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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39화 (139/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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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슬슬 더워지는구만.”

상인은 덧대어 입었던 웃옷 한 장을 벗었다. 그의 이마에는 이미 굵직한 땀방울 몇 개가 맺혀있었다.

“얼마나 남았소?”

옆에 있던 용병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젊은 용병은 그를 흘깃 보더니 짤막하게 답했다.

“이제 곧 도착이오.”

‘쌀쌀 맞구만.’

혀가 반 토막이라도 났단 말인가. 슬쩍 불만이 일었지만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꿈틀거리는 근육질 팔뚝이 부담스러운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과묵함이 호위 용병으로서의 신뢰성을 높여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칼 쓰는 자가 입이 가벼우면 그건 또 그것대로 없어 보이니까 말이다.

‘그래도…여기까지 오는 데 습격 한 번 없었지 않은가. 이거 괜한 돈 쓴 거 아닌지 모르겠군.’

이번 상행은 혼자 움직이는 보부상들끼리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 호위 용병도 각출하여 고용했는데, 그리 부담 되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깝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이렇게 무탈하게 위글로우를 앞에 두고 있으니 괜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적이다!”

그런데 신께서 그런 얄팍한 생각을 벌하기라도 하시려는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마자 앞에서 경계심 가득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상인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닦아냈던 이마에서 땀이 다시금 비 맞은 듯 흘러내렸다.

“무, 무…….”

“수레에 몸을 숨겨! 어서!”

한참이나 어린 사내의 반말이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상인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수레 밑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먼저 들어와 벌벌 떨고 있던 또 다른 상인이 있었다. 두 상인은 조금이라도 더 몸을 숨기려 서로에게 부딪쳤다.

그들이 그렇게 나름대로의 사투를 벌이는 사이, 수레 바깥에서는 진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퍽! 퍽!

“뭉쳐! 방패를 이어 들고 다리를 굽혀라!”

열 명 남짓한 용병들은 모두 개인 단위로 고용된 이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없었는데, 임무 중에 가장 경험이 많은 용병이 대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머리 숙여! 수레를 등져라!”

젊은 용병들이 우왕좌왕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중년 용병이 호통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과연 경험이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다른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적당히 엄폐하며 활을 들었다.

‘위글로우가 근방이다. 운이 좋기를 바라야겠군.’

삐익!

잽싸게 쏘아올린 화살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높이 올라갔다.

*

“골골대는 것들은 죽이고 멀쩡한 놈들만 챙겨라!”

통일된 무장을 한 병사들이 엉망이 된 주변을 훑고 다녔다. 그들은 쓰러진 이들의 목을 치거나 일으켜 세워 목에 굵은 밧줄을 묶었다.

“으으윽!”

“이 새끼가!”

저항은 어림도 없었다. 저항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즉시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고, 심하면 즉시 목이 베였다.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이들은 목줄이 걸리는 것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목이 잔뜩 쉰 격전의 흔적이 남은 몰골을 하고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말을 붙이는 상대는 그의 나이 반이나 될까 싶은 젊은 군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적다고 하여 얕볼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의 말처럼 젊은 군인은 중년 용병과 이 자리에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은인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른쪽 가슴에 백인장을 의미하는 휘장을 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연히 나오는 목소리가 공손하게 깔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이 무리의 대장인가?”

“대장…이라고 하기는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의뢰를 받고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라.”

“상단이 아니로군. 용병대도 아닌 것 같고.”

중년 용병은 이 젊은 백인장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니면 이와 같은 경험이 제법 있거나.

“예. 저와 이 친구들 모두 따로 고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병사 한 명이 상인들에게 받은 두루마리를 가지고 다가왔다. 젊은 백인장은 그것을 펼쳐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두루마리에는 그들이 상행을 시작한 도시의 관인이 찍혀 있었다. 그 밑에 적힌 인원 구성 역시 죽은 이들까지 합하면 똑 떨어졌다.

“위글로우까지는 반나절 길이지만 이 구간에는 도적놈들이 자주 출몰하곤 하지. 다 와간다고 마음 놓는 이들이 많거든.”

“그렇습니까…….”

중년 용병의 목소리가 씁쓸해진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도착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풀어져 경계에 조금 소홀해져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그 대가를 치렀고.

“우리가 순찰을 돈다고는 하지만 이놈들도 워낙 약삭빨라서 순식간에 치고 빠지지. 그래도 당신들은 운이 좋았소. 대처도 좋았고. 효시를 쏜 건 당신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예전에 군인이었나?”

“소싯적에…말단 병졸이었지요.”

같은 제국군 출신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젊은 백인장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는 포박을 마친 병사들을 한 번 훑어보곤 뒤편에서 아직도 다리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차피 우리도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위글로우까지는 함께 가 주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에 어찌 보답해야할지.”

“보답은 무슨. 다리에 힘주고 잘 따라오기나 하시오. 자, 가자!”

멈췄던 수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대장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원하던 답을 듣고 할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군터는 책상에 앉는 대신 일어서서 얇은 서류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할렌이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군터가 반쯤 노려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를 보고 할렌이 실실 웃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놈의 글 읽기는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나. 매일 봐도 매일 힘들다.”

“역시 대장님께서는 천생 무인이십니다.”

분명히 칭찬의 말인데 어째서 ‘역시 무식하십니다.’로 바뀌어 들리는지 모르겠다. 군터는 꼴도 보기 싫은 서류를 슬쩍 한 곳에 밀어버렸다.

“그래. 별 일 없었느냐.”

“돌아오는 길에 자그마한 상인 무리가 도적들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하기는 했습니다만…도적들의 습격이 있던 위치가 고작 반나절 거리였습니다.”

“대담한 놈들이 또 있었군.”

“한 몫 챙겨서 북쪽으로 도망치려는 것이었겠지요.”

“습격당했다던 놈들은? 암상은 아니었나?”

“제대로 관인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또, 암상이라기엔 너무 허술해 보였습니다.”

“그래…그렇군.”

골치 아픈 이야기다. 짜증나는 이야기기도 했다. 순찰을 강화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건만, 할 수 없어 못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대장님. 사령관께서는 아직 별 말씀 없으십니까?”

“아직이다.”

군사도시인 위글로우에서 사령관의 권한은 막강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군, 이제는 제국에서도 베이고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망국이 일으킨 전란은 바크렌 전역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그 혼란 속에 지방 정부는 크게 휘청거렸고, 억눌려 있던 호족들이 스스로 힘을 갖추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도적놈들을 쓸어버리는 일을 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할렌이 답답한 얼굴을 했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게 답답했다. 분명 꽤 자세하게 설명까지 들었건만,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허나 어쩔 것인가. 명령이 있었으니 당분간은 때를 기다리며 자중할 밖에.

“사령관님께 가십니까?”

“그래. 보고는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실은 답답한 집무실에서 벗어나 바람 좀 쐬고픈 마음도 있었다. 이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서 쪼가리를 붙들고 있다가는 정말 두통이 밀려올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

걸으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군터는 간간이 아는 얼굴들에게만 살짝 아는 체하며 지나쳤다.

사령관의 집무실 앞.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다가오는 군터를 보곤 가볍게 군례를 취할 뿐 달리 제지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위글로우에서 어느 때나 마음대로 이곳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 받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고, 위병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터. 어쩐 일인가?”

위글로우의 사령관, 막시밀리언은 책상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를 반겨주었다. 군터는 답을 하기 전에,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더미들을 보고 질린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의 집무실에서 들여다보던 서류들은 막시밀리언의 곁에 쌓인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적들의 출몰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글로우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에서 말입니다.”

순간, 서류를 넘기던 막시밀리언의 손이 멈췄다. 한숨을 쉰 그는 서류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런가.”

“이번 달에 들어서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섯 번째라. 심하긴 하군.”

제대로 규모 있게 설치는 놈들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날파리 같은 놈들이다. 귀찮은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파리라고 해도 너무 자주 보이면 거슬릴 수밖에 없다.

“코르넬.”

“예.”

부관으로서 옆 자리에 앉아 묵묵히 일을 보던 코르넬이 고개를 들었다.

“요 사이에 몇 번 탄원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도적들에 관한 것이라면 일곱 번입니다.”

“적절하군.”

막시밀리언이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인지, 그의 몸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자네가 할 텐가?”

군터의 얼굴에 은은하게 화색이 돌았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맡겨주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그리 하게. 얼마나 필요하겠나?”

“오백이면 족합니다.”

“기한은?”

“닷새 안에. 깔끔히 청소하겠습니다.”

무료함에 눌려 있던 목소리에 간만에 힘이 실렸다.

========== 작품 후기 ==========

처음에 비하면 용 됐지요. ㅎㅎ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께도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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