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오백의 병사들이 위글로우의 성문을 나섰다. 개중 이백이 기병이었고 삼백은 보병이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도시를 빠져나오는 선두에는 군터가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더냐?”
“예. 안에 계실 때랑은 너무 다르십니다.”
“그럴 수밖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보고 있으면 두통이 치민다.”
“그럼 안 보시면 되잖습니까?”
순진하기 짝이 없는 할렌의 말에 군터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언젠가 네가 내 자리에 오르게 되면 네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백인장이었을 때는 천인장이 되면 천 명이나 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하고픈 것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이 자리에 앉으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서둘러라. 닷새 안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간만에 바람을 쐬는 것은 쐬는 것이고, 일은 일이다. 도시 주변을 순찰 돌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군터는 그런 생색으로만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1년 전만 해도 이곳이 허허벌판이었다는 게 말입니다.”
“인간만큼 자연의 적응력도 뛰어나다는 거겠지.”
본래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야 했던 위글로우의 시민들은 이제 짧은 소매 옷 한 벌로 하루를 보냈다. 모두 급격하게 따스해진 기후 때문이었고, 전쟁의 여파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쟁 직후 없던 강이 생기질 않나 각 지역의 기후가 바뀌질 않나, 바크렌 전역은 일대 격변을 맞이했다. 위글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량했던 벌판에 초목이 우거졌다. 본래는 뻥 뚫려 있던 곳에 자그마한 숲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지대가 자리 잡았다. 본래 위글로우 인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식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싹 다 태워버리고 싶은데 말입니다.”
경솔한 말이지만 이유 없이 하는 말은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 생겨나고, 여전히 늘어가고 있는 숲이며 높이 자란 초목들 때문에 길을 오가는 이들의 시야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동 중에 넓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기습의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도시를 오가는 이들을 노리는 도적들의 움직임이 용이해짐을 뜻한다.
“아마 지금도 저 안에 한 무리 정도는 숨어있지 않겠습니까?”
할렌이 제법 널찍한 숲 하나를 가리켰다. 확실히, 저 정도 크기라면 도적놈 수십 정도 숨어 있어도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
“닷새라면 바로 시작하십니까?”
“그래. 잘 볼 줄 아는 놈들로 준비시켜라.”
“예. 경험 있는 녀석들로 준비하지요.”
쥐새끼들은 아마 은신처 같은 곳에 틀어박혀 죽은 듯 있을 것이다. 그런 놈들을 찾아내려면 평범한 순찰이나 수색으로는 힘들다. 약삭빠른 놈들을 사냥할 때는 유능한 사냥꾼이 필요한 법. 그런 면에서 초원 태생들이야말로 이런 일에 제격이다. 그들은 타고난 사냥꾼이며, 초원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사냥의 연속이다. 광활한 초원을 내달리며 자그마한 사냥감들을 쫓던 경험이 숲속에 웅크린 어설픈 쥐새끼들 하나 당해내지 못하겠는가.
*
초원에서 사냥을 하던 경력이 있는, 제법 나이가 있는 병사들이 수색조를 이끌었다. 오십 명 단위로 쪼개어 열 무리가 수색을 시작하자 이틀이 지나기 전에 두 무리의 도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억!”
두 무리의 도적들을 소탕하는데 피해는 없었다. 발견하자마자 활을 쏘아대는 병사들 앞에서 도적들은 등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그렇게 도망치는 도적들을 기마병들이 추격해 짓밟았다.
두 무리의 도적들을 쓸어버리고 포로도 여덟이나 잡았다. 날이 저물었을 때 군터는 사로잡은 여덟 명의 도적들을 직접 심문했다.
어두컴컴한 밤에 모닥불 앞에 여덟 명의 사내가 무릎 꿇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라.”
군터의 나지막한 말에도 그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조심스럽게 한 번 들었다가 그들을 내려 보는 사자 같은 눈을 보자마자 곧장 도로 고개를 숙였다. 발가벗고서 한풍을 맞은 것처럼 덜덜 떠는 것은 덤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군터의 존재가 그들을 숨 막히게 했다.
“눈도 못 마주치는 겁쟁이 놈들이…무슨 배짱으로 도시 인근까지 와서 도적질을 할 생각을 했더냐?”
심드렁한 기색을 비치는 군터에게서는 사나운 맹수와 같은 위협적인 기세가 넘실거렸다.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풍겨 나오는 기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압박했다. 군터에게 익숙하고, 일신의 실력도 정예 수준을 넘어선 그의 수하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도적들에게는 무리였다.
도적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벌벌 떨고만 있자 군터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할렌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대장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느냐. 지금부터 물으시는 말씀에 답하지 않는 놈들은 혀를 뽑아버리겠다.”
“위…위글로우에 그, 금맥이 터졌다 하여……. 몰려드는 상인무리를 털면 크게 한몫 챙길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적들이 어렵사리 뱉은 말을 듣고 군터가 혀를 찼다.
도적들의 가랑이 사이에서 풍기는, 미세하게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도 냄새였지만 그보다는 익히 예상했던 짜증스런 내용이 나온 탓이었다.
‘그놈의 금맥은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똥파리는 똥 주변에 몰리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도적은 털어먹을 게 있는 곳에 몰리기 마련이다. 즉, 돈이나 귀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상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상인들은 어디에 몰리는가? 당연히 돈 될 것이 있는 곳에 몰리겠지. 돈 냄새는 귀신 같이 알아채는 그들이 위글로우에 괜히 몰려오는 것이 아니다.
금맥(金脈).
지체 높으신 귀족들도 질질 침을 흘리게 만든다는 그 귀한 물건이 위글로우에서 발견됐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반 년 정도 전으로 기억했다. 막시밀리언과 함께 위글로우에 부임하여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사금(砂金)이 발견 됐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규모 있는 금맥이 발견 됐다는 소식을 접했고, 또 거기서 얼마 안 있어 대규모의 금맥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흘 동안 줄기차게 내린 폭우로 산의 일부가 무너졌는데, 그 무너진 곳에서 금광석이 대량 발견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즉시 막시밀리언은 병사들을 동원해 주변을 통제했고, 소식이 알려지는 것도 틀어막았다. 하지만 본래 말이라는 것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 야금야금 금맥에 관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망할 놈이 퍼뜨린 건지.’
뭐, 사실 진지하게 추측해보면 입을 나불댔을 놈들은 넘쳐났다. 당장 현장을 통제했던 병사들이 어디서 술 한 잔 걸치고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글로우 출신 병사들이 자기들 가족들에게만 ‘이건 절대 비밀인데’ 하면서 속닥거렸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유력가들이 부리는 염탐꾼들이 솜씨발휘를 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귀찮은 일이다. 물론 그 귀찮은 일 덕분에 이렇게 모처럼 바람을 쐴 기회가 왔지만, 벌레 같은 도적놈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같이 온 놈들도 그게 전부고. 배후도 없다는 말이렸다?”
“그, 그렇습니다. 정말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군터는 무릎 꿇은 도적들의 뒤편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병사들이 도적들을 끌고 갔다.
어차피 죽겠지만 당장은 아니다. 위글로우로 들어가 시민들 앞에서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냥 수급만 베어 돌아가고 되겠지만,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군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전리품의 용도다. 이미 베어진 머리통을 보는 것보다는 눈 앞에서 떨어지는 머리통을 보는 것이 더 효과가 좋으니까 말이다.
“되도록 생포하도록 해라.”
“예.”
“물론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물론이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렌이 맡겨달라는 듯 밝게 웃었다. 그 모습이 꼭 들뜬 어린 아이 같아 군터도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도 약간은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이지만, 이제 할렌은 그의 천인대에서 살라스 다음으로 믿음직스러운 수하였다. 도시 안에 남은 병력을 살라스가 이끌고 있다면, 위글로우를 나온 오백 병력은 할렌이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요즘도 루시를 훔쳐보고 다니느냐?”
“아…그…….”
짓굳은 물음 한 방에 패기 넘치던 얼굴이 금세 홍당무처럼 변했다.
루시는 일전에 군터가 벨리사를 위해 거둔 노예였다. 할렌과는 비슷한 또래였는데, 나이를 먹어가며 제법 사내의 시선을 잡아 끌 만큼 미색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군터는 할렌이 종종 그의 집을 들를 때마다 루시를 곁눈질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터는 할렌이 원한다면 노예 하나쯤 그냥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노예야 하나 더 마련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적의 목은 웃으면서 베는 놈이 마음에 둔 계집 앞에서는 졸장부가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가 먼저 루시를 할렌에게 내어준다면야 한 집에서 역사가 안 쓰이겠냐마는…….
‘그러면 재미가 없지.’
할렌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애틋하게 마음 졸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또, 대수로울 것 없는 노예 계집이라지만 마음에 둔 계집을 상대로 가벼운 용기 하나 내지 못하는 놈에게 내주기에는 아까웠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벨리사를 얻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에 비하면 할렌의 상황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앞으로 사흘 동안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한다. 돌아갈 때 적어도 광장에 줄 지어 세울 정도로는 잡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전히 홍조가 남은 얼굴로 할렌이 각오를 다졌다.
*
사흘 후.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활짝 열린 위글로우의 남문으로 들어섰다. 대낮의 귀환이라 시민들이 제법 몰려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놈들!”
“개 같은 놈들!”
몇몇 시민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그마한 돌멩이를 던졌다. 당연히 군터와 그의 병사들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기병들의 뒤로 줄지어 묶여 들어오는 도적들을 향한 것이었다. 족히 오십은 넘어 보이는 도적들이 날아드는 돌멩이에 몸을 움츠렸다.
“꽤나 살벌하군요. 도적놈들한테 가족이라도 잃었나.”
“아닐 거다. 그저…좋은 화풀이 상대 아니겠느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서서 제지를 시작하고 나서야 돌멩이 세례가 끝이 났다. 도적놈들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교수대 까지는 올라가야 하니까 말이다. 그 전에 머리가 깨져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도 다 용도는 있다는 말이다.
========== 작품 후기 ==========
이제부터는 챕터 명을 없애고 그냥 2부로 통일하려고 합니다. 흐름 따라 길고 짧음이 다른데 일일이 소제목을 붙이려니 너무 난잡스러워 보이고, 거기에 맞춰 내용을 끊어야 한다는 압박감 아닌 압박감이 있어서요...
간밤에 창을 열어놓고 잤더니 약간 감기 기운이... 모두 건강관리 잘 하시고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