 되나 보군.’

그가 옷을 갈아입으며 싱거운 상념에 잠겨있는데, 문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페이브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준비하오리까?”

“물론. 곧 가겠다.”

위글로우에 자리를 잡은 뒤로 군터는 틈틈이 모페이브에게 술법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이론 지식은 물론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기초적인 술법까지 배우려는 계획이었으나, 아직까지 그의 적성에 맞는 술법을 찾지 못해 이론을 배우는 데 머물고 있었다.

“화기석(火氣石), 수기석, 그리고 그 외에도 흔한 기석은 다 사용해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희귀한 녀석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술사의 자질을 갖춘 자는 대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술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 적성이라는 것은 무술에 재능이 있다거나, 글을 읽거나 쓰는데 재능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었다. 모페이브는 술사로서 재능이 있어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속성을 찾지 못하고 맞지도 않는 술법을 억지로 사용하며 술사입네 하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못해서 남에게 술사라고 말도 못하는 술사 아닌 술사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군터의 처지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보통의 술사들이 다년간에 시행착오를 걸쳐 진행하는 과정을 비싼 기석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뛰어넘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러나 천인장이 되면서 더 이상 돈에 구애받지 않게 된 군터로서도 이 기석이라는 놈들을 사서 쓰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일전에 모페이브가 술법을 배우려면 시간도 시간이고 노력도 노력이지만 돈도 상당히 들 것이라 했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기석을 사들이며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돌멩이의 값이 무려 금화 두 닢이었다. 그마저도 싼 것이 그렇고, 매물이 희귀해 값이 비싼 녀석들은 그 배 이상 나가기도 했다. 거기다 돈이 있다고 해서 바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석이라는 것이 그리 비싼 만큼 귀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구매를 약속하고 약간의 선금까지 쥐어주어야 했다. 돈을 떼먹지 않을 신용 있는 상인을 고르는 것도 일이었고, 그렇게 신용 있는 상인에게 일을 맡겨도 끝내 물건을 구해오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번에 준비한 물건은 사기석입니다.”

“사기석이라.”

사기. 즉 죽음의 기운이다. 군터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일전에 말레이드에서 반군과 대치할 때 사교도가 부리는 사령술에 적잖이 고생을 한 경험이 있었다.

“이 자그마한 놈이 금화 다섯 닢짜리라니.”

사기석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옅은 회색빛이 감도는 돌이었다. 손이 큰 군터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회색빛이 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자그마한 돌 하나가 자그마치 금화 다섯 닢이었다. 그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가격이다.

“사실 사기석은 그리 귀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뭉쳐 있는 곳에 종종 생겨나지요. 다만 그런 장소는 보통 사람이라면 꺼리기 마련이다 보니…….”

“무덤가라도 뒤질 걸 그랬나. 몇 곳을 뒤져도 금화 다섯 닢보다는 훨씬 싸게 먹혔을 것 같은데.”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에 모페이브가 헛웃음을 지었다.

“흔하다고는 말씀드렸지만 그렇다고 또 그렇게까지 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모페이브는 사실 기석들 중에서도 사기석은 수요가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기석이라는 것이 지금 군터가 하는 것처럼 술법 적성을 알아보거나 혹은 촉매제 역할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기석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수요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령술 자체가 제국에서는 터부시 되는 상황이니만큼, 사령술에나 필요한 사기석을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사겠는가? 바라는 이가 없으면 굳이 죽음이 넘실대는 곳을 뒤지고 다닐 이들 또한 없을 수밖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군터는 모페이브가 준비해놓은 주술진 위에 편한 자세로 앉아 사기석을 받아들었다. 이미 몇 차례 경험한 것이므로(비록 허탕을 치기는 했지만) 익숙한 과정이었다.

먼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사기석 내에 뭉친 기운을 인지한다.

기석이란 것은 말 그대로 자연의 기운이 뭉친 돌이다. 기가 응집하고 응집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것이 기석이다. 그러므로 지금 군터가 한 손에 가볍게 쥐고 있는 사기석은 죽음 그 자체였다. 사기석이 비싼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기석이라는 것은 기운이 단단히 응집한 것이지만, 때때로 뭉친 기운 중에 일부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화기석이라면 불이 붙을 것이고 수기석이라면 축축하게 젖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석이라면? 죽음이 흘러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누차 말씀드렸지만 주의하셔야 합니다. 혹여 사기가 몸에 스며들기라도 하면 아무리 대장님이라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할 수도 있다. 생기 넘치던 살이 괴사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지만, 생기가 사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생명을 가지고 숨 쉬는 존재들에게 사기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기피할 수밖에 없는 기운이다.

“…….”

모페이브가 경고했지만 군터는 그의 경고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깊이 집중하여 손 안에 쥔 사기석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모페이브에게서 사기석을 받아들었을 때부터 이미 전과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얇은 껍질 안에 응어리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이건가.’

일전에 말레이드에서 사교도의 사령술을 접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묘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사기석을 손에 쥐고 있으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칸젤과 비슷하군.’

뭉쳐 있던 기운이 실타래가 풀리듯 부드럽게 흘러나와 그의 손을 휘감았다. 그러나 결코 피부에 닿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사기라는 것은 죽음의 힘. 생명을 지닌 존재가 죽음을 다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천만한 일. 때문에 경지를 이룬 사령술사도 직접적으로 죽음을 다루지는 못하고 여러 형태로 변형시켜 사용한다…라고 모페이브가 설명해준 바 있었다. 그러나 군터가 사기를 몸에서 떨어뜨린 것은 그 설명을 떠올려서는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조절이었다.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살을 가져다 대지 않듯, 끝도 없이 풀려나오는 아지랑이에 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천천히 풀려나오던 실타래가 끝이 났다. 응어리졌던 것이 모조리 풀려 손과 팔 주변에서 휘돌고 있었다. 그 즈음에서 군터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흐릿한 회색빛이 그가 눈을 감고 느꼈던 대로, 손과 팔 주변을 느릿하게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찾은 것 같군.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모페이브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껄끄러움과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꼭 하필이면 사기냐고 말하는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군터도 사기석 같은 것에 눈길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속성들에 적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는 수 없이 비주류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의 적성이 사기에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도 사교도 출신이면서 사령술이라고 껄끄러우냐?”

“그게 아니라…세인들이 알게 된다면 큰일을 겪으실 수도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너와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

군터는 술법을 익혔다고 해도 술사로 행세를 하거나 남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술법을 배우려는 이유는 첫째로 그의 삶에 다가온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더 나아지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다소 이상한 말일 수 있으나 정말로 그랬다. 술법이라는, 이제껏 멀게만 느껴졌던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걸로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가지고플 뿐.

“사령술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그리 없습니만…그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마.”

군터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의 손을 맴도는 희끄무레한 회색빛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작품 후기 ==========

군터가 세운 공적에 비해 포상이 별로인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면 하지만 세운 공만큼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설 속 세계관에서는... 뭐, 여러모로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군터가 막시밀리언 밑에서 천인장이 된 것도 막시밀리언의 덕을 보았다 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독자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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