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서걱!
와아아아아!
묵직하게 떨어져 내린 칼날이 깔끔하게 목을 잘랐다.
무거운 머리통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그제야 형틀의 구속에서 벗어나 나무판 위에 쓰러졌다. 사형집행인은 핏물을 쏟아내는 몸뚱이를 걷어차고 다음 제물을 거칠게 끌고 왔다.
“살려줘. 사, 살려줘!”
끌려오지 않으려 발악을 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군중의 환호성에 가볍게 묻혀버렸고 필사의 몸짓은 억센 손길에 억눌렸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발버둥을 치지만 두 팔이 뒤로 묶인 채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악을 쓰는 것 외에는 없었다.
몸을 옆으로 기울여 앉은 채 그를 지켜보던 군터는 여섯 번째 목이 날아갔을 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바로 옆, 상석에 앉아 있던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려는가?”
“예. 그다지 재미가 없군요.”
결례라면 결례였다. 상관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부하가 먼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일어섰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그를 탓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머금을 뿐.
“나 역시 그렇다네. 원치도 않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영 불편하군. 이럴 때는 자네가 부러워.”
“별 말씀을.”
“그래. 먼저 들어가 쉬게나.”
“예. 그럼.”
군중의 환호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군터는 조용히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던 이들은 그가 한 걸음 내딛자 재빨리 길을 열었다. 군터는 꺼려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불쾌한 자리를 떠나 향한 곳은 그의 집이었다. 제법 규모 있는 저택이었는데, 예전에 베이고르가 바크렌을 다스리던 때에 어느 귀족 가문이 사용하던 곳이라 했다. 그만큼 크기도 하고 외관도 아주 훌륭한 곳이었는데, 위글로우로 부임하며 막시밀리언이 그를 위해 선물해준 곳이었다. 너무나 부담되는 선물에 몇 번이고 사양의 뜻을 비쳤으나 호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라는 막시밀리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오셨습니까. 마님께서는 정원에 도련님과 함께 계십니다.”
저택의 크기가 있다 보니 항시 근무하는 병사들의 수도 서른에 가까웠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군터의 휘하 병사들이었는데, 권한 남용이라면 남용이었으나 이곳에서 그런 것을 가지고 깐깐하게 따지고 들 만한 이는 없었다. 설령 불만을 품고 있다 해도 감히 군터에게 그런 말을 할 만큼 담력 있는 자는 더더욱 없었고 말이다. 사령관의 심복임을 떠나, 치열했던 전쟁에서 세운 무공으로 공신명부에 이름까지 올린 그였다. 그런 그에게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는가.
“왔어요?”
병사가 말한 대로, 벨리사는 보리스와 함께 정원에 있었다. 보리스는 그 짧은 다리로 용케 한 발 한 발 걷고 있었고, 그런 아들을 보며 벨리사는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은 정원에 들어선 군터를 보고 더 짙어졌다.
군터는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그의 다리에 매달리는 보리스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제는 곧잘 걷는군.”
“시시 할멈이 그러는데, 꽤나 빠른 편이래요. 아마 당신을 닮아서 그런 거겠죠.”
“그런가?”
엉덩이와 등을 받치고 들어 올린 보리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빠바. 빠바바!”
보리스가 안아달라는 듯 팔을 허우적거렸다. 피식 웃은 군터가 아들을 안아주자 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두꺼운 목을 끌어안았다. 워낙 팔이 짧아 엉겨 붙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제법 힘이 있어 감기는 감촉이 뚜렷했다.
“이 녀석, 덩치가 커질수록 어리광만 느는 것 같아.”
“아빠를 자주 못 보니까 그렇죠.”
벨리사의 핀잔에 군터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름대로는 자주 집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만, 처리해야 할 서류는 양에 비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미안해.”
“오늘은 일 없는 거죠?”
“음. 없어. 이틀 정도는 나갈 필요 없을 거야.”
이번에 도적들을 소탕한 데 대한 포상이었다. 군터는 다른 것보다도 휴가를 원했고, 막시밀리언은 껄껄 웃으며 이틀의 휴가를 주었다.
“이틀?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군터는 벨리사와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뒤따르려는 인원은 손짓으로 물렸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아직도 군터의 목에 착 달라붙어 있는 보리스 뿐이었다.
“요즘 들어 너무 일이 많아.”
“전에 말했던 것 때문에요?”
“어.”
벨리사도 위글로우에서 발견된 금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그녀의 남편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그녀는 휴가가 달랑 이틀이라는 게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예쁜 입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순간 장난기가 돌은 군터는 슬쩍 목에 매달린 아들을 살폈다. 목을 감싼 팔에 힘이 빠지고 숨소리가 고르게 변해 있었다. 아이 때는 잠이 많다더니, 그새 잠이 들어버린 모양. 그렇다면 거칠 게 없다. 어차피 뒤따라오던 인원도 물렸으니까 말이다.
보리스의 등을 받치던 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가 벨리사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부드럽게 앞으로 끌어왔다.
“보리스가 있잖아요.”
“괜찮아. 잠들었어.”
허리를 감쌌던 손이 꾸물꾸물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 말라는 듯 허리를 움직이던 벨리사는 끝내 군터의 손이 은밀한 곳까지 들어서려하자 체념한 듯 슬쩍 다리를 벌려 섰다.
“짓궂은 장난만 늘어서는. 예전 순진했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몰라.”
“글쎄. 모르겠는걸.”
벨리사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을 탐하려는 듯 발뒤꿈치까지 들었지만 목 언저리에 닿는 것이 한계였다. 군터가 몸을 낮춰주자 그제야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에 닿았다.
농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군터의 목은 이미 보리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벨리사는 그의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적극적인데?”
“그러게요. 오늘은 왠지 이러고 싶네.”
벨리사는 마치 오늘따라 그렇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보리스를 낳은 뒤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그가 슬며시 다가가면 언제든 호응해주었지만,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그녀가 먼저 요구하는 빈도가 상당히 늘어났다. 군터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꺼운 변화였다.
“왜 웃어요?”
“좋아서.”
“뭐가요?”
“모르겠어. 그냥 좋군.”
“무슨 말이에요 그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런 대답도 되지 않는 바보 같은 말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벨리사는 실실 웃으며 군터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곤 한 다리를 들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리 두껍지 않은 치마가 걷히며 매끈한 다리가 군터의 허벅지에 닿았다.
“여기서 할까?”
열기가 감도는 목소리에 벨리사가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으응. 들어가서.”
“보리스는?”
“시시 할멈에게 맡기면 되죠.”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그들은 잠든 아들을 노파에게 맡기고 곧장 침실로 향해 서로에 대한 욕망을 확인했다.
*
군터는 가쁜 호흡을 뱉는 벨리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옅은 구릿빛 피부가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아이를 가지며 붙었던 살은 다 빠져나가고 본래의 유려한 몸매를 되찾은 그녀였다. 요즘에는 시시 노파에게 여인들이 배우는 운동 같은 것을 배운다고 하더니 오히려 몸매가 아이를 갖기 전보다 더 탄력적으로 변했다. 덕분인지 체력도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이지, 그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군터는 만족했다. 아직 여유가 있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벨리사가 헐떡이면서도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였다. 그 대가로 그녀는 반쯤 실신하여 누워 있었다. 군터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한바탕 운동을 해서 그런지 허기가 졌다. 군터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 고풍스러운 저택에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주방에서 일을 하는 요리사를 따로 둘 수 있다는 점이다. 저택의 많은 방 중 하나에 묵고 있는 요리사는 언제든, 심지어는 새벽 중이라도 불러 요리를 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번거로운 고용주 역할을 해본 적은 없지만, 가능은 하다는 소리다.
저택 요리사의 실력은 꽤나 괜찮았다. 이제껏 그가 내놓은 요리 중에 맛있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아무리 솜씨 부릴 거리가 없을 것 같은 간단한 요리라도 먹어보면 하나같이 다 맛이 좋았다.
순한 인상의 요리사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있었다. 요리사라는 이들이 다 그런지는 몰라도, 꼭 요리를 내온 다음에 적당히 떨어져서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한 입을 먹고 나면 반응을 기다렸다.
“맛있군.”
“다행입니다. 그럼, 즐거운 식사하시길.”
기다리는 말을 해주니 밝은 미소를 짓고 물러난다. 짤막한 한 마디 말이 그리 좋을까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제대로 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군인으로 치면 전공을 인정받은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살짝 매콤한 돼지고기 요리를 한창 먹고 있는데, 바깥에서 병사 한 명이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왔다.
“살라스 백인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 해라.”
막시밀리언이 군터와 코르넬에게 자신의 집과 집무실에 언제든 들락거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면, 군터는 살라스와 할렌에게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살라스는 할렌과는 달리 집무실에이든 그의 집이든, 들어오기 전에 꼭 이렇게 기별을 하곤 했다.
‘갑갑한 녀석 같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고지식한 면이 살라스답기도 했다.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까. 조금 있다가 올 걸 그랬군요.”
“그냥 출출해서 먹는 거다. 아직 식전이면 같이 들지.”
“아닙니다. 저녁에 부하들과 회식을 하기로 해놓은지라.”
“흐음. 열심이군.”
살라스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시끌벅적한 자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부하들과 회식이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지요.”
나름의 노력이었다. 백인장은 십인장과는 달라서, 직접 통솔해야 하는 부하 병사의 수가 직접 눈을 마주치며 다루기에는 너무 많다. 따라서 평소 어느 정도 관계를 다져놓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강압적으로 다룰 수도 있지만, 가뜩이나 나이도 적은 살라스가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래도 반발이 생기기 마련. 그러니 직접 부대끼며 친해지는 것이 상수다.
“이번에 있었던 훈련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살라스가 몇 장의 서류를 들이미니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난 휴가다. 이틀 동안 말이지.”
“그럼 이틀 후에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 천연덕스런 말에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군터는 식사를 멈추고 살라스가 내민 서류를 받아 슬쩍 살펴보았다. 대강 내용은 들어오지만 꽤나 빼곡하게 적힌 글이며 여기저기 들어찬 숫자들이 벌써부터 머리를 아프게 했다.
“요즘 분위기는 어떠냐.”
“무난합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각자 따로 노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어차피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지요.”
새로이 탄생한 군터 천인대에 관한 내용이었다. 십인대에서 백인대가 될 때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지만, 비슷하다 뿐이지 그 정도는 완전히 달랐다. 십에서 백이 되는 것과 백에서 천이 되는 것은 비율상으로는 같아도 실제 수로는 차이가 크니까 말이다.
규모가 불어난 새로운 부대를 꾸리며, 군터는 또 한 번 아쿼러즈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하지만 백인대라면 모를까 천인대 전체를 아쿼러즈로만 꾸리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될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국 출신도 다수 받아들였다. 비율로 따진다면 3대 2 정도였다.
그렇게 인원을 늘린 것은 좋은데, 천인대가 새로 꾸려진 후에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위글로우로 넘어오게 되면서 부대의 화합 면에서 약간의 차질이 있었다. 서로 싸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천인대 소속임에도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각 백인대 별로 겉도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전이 가장 좋지만, 그게 안 되면 혹독한 훈련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
“그 정도로 강하게 훈련을 진행하려면 시간과 물자가 다수 소모될 겁니다. 쉽사리 재가가 나겠습니까.”
“그러니 아직까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겠느냐.”
위글로우의 사령관은 막시밀리언이고, 그가 이 도시의 가장 유력한 권력자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든 일을 뜻대로 진행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위글로우의 고위 관료 자리에 앉아 있는 호족들은 그들 하나하나는 도시의 사령관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뜻을 모은다면 사령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 호족 연합과 막시밀리언이 이끄는 군부의 미묘한 힘겨루기는 중차대한 것들부터 사소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안 벌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만약 군터가 대뜸 대규모 훈련을 계획한다면? 막시밀리언의 재가가 떨어지더라도 위글로우의 돈줄을 틀어쥐고 있는 호족 출신 관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예산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언성을 높일 것이다. 군터는 그런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약을 먹으니까 잠만 계속 자네요. 이런 몸 상태에 기껏 챙겨본 국대경기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9월의 시작인데, 모두 건강히 가을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