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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42화 (142/1,064)

<-- 2부 -->

이틀의 휴가 동안 군터는 가족들에게 충실했다. 평소에는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평소에는 아침부터 등청하여 천인장으로서의 일을 해야 했으니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 즈음부터였다. 때문에 군터는 자신을 볼 때마다 매달리는 보리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대충 일을 하고 일찍 집에 들어온다거나, 아예 그의 저택에서 나가지 않고 편히 쉬면서 업무를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위글로우의 실질적인 2인자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면전에서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군터는 그리 하지 않았다. 면전에서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귀찮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있기 때문이다.

칼 대신 입을 놀리는 이들. 그들은 굉장히 성가시고 귀찮은 이들이었다. 무슨 사안이 있다 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데, 그 트집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틀리지 않아 수긍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더 짜증나는 것은, 그들이 그저 관청에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위글로우의 유지였고 권력자였다. 그들의 저력은 막시밀리언조차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극성스러운 놈들.’

막시밀리언은 위글로우에 부임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들과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뭐 서로 작정하고 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기세 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치기 어린 사내놈들끼리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위글로우의 권력자들끼리 주도권을 놓고 겨루고 있는 것이다. 다만 피만 뜨거운 사내놈들의 자존심 싸움과 다른 부분은, 권력자들의 기 싸움은 다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금이라.’

위글로우로 부임한 초장부터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막시밀리언과 호족 세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서로의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은 우습게도 금맥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본래라면 금광이 발견되었다면 우선적으로 주정부에 보고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정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해당 지역을 방문하고 조사한 바를 보고서로 기록하여 주정부에 보낸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주도에서 온 관리 인력이 상주하며 해당 자원의 채굴 및 운반 등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광에 돌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위글로우의 금광은 그리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도에서 보낸 인력이 관리하고 있는 광산 외에 다른 곳에서 은밀히 채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정부에 보고한 금맥이 지류라면 이쪽은 본류라 할 만큼 규모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곳이었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막시밀리언이 보낸 믿을 만한 병사들과 유력 호족 가문에서 보낸 인력들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발각된다면 사령관의 직위에서 파직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형을 피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그리고 이전까지 서로 사납게 으르렁대던 이들이 손을 잡을 만큼 금의 힘은 대단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서로의 흠을 물어뜯을 생각만 하던 이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손을 잡을 수 있는가. 심지어 금광에 관해서는 협력하고 있다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전과 같이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서로의 목을 노리면서, 또 다른 손으로는 다정하게 악수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이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뿌! 부부부!”

안아달라며 허우적대는 보리스 덕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리광 많은 아들을 들어 안아주니 포동포동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보리스는 당신을 닮았군.”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벨리사가 싱긋 웃었다.

“그래요?”

“음. 어리광이 많아.”

벨리사의 입가에 보기 좋게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볼이 부풀었다.

“그거 흉보는 거죠?”

“흉이랄 게 있나. 단지 난 이렇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니면 당신을 닮은 거겠지.”

아무렇지 않게 둘러댔지만 벨리사의 표정은 이미 뚱해져 있었다. 군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뻗자 벨리사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젖혀 피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보리스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비와 어미를 번갈아 보았다. 그 모습에 군터와 벨리사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소리는 물론이고, 특히 주인 내외가 있는 곳 주변에서 대기하는 이들 같은 경우에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루시는 그런 그들이 우스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저택의 주인, 그러니까 그녀의 주인을 잘 모른다. 아직은 이 저택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도 하고, 그녀의 주인은 상당히 무뚝뚝한 편이라 아랫사람들이 그에게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그녀만 해도 처음 마님을 모시기 시작했을 때는 마냥 그가 어렵고 두려웠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주인은 생김새부터 분위기까지 어느 것 하나 친절한 것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주방에서 전달 받은 쟁반 위에는 보기만 해도 맛스러운 다과와 음료가 올라 있었다. 그녀의 일은 이것을 주인 내외가 있는 방까지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그러니까 주인을 직접 보는 일은 대개 그녀의 몫이었다. 하인들이 주인의 얼굴을 보기를 꺼려하는 탓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하인들은 평민이고 그녀는 노예였지만, 대신 그녀는 마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 저택에서 중요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윗사람에게 얼마만큼 예쁨을 받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는 어쩌면 평민인 하인들보다 더 나았다. 그녀는 마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여기저기 함께 피난을 다니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도 면천이 될 수 있을까.’

본래 그녀 이전에 유리아라는 노예가 있었다. 루시에게는 선배 격이었는데, 그녀는 주인이 면천을 시켜주어 지금은 아들이 마련한 집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편히 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종종 마님의 부름을 받고 저택에 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유리아의 삶은 그야말로 루시가 꿈꾸는 미래 그 자체였다.

‘어휴. 정신 차리자. 이런 생각 하면 뭐해.’

유리아가 면천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아들이 군인이 되어 주인의 밑에 들어가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노예로서 일을 오래, 열심히 했다고 면천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평민의 노동은 대가를 받지만, 노예의 노동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다. 일 하는 물건이 곧 노예니까 말이다.

“주인님. 다과입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내외가 그들의 어린 아들과 놀아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참. 루시야.”

다과를 놓고 나가려는데 아들의 재롱을 보며 웃고 있던 마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예. 마님.”

“전에 갔던 잡화점에 가서 장난감 좀 사다주겠니? 보리스가 가지고 놀다가 또 망가뜨려버려서…….”

“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대체 어떻게 가지고 놀면 그 튼튼한 장난감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일까? 루시는 조그마한 도련님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하면서 곧장 외출 준비에 나섰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저 집사에게 가 마님의 분부를 전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집사님. 마님께서 도련님의 장난감을 사오라 하셨습니다.”

“음. 또 망가뜨리셨나? 어린 도련님께서는 정말 기운이 넘치시는군.”

모페이브라는 이름의 젊은(다른 저택의 집사들에 비하면) 집사는 하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루시에게 있어서도 꽤 어려운 상대였다. 일단 얼굴을 본지도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고, 무엇보다 그가 신비로운 힘을 부리는 술사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소문 정도야 그냥 웃고 넘길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마님에게 넌지시 그런 소문이 돌더라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녀가 말없이 웃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긍정의 웃음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술사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 느긋해 보이는 집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개구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알겠다. 음…이 정도면 되겠지.”

그가 건넨 것은 무려 은화였다. 루시는 너무 많다 했지만 집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남겨 오라고 했다.

“병사 둘을 붙여주마. 기왕 나간 김에 바람이나 좀 쐬고 오너라.”

“감사합니다.”

아마 이 젊은 집사는 술사라는 흉흉한(?) 소문만 아니었다면 하인들에게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때때로는 이렇게 고마운 배려까지 해주었다. 물론 루시는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불편한 동행인을 둘이나 달고 바람을 쐰다한들 그 바람이 코로 들어오는지 귀로 들어오는지 알기나 하겠는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속내야 어떻든 간에, 루시는 그녀와 함께 움직이게 된 병사 둘에게 공손히 고개 숙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기 전에 병사들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들이란.’

루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그녀의 외모는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 봐도 예쁘다고 느낄 정도로 꽤나 반반한 편이었다. 만약 그녀가 평민이었다면 이 얼굴을 십분 활용해 어떻게 괜찮은 남자 하나 잡아서 편히 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가 외모가 잘나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성노도 아니었고, 그녀의 주인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다.

‘좋은 분들끼리 만난 거지.’

무뚝뚝하고, 어쩌면 난폭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주인은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마님 또한 좋은 여자였다.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한 번 다투지도 않는다. 루시는 그녀의 주인 내외야말로 부부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소.”

“많이 파세요.”

일전에 장난감을 살 때도 왔었던 잡화점에 들러 아기 도련님의 장난감을 샀다. 돈이 많이 남았기에 넉넉하게 세 개를 샀다. 날이 갈수록 커지고 힘이 세지는 아기 도련님의 추세를 볼 때, 하나만 사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들러야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 거기 루시 아니냐?”

주인이 튼튼하다고 장담한 장난감을 세 개씩이나 사고서 잡화점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어딘가 경직된 웃음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할렌님.”

청년은 유리아의 아들, 할렌이었다. 한때는 그녀와 같은 노예였으나 이제는 백인장이 된, 그녀로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높은 사내.

“이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우연인데? 오랜만이잖아.”

오랜만이라고 할 만큼 본 지 오래 되지는 않았다. 불과 열흘 전에도 저택에 들른 그를 봤었으니까. 그리고 우연이라…….

‘거짓말은 절대 못할 사람이네.’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내심 웃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병사 둘이 먼저 가보겠다고 말했다. 루시는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할렌이 슬쩍 고갯짓 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노골적이네.’

이래놓고 눈치 못 채기를 바라는 것일까?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뭐,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할렌에 대해 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거 무겁지 않느냐? 이리 주거라.”

“괜찮습니다.”

루시는 손을 뻗는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 할렌은 뻘쭘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그…요즘은 어찌 지내느냐? 아무래도 저택에 노예는 너 혼자니까…힘들거나 하지는 않으냐?”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마님께서 저를 아껴주시니까요.”

“그래. 마님께서는 참 좋은 분이시지.”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루시는 답답함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느린 발걸음 속에, 할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너와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절절하게 느껴졌다. 하여 루시는 재미없고 답답한 와중에도 꼬박꼬박 대꾸해주었다. 할렌은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한 순간.

갑작스레 할렌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루시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루시는 할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쫓았다.

소매가 거의 없다시피 한 얇은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할렌이 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자.”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할렌은 곧 다시 웃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루시도 궁금증을 고이 접어둔 채 그와 걸음을 맞췄다.

========== 작품 후기 ==========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이 글이 투베에 올랐던 것도 꽤 전, 그것도 잠깐이었고 그 후로는 투베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 선작 수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늘어나네요. 어떻게들 알고 오시는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쿠폰 쏴 주신 분들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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