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위글로우에는 여러 호족 가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 명문, 그러니까 가장 힘 있는 가문을 꼽으라면 세 곳을 들 수 있다. 그리몰드, 트라벤, 올리네이스가 바로 그 세 곳인데, 이들의 역사를 되짚으면 베이고르 왕국이 바크렌을 통치하던 백여 년 전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가문 명 역시 베이고르 왕국 시절부터 쓰던 것으로, 그들의 고귀한 혈통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베이고르가 몰락하면서 이들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베이고르가 멸망하고 바크렌이 제국의 치하에 들면서 이 세 가문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가산을 다 털다시피 하며 정복자들에게 자비를 빌었고, 스스로 귀족의 신분을 버렸다.
물론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베이고르의 유력가였다면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작은 지역에서만 귀족입네 하고 위세를 떨치는 정도의 가문에 불과했다. 베이고르가 건재할 당시에 그것은 그들의 치부였으나, 우습게도 그 때문에 그들은 살 수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잃고, 가산도 소진한 그들은 제국의 치하에서 재기를 꿈꿨다. 비록 신분과 재물을 잃었다지만 그들은 여전히 위글로우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그들은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가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지. 그렇지 않은가?”
수십 명이 둘러앉아도 남음이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원탁에는 단 세 명이 자리했다. 입을 연 것은 그 중 한 명. 하얗게 머리가 센, 미트라스와 언쟁을 벌인 바 있는 노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유론으로, 그리몰드 가의 당대 가주였다. 베이고르 왕국 시절이었다면 그의 이름은 그리몰드 유론이었겠으나, 그의 가문은 이미 백여 년 전에 귀족의 신분을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론이었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라니. 뜬금없구려.”
푸짐한 체구의 사내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하이글렉. 트라벤 가문의 가주였다.
“글쎄. 나이가 먹어 그런가 보이. 자꾸만 옛 생각이 나는구만. 내 조부께서는 어린 나를 앉히시고 누누이 말씀하셨었지. 반드시 가문의 이름을 되찾아야한다고 말이야.”
유론이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얼굴로 말하자 이번엔 마지막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길 가다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평범한 인상의 사내. 이제 갓 마흔이나 됐을까 싶은, 이곳에서 제일 젊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히링. 올리네이스 가문의 가주였다.
“제 아버님께서도 제게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었지요. 반드시 네 대에서 가문의 숙원을 이루라고 말입니다.”
“허허. 그랬을 것이야. 참으로 호기가 넘치는 친구였으니까 말이지. 그 친구가 그렇게 어이없이 가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
“저 역시 몰랐습니다. 병마에는 장사가 없더군요.”
“그래. 그렇지…….”
한순간에 몰락하다시피 한 세 가문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이 위글로우에 지니고 있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같은 고난을 겪은 그들이 서로 합심하여 노력한 탓이 컸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청하고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서로의 가문과 혼인을 맺어 혈연을 구축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이익사업에 함께 참여하는 것도 예사였다. 그들은 그렇게 힘을 길러왔다. 그 세월이 근 100여 년에 이르니, 이제 그들은 서로가 친구요 가족이었다.
“아, 정말. 꿀꿀한 옛 이야기만 계속 할 거요? 그럼 나 먼저 일어나오?”
하이글렉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진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옛날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의사 표현에 불과했다.
유론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네. 알겠어.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중한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대화는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당사자들이 서로 친한 탓도 있었고, 근래에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는 탓도 있었다.
“노예들이 하루에 서너 놈씩은 죽어나가니 부족하지 않게 밀어 넣는 것이 일이오. 노예를 구하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만, 구한 노예들이 계속해서 안 보이면 아무래도 말이 나오기 쉬우니까.”
“입단속이라는 게 가장 귀찮은 일이지. 하지만 성가시더라도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하네.”
“그러고 있소. 여러 군데에서 돌려 들여오고 있지. 전쟁 덕분에 여기저기 넘쳐나는 게 갈 곳 잃은 피란민들이지 않소?”
“그래. 뭐,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다음은 히링의 차례. 그는 아리따운 시비가 내온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비싼 돈을 주고 온 장인들은 다행히 제값을 하고 있습니다. 제 눈으로 보기엔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시험 삼아 풀은 물량이 살마드의 콧대 높은 여인네들에게 인기가 좋더군요.”
채광한 금광석을 제련하고 금으로 만든다. 이 과정까지만 해도 상당한 이익이 남는 장사지만 그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정말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위폐를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험이기 때문에 감히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계획한 것은 제련한 금으로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고심하여 정한 품목은 장신구였다. 여인들은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사내들은 여인을 위해 돈을 쓰기를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만 있다면 장신구만큼 이문을 남기기 좋은 상품이 없었다.
매끈한 금과 영롱히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는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위글로우의 3대 호족 가문은 사업 계획이 서자마자 황도의 솜씨 좋은 장인을 물색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기술 좋은 장인은 어디서든 대접 받기 마련이고, 거기에 황도의 물을 먹는답시고 비싼 척은 한숨 나올 정도로 해댔다. 거기에 바크렌이 얼마 전까지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지역이라는 것도 장인 물색이 난항에 부딪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그러나 어디에도 길은 있는 것인지, 한 달여에 걸친 수소문 끝에 간신히 장인 몇을 고용할 수 있었다. 도박 빚에 찌들거나, 아니면 여타 이유로 황도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들이었다. 그들 3가문은 막대한 돈과 절대 안전을 약속한 끝에 그들을 위글로우로 데려왔고, 제련한 금과 보석 등을 지원해 장신구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시제품을 살마드의 귀부인들에게 뿌렸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일부러 황도까지 가 장인을 구한 보람이 있었다. 변방의 여인들은 황도의 문물을 우러르는 경향이 강했는데, 특히 장신구라던가 옷가지 등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황도의 기법과 경향을 고스란히 담은 장신구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그거 다행이군.”
“천천히 해야지요. 반응이 좋다고 들떴다가는 미운털이 박히게 될 겁니다. 살마드의 사교계 주변을 어슬렁대는 자들에게 우리는 변경의 촌놈들일 뿐일 테니까 말입니다.”
“바크렌 자체가 벽지인데 다 같은 촌놈들끼리 무슨 또 촌놈 타령인지. 클클클.”
하이글렉이 두툼한 턱살을 쓸며 조소했다. 히링도 빙긋 웃었다.
“뭐 어쨌든, 우리는 그 자들의 앞마당에 나아가야 하는 입장이니까 말입니다. 든든한 연줄이라도 쥐고 있었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누누이 말했지만, 이런 시기에는 자중하는 것이 좋아. 괜히 잘못 된 줄을 잡았다가는 그대로 쓸려나갈 수 있음이야.”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지 아쉬우니까 드는 생각일 뿐입니다.”
현재 바크렌의 정세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황도에서 내려 보낸 새로운 성주와 총독이 각기 세를 규합하고 있고, 리에론 가문으로 대표되는 구 군부와 새로이 배치된 중앙군을 필두로 하는 신 군부가 조용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줄을 대려고 한다면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저 재물을 들고 찾아가면 된다. 위글로우가 비록 그리 큰 도시는 아니나, 어쨌거나 한 도시의 유력가가 먼저 나서서 줄을 대겠다는데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줄을 댄다는 것은 이익 못지않게, 어쩌면 이익보다도 더 큰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한 번 줄을 댔다가 줄을 댄 대상이 몰락이라도 해버린다면 줄을 댔던 이는 한 순간에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자칫 상대 세력의 보복이라도 당하게 되면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위글로우의 세 가문은 한 번 몰락했다가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니 만큼 불확실한 모험은 철저히 지양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구 군부의 파벌에 속한 어린 사령관과도 필요 이상으로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고 있었다. 존재감을 과시하고 사령관이 독단으로 대소사를 처리하지 못하도록 날을 세우고는 있지만 늘 적정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와 함께 금광 채굴 같은 큰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함께 하는 사업이 있는 한, 서로가 서로의 목줄을 쥐고 있는 한은 본격적인 적대 행위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세 가문이 믿고 있는 바였다.
“그나저나 우리 어린 사령관은 살마드에 있는 주인에게 예쁨을 받겠군요.”
“그럴 테지. 얼마나 갖다 바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몫이 적지 않으니 상납 역시 적절히 성의를 표하는 만큼은 하지 않았겠는가?”
“뭐 예정된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부터 군터가 그의 대리를 맡았다고 합니다. 듣자하니 광산에도 들른 모양이더군요.”
“흐. 그 무식한 백정 놈.”
하이글렉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두툼한 턱살이 덩달아 출렁거렸다.
“사나운데다 충직하니, 집 지키는 개로는 딱이지.”
“당분간은 조용하겠습니다.”
기 싸움이라는 것도 사람 대 사람끼리 하는 것이다. 괜히 사나운 개를 자극했다가는 사나운 개가 미친개로 돌변해 이빨을 들이밀 수도 있다.
*
“오셨습니까.”
“흐음. 그래.”
하이글렉은 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맞았다. 그는 그의 비대한 체구를 온전히 받아낼 만큼 큼직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거만하게 고개를 꺾고서 그의 앞에 공손히 선 사내를 흘겨보았다.
“차림새가 그게 뭐냐? 누가 보면 비렁뱅이인 줄 알겠군.”
“그렇습니까. 날이 너무 더워져서 말이지요.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덩치 큰 사내의 옷차림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옷을 입고 있기는 한데, 입은 게 아니라 대충 걸친 것 같이 모양새가 허름했다. 특히 소매는 통째로 뜯겨지다시피 해서 팔이 거의 다 드러나 있었다.
“노예들은?”
“충분히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하이글렉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사내는 두 손을 공손히 내민 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를 확인했는지 칼자국이 가로지른 입술이 슬며시 비틀렸다. 그것을 본 하이글렉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묻는다만, 나중에라도 혹시 문제 될 일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최소 서너 차례 이상 깔끔하게 돌린 물건들만 가져왔습니다.”
“볼 일 다 봤으면 이만 돌아가라. 오래 봐서 좋을 것도 없으니.”
“물론이지요. 그럼 소인은 이만.”
사내는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숙여 인사하고는 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트라벤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의 부하들이었다.
“끝났소?”
“그래.”
사내는 하이글렉에게서 받은 돈 주머니를 부하에게 던졌다.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하들은 그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무슨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수?”
“아니. 그냥…….”
오른쪽 입술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사내가 걸쭉한 가래침을 내뱉었다.
“비린내 나는 돼지 새끼랑 마주보고 있다 보니까 말이지. 썩은 내가 옮겨 붙은 모양이다. 아직도 구역질이 나는군.”
========== 작품 후기 ==========
오타지적 받은 부분은 수정하였습니다. 썩소님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독자분들께도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