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넓은 회의장에는 기껏해야 서른 안쪽의 적은 인원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도 널찍한 공간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 서른이 안 되는 인원이야말로 위글로우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중앙의 상석에 앉은 이는 위글로우의 사령관 막시밀리언. 그리고 그의 좌측에는 군터를 필두로 한 무관들이, 우측에는 문관들이 자리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불편한 심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를 낸 것은 군터의 옆에 앉아 있던 천인장, 미트라스였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을 향해 있었는데, 강한 인상의 얼굴이 일그러질 듯 말듯했다. 조금 전 주장한 군비 확충안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군비를 늘릴 때가 아니오.”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트라스가 기어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인의 말이 더 빨랐다.
“본래 위글로우의 시민들은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계를 꾸려왔소.”
“다 아는 얘기를…하여 병사들까지 동원해 논을 개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하오. 사냥할 짐승들의 수는 계속 줄고 있소.”
“그만큼 다시 늘겠지요.”
“그렇겠지. 다만 시기를 확신할 수 없지 않소? 만약 제때 짐승들이 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생계를 이야기한다. 굉장히 중요하고도 설득력 있는 근거다.
그렇다면 무관들 쪽에서는 당장 산맥 너머에 있는 반군 세력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쪽도 중요한 근거다. 반군 세력. 이제는 신 베이고르 왕국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고 있는 이들과는 바로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사이이며, 그 전쟁이 멈췄다고는 하나 멈춘 것이지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글로우 시민들의 생계에 대한 걱정도 뒤로 미룰 수 없는 판국이었다. 식량을 조달해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군사도시라고 해도 결국에는 자체 생산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논쟁은 사실 말장난이었다. 그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어느 쪽의 의견이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 없는 논제에서, 결국 핵심은 양측이 ‘서로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다’였다. 그리 크지도 않은 예산신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사령관과 토착 호족 세력의 기 싸움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긋이 말꼬리를 붙잡으며 설왕설래해야 하건만, 칼자루만 잡을 줄 아는 무부들이 어찌 혓바닥의 유연함으로 문관들을 따라잡겠는가. 하물며 그 중에서도 노회하기 짝이 없는 여우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저 인상이나 구긴 채 씩씩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말이 옳군. 확실히 백성들의 살 길을 틔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잠자코 듣고 있던 막시밀리언이 입을 떼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트라스를 비롯한 무관들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맞은편의 문관들은 대체로 밝은 얼굴을 한 채 다음 안건을 기다렸다.
‘빌어먹을 놈들.’
군터는 회의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입을 연 적 없었다. 입 싸움을 할 만한 말재주가 없기도 하고, 괜히 입을 열었다가 저들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주먹질이라도 할까 싶어 알아서 자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 말을 섞지 않고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도 간간이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맞은편, 조금 전까지 미트라스와 언쟁을 벌였던 노인의 옆에 있는 사내. 푸짐한 체구에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딱 싸움에 이긴 놈이 진 놈을 비웃는 모양새였다.
군터는 눈을 감았다. 상상 속에서 그는 단번에 앞으로 달려가 저 비대한 목을 움켜잡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면 역겨운 웃음은 사라지고 도살장 앞에 선 듯 두려움에 떠는 돼지 새끼 한 마리만 남게 되겠지.
“그럼 다음은…….”
모두가 앉아 있는 가운데 홀로 선 관리가 다음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쾅!
탁자가 충격을 받자 그 위에 있던 음식들까지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래도 힘 조절은 했는지 척 보기에도 고풍스러워 비싸 보이는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취기가 올라온 듯 붉어진 얼굴의 미트라스가 울분을 토했다.
“빌어먹을 잉크쟁이들 같으니! 매번 되도 않는 것으로 사사건건 트집이나 잡고! 그런 주제에 툭하면 시민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자들이 시민들을 수탈해 얻은 재물을 집구석에 산처럼 쌓아둔답니까? 죄다 그 혓바닥을 잘라버리던가 해야지 원!”
군터는 대꾸 없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의 가문 역시 꽤 뿌리가 깊은 호족 가문으로, 그의 집 창고에도 재물이 가득하지 않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미트라스는 천인장 경력으로 따지면 그보다 위였다. 그는 위글로우에서 복무한 지 올해로 4년차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신출내기 천인장이 자신의 옆에 서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물며 상석을 내주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터.
하지만 그는 군터의 공적을 높이 인정했고, 군터가 자신보다 상석에 앉는 것을 용인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꼬박꼬박 말도 높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군터의 공적을 들었다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미트라스는 그만큼 도량이 넓은 사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참지 못하고 폭발할 정도로 ‘잉크쟁이들’과의 싸움은 전장에서 쓰는 뜻과는 다른 의미로 피를 말렸다.
지금 군터가 그의 잔을 채워준 것은 위로의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사과의 의미가 더 컸다. 윗사람으로 대우를 받는 주제에 회의장에서는 입도 뻥긋 안 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직무유기를 저지른 셈이다.
그래도 미트라스는 그에 대해 탓을 하지는 않았다. 그도 군터가 말수 자체가 적고, 말주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군터가 끼어들어봤자 우스운 꼴만 보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하여 탓하는 대신 그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사령관께서는 뭐 달리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그대와 내가 아는 게 다르겠소?”
“공께서는 사령관의 오른팔이 아닙니까. 혼잣말도 들으실 수 있는.”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노골적이다. 역시 술기운이 조금 올라와서 그런 듯했다.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거나.
“난 그저 명하신대로 움직일 뿐. 그분과 다른 이야기를 따로 나누거나 듣지는 않소.”
“그렇습니까…….”
납득한 것인지, 아니면 납득 못해도 그냥 그런 셈 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군터는 술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사실 거짓말이다. 막시밀리언의 의중은 들어 알고 있었다. 미트라스의 말처럼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집안 단속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볍게 움직일 필요 없지. 어차피 이곳에서 우리의 위치는 외인에 불과해.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그르치기 마련이니 관망한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야. 그래도 짖어댈 자들은 짖어대겠지만 말이네.’
위글로우를 한 손에 쥐건, 두 손에 나눠 쥐건, 다시 말해 호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 제국에 속해 있는 이상 그들은 사령관인 막시밀리언의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이 지닌 힘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신출내기 사령관이 함부로 대하기가 힘들 뿐.
‘저들은 내 틈을 노리겠지. 꾸준히 흔들려 들 것이야. 역공을 가하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 그것은 무리이니 진중하게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 상책이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입지는 굳어져갈 테니 본격적인 싸움은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조용하게 있다고 해서 막시밀리언을 가볍게 볼 자는 없었다.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영전한, 그 이름이 공신명부에 적히기 까지 한 전쟁공신이니까 말이다.
하여 막시밀리언은 방관자, 혹은 균형자의 역할로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에 위글로우의 무관들이 군부를 견제하는 호족 세력에게 반감이 깊어져 가는 것은 또 다른 이득이라 할만하다. 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막시밀리언을 지지하는 든든한 축이 되어줄 테니.
*
만취한 미트라스를 보내고, 군터는 칸젤을 들고서 연무장으로 나왔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밤인데도 불구하고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원의 찬바람이 그리워졌다. 남들은 옷을 몇 겹씩 겹쳐 입고도 춥다고 하는 날씨지만 군터는 그 날씨가 시원하니 참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 바람을 맞으려면 이제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겠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 훈련을 했던 새벽 이후로 종일 굳어 있던 몸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우우우-
칸젤이 울고 있다. 덩달아 대기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호응함이 느껴졌다. 그들의 감정이 칸젤을 타고 전해져온다. 또, 그보다는 훨씬 흐리지만 어렴풋이 그 자신의 감각으로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명백한 두려움이다.
몸이 풀려감에 따라 움직이는 속도도 점차 빨라졌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던 군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 주위로 강풍이 일 정도로 사납게 연무장을 누볐다.
쿵!
무겁게 내딛은 발이 연무장 바닥을 내리 찍자 둔중한 굉음이 일었다. 연무장이 저택 구석에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잠들어 있는 이들을 깨워버렸으리라.
파앗!
벼락처럼 내지른 칸젤의 창극이 머릿속에 그린 얼굴 없는 적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살을 뚫고 뼈마저 찢어버린 창날은 허공에서 멈췄다.
짝짝짝!
군터는 뒤편에서 들려온 박수소리에도 따로 반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찌르기 전부터 연무장에 가까워져 오는 기척을 느낀 탓이다. 그 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한 번 어울리겠느냐?”
“제가 어찌.”
“나는 맨손으로 하마.”
자그맣게 한숨소리가 들렸다.
“너무하시는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피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올라와라.”
연무장 위로 올라온 살라스가 손에 쥔 것은 연무장 옆에 진열되어 있던 목검이었다.
왜 목검이냐 탓하지는 않았다. 군터는 자신감과 만용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럼…….”
“전력을 다해라.”
목검을 쥔 살라스와 주먹을 움켜쥔 군터가 맞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군터는 마지막에 얻어맞은 목옆을 주무르며 무릎을 꿇고 복부를 움켜잡은 살라스를 내려 보았다.
“실력이 늘었구나.”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뻗은 마지막 순간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실전이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물론 살라스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굳이 따지자면 무승부라 할 수 있다.
“크윽. 매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휘두르는데 실력이 늘지 않으면 안 되지요.”
“노력의 티가 난다. 나보다 낫구나.”
이제 좀 괜찮아졌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킨 살라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나날이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다. 매일 새벽과 밤마다 혹독한 훈련을 거듭하니 몸의 기운이 더 좋아지면 좋아졌지 쇠할 일은 없다. 하지만 육체의 힘과는 별개로, 긴장감 없는 나날들을 보내며 마음이 무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전장에 있을 때가 더 나았군.’
아마 남들이 이런 그의 생각을 안다면 욕할 것이다. 원하는 것은 뭐든 누릴 수 있는 위치에서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주제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분명 그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 아침잠이 덜 깬 벨리사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고, 보리스의 재롱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피 냄새를 맡으면서 쪽잠을 자고, 종일 신경을 칼 같이 갈아두던 때가 가끔씩 떠올랐다. 왜 그런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소설 관련 사이트들이 많네요. 추천글을 올려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날이 좀 풀린 것 같아서 간만에 조깅 한 번 나갔다가 찬바람 된통 맞고 또 감기 걸릴 뻔했네요. 독자분들께서도 모두 건강 유의하세요.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