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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44화 (144/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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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언이 살마드로 떠났다. 군사도시의 사령관이 주도로 정기 보고를 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직접 움직이는 것은 꽤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드물지만 또 없는 일은 아니라,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때때로 사령관씩이나 되는 인물들이 직접 말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막시밀리언이 움직인 것 역시 나름 이유가 있었다. 바로 파비우스 리에론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전쟁 전에 리에론 가문의 장자였던 파비우스 리에론은 전쟁 막바지에 그의 아버지 윌리스 리에론이 끝내 사망하면서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가주의 사망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나 리에론 가문의 후계 구도는 이미 전부터 확고하게 잡혀 있었기에 그가 새로운 리에론 가의 가주가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파비우스 리에론은 가문의 가주가, 바크렌 군부의 1인자가 되고서 기뻐할 틈도 없이 그에게 닥친 크나큰 시련을 맞이해야만 했다.

초원 야만인의 침공과 때에 맞춘 반군의 대두. 더불어 도처에서 발생한 극심한 혼란은 그야말로 갑작스레 일어난,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전쟁이 벌어졌고, 그 전쟁에서 거의 패전 직전까지 갔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군주 줄카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바크렌은 분명 반군과 초원 야만인의 손에 떨어졌거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크렌 군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리에론 가문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성주와 총독이 일차적으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했다. 그들은 각기 관직을 박탈당하고 황도로 압송되어 갔다. 먼 길을 타고 들려온 소문으로는 막대한 벌금을 내고 극형은 피했다고 하는데, 그 후로는 그들의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끈 떨어진 권력에 관심 갖는 이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여간, 본래라면 리에론 가문 역시 성주와 총독만큼은 아니더라도 참담한 전쟁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살마드 공방전 당시 전대 가주인 윌리스 리에론의 용전과 그가 전쟁 중 얻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음이 참작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흑포장군 아란딜 페레모어가 윌리스 리에론의 전공을 들어 리에론 가문에 대한 선처를 주장함에 따라 리에론 가문은 황도의 중앙정계에 음성적으로 성의를 표함으로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바크렌 군부의 수장이라는 체면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깎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큰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하지만 자리는 보전했다 해도 앞서 설명했듯, 가문의 위신과 군부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황도에서 신임 성주와 총독을 파견하고 새로이 중앙군을 투입하면서 가뜩이나 편치 않은 입지가 또 다시 흔들리고 말았다. 신임 총독의 파견과 중앙군의 투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지역의 관리 중 하나를 뽑아 쓰는 것이 관례인 성주까지 황도에서 내려 보냈다는 것은 황도가 바크렌의 관료들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직접 힘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바크렌 군부의 맹주인 리에론 가문으로서는 더 없는 타격이었다.

허나 그들은 감히 반발은 물론, 불편한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의 결과가 좋았다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었겠으나, 그러지 못했으니 명분은 저 쪽에 있었다. 이제 난처한 처지에 몰린 그들이 해야하며,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집안 단속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말이 좋아 좋지 않다 뿐이지 실은 최악에 가깝지만)는 하나, 그럼에도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이들은 있었다. 특히 제국은 이 패전에 가까운 전쟁으로 체면을 구긴 만큼, 이 전쟁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들의 구겨진 체면이 아예 찢겨나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여 제국은 전쟁 중 공을 세운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포상했다. 시기도 적절하고 명분도 적절했다. 과가 있는 윗대가리들을 가차 없이 쳐내고 그 자리에 이번 전쟁의 공신들을 임명했다. 실리도 챙기고 명분도 세우는 일거양득의 일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아무리 중앙정계라 해도 지방에 이렇게까지 직접적이고 대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겠지만, 최악에 가까운 전쟁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니 거칠 게 없었다. 무엇보다 황제의 직접적인 지시까지 있었다. 황제의 시선과 마음은 남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식들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 대가는 앞서 언급한 대대적인 인사 쇄신. 아니, 격변으로 돌아왔다.

숱한 이들이 쓸려나갔다. 이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수북이 쌓인 나뭇잎이 빗자루에 쓸려나가듯 어깨에 힘 좀 주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비루먹은 망아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얼굴들이 차지했다. 군부는 특히 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새로운 얼굴들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없던 얼굴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전공을 세운다 함은 병사를 이끌고 활약했다는 소리고, 병사를 이끌었다 함은 최소 그럴만한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기존의 세력가와 연결되어 있는 이들이 다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언도 그랬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리에론 가문에 끈을 대고 있었고, 그럭저럭 인정도 받고 있는 처지였다. 나름대로 능력을 보인 바도 있고, 여러모로 쓸모를 입증한 덕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그 위상이 상당히 바뀌었다. 일개 천인장에 불과했던 막시밀리언은 인정할 만한 전공을 세웠고, 그 전공이 제국의 내밀한 사정으로 인해 꽤나 부풀어 오르기까지 했다. 덕분에 막시밀리언은 군부에서의, 바크렌에서의 입지가 흔들리던 차인 리에론 가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군침 도는 인사가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막시밀리언은 리에론 가문의 당여(黨與)였지만, 그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계속 그를 밑에 두기 위해서는 리에론 가문에서도 대우를 해주어야 했다. 막시밀리언이 사령관이 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전공을 세운 젊은 천인장이 한 도시의 사령관 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는 막시밀리언 본인의 수완도 수완이지만, 리에론 가문의 지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한편, 막시밀리언이 이번에 살마드로 향하는 것도 리에론 가문의, 정확히는 파비우스 리에론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겸사겸사 충성 확인도 할 겸, 광산의 일도 직접 보고받고 싶은 것이겠지.”

아무리 막시밀리언이 위글로우의 사령관이라 하나, 대규모 금이 매장된 광산을 혼자만의 힘으로 은폐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때문에 막시밀리언은 그의 상전이라 할 수 있는 파비우스 리에론에게 은밀히 보고를 하고 그의 비호 아래 일을 진행했다. 얼마 전에는 첫 산출된 금을 그에게 따로 보내기도 했었다. 그 양이 결코 적지 않아 파비우스 리에론이 직접 만족했음을 서신으로까지 보낼 정도였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자네가 내 대신이네. 잘 할 것이라 믿으니 사실 걱정은 없어. 다만 노회한 여우들을 주의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막시밀리언은 살마드로 떠나기 전 군터를 불러 그가 없을 때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막시밀리언이 자리를 비운다면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했으므로, 군터는 간만에 긴장의 끈을 바짝 당겼다. 치고받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노회한 정치꾼들을 상대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 상당히 버거우면서도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내려진 책임이자 의무. 따라서 피할 수도, 피할 생각도 없었다.

막시밀리언이 위글로우를 떠난 그 순간부터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대리로서 위글로우의 대소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치(內治), 특히 숫자를 가지고 노는 일들은 노회한 여우들이 관장하다시피 하고, 그는 거기에 간간이 의문을 제기하거나 때때로 제동을 거는 역할만 했다. 대신에 군터는 군부의 일과, 특히 은폐한 금광의 일을 집중적으로 신경 썼다.

“군터님. 직접 이런 곳까지 오시다니.”

광산의 경계 및 통제를 맡고 있던 백인장이 꼬리에 불붙은 짐승마냥 부리나케 뛰어왔다. 군터는 먼지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일별하고 광산 내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상은 없나.”

“현재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호족 가문들에서 보낸 기술자들도 순순한 편이고, 채광작업도 밀리는 일 없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군터는 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문제없이 순조롭다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가장 먼저 ‘현재까지는’ 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 좋았다. 그 한 마디에서 그의 신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은밀한 작업을 하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중함이었다. 신중한 사람은 일을 가벼이 그르치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군터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광산 곳곳을 살폈다. 수행하는 인력은 안내로 붙은 백인장을 제외하면 할렌이 전부였다. 애초 군터는 이곳으로 올 때 병사들을 열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 따로 호위가 필요치 않다고 여긴 것도 있고, 은밀히 움직이는 만큼 대동인력을 최소화한 것도 있었다.

광산 내 굴곡진 좁은 길을 지날 때였다. 군터는 들것에 짐처럼 실려 나가는 노예들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누여져 실려 나가면서도 미동도 않는 것이, 굳이 머리가 깨진 것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시체임을 알 수 있었다.

“노예들이 많이 죽어나가나?”

“아무래도 일이 고되다 보니 그런 편입니다. 보통 하루에 서넛은 죽거나 일을 못할 정도로 다치곤 하지요.”

일을 못할 정도로 다쳤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어차피 이곳에 투입된 노예들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광산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어 없어질 운명이니, 도중에 일을 못하게 된 노예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비정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일처리 방식이다.

“허나 문제는 없습니다. 어차피 노예 공급은 호족 가문들에서 도맡고 있고, 그들은 늘 부족하지 않게끔 노예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곳의 일은 막시밀리언에게도 중하지만 그들에게도 중하다. 이곳의 일이 안겨주는 이익도 막대하고, 비밀이 누출되었을 때의 위험도 그만큼 큰 만큼 이곳의 일에 대해서는 그들 역시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우습군.’

밝은 곳에서는 서로 원수처럼 적대하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이처럼 서로 운명공동체가 되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 군터는 이런 모습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재미있었다.

“으으으으으!”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또 한 명의 노예가 들것에 실린 채 운송되었다. 조금 전 이미 죽어 실려 갔던 노예와는 달리 이번 노예는 아직 살아있었다. 다리가 박살난 것으로 보였는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인지 입에는 지저분한 천 뭉치가 물려 있었다. 물론 아무리 봐도 자의로 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노예의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또한 절망감이 가득했다. 어쩌면 곧 닥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장이 난 물건은 쓸모가 없는 것처럼, 일할 수 없는 노예도 역시 쓸모없다. 그러니 다리가 망가진 노예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

지나쳐가는 노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움직이려 하는데 어두운 얼굴의 할렌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성품 자체가 정이 많은데다, 본인도 노예였던 시절이 있어서인지 이런 광경이 꽤 거북한 모양이었다.

군터는 그저 모른 척했다. 그 역시 이 지저분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뿐이다.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이나 광산에서 죽어나가는 노예들이나 뭐가 다른가? 저 노예들에게 쓸 마음이 있다면 애당초 전장에 어찌 설 수 있었겠는가. 할렌 역시 자신의 옛 시절이 떠올라 저러는 것일 뿐, 곧 이곳의 일을 깔끔히 마음에서 덜어낼 것이다.

========== 작품 후기 ==========

할렌도 벼락출세지요. 노예에서 백인장이 되었으니 군터보다도 더 빠른(?) 출세가도입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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