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38화 (138/1,064)

<-- 정전, 종전 - 1부 종료 - -->

요즘 술을 자주 먹는 느낌이었다. 로크를 만나서 한 번, 막시밀리언을 만나서 한 번. 그리고 오늘까지 총 세 번.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마시고 나서 골골댈 정도로 진탕 마시고 있었다. 그간 전쟁통에 바삐 움직이느라 못 마셨던 것을 몰아 마시는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마시는 술은 또 아니었다.

“과음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쯤 드심이…….”

살라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군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득 채운 잔을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씁쓸한 맛이 입 안 가득 적셨다.

“마시고 싶을 때 마시지 못하면 언제 마시겠느냐. 또, 그리 과한 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살라스는 똑똑한 만큼 눈치도 빨랐다. 하지만 지금 군터의 심정을 헤아리는 데는 굳이 눈치까지도 필요 없었다. 부하 한 명만 앞에 앉혀놓고 몇 잔 째 자작을 이어가는 군터를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기뻐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일이라?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지.”

아직까지 입 안에 몇 방울 남은 술처럼 씁쓸한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속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마시지 않고 살라스를 불러 앉힌 것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서다.

“네게 기회가 왔다 치자.”

“기회라면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출세의 기회.”

“…….”

“단, 그 기회를 잡으면 나와는 갈라서야 한다. 너라면, 그 기회를 잡겠느냐?”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아니. 난 그런 것을 할 능력도, 마음도 없다. 그냥 순수하게 묻는 거다.”

살라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잡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저는 대장님을 따르는 게 좋으니까요.”

“…….”

잠시 동안 살라스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군터는 다시 잔을 채우고 들이켰다.

흔들림 없는 눈에 가득한 것은 단호한 진심이다. 고로, 곧바로 튀어나온 살라스의 답은 그의 속마음이 그만큼 굳건하다는 뜻.

‘네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그러고 보면 전날에 막시밀리언도 같은 말을 했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을 시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뭐,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딱히 섭섭하거나 한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카리비온 하야신에게서 제의가 있었다.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드에서도 그렇고, 살마드로 오는 길에도 몇 번이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을 했었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오갔던 말이다. 그때마다 웃으며 넘기거나 다른 화제로 돌리곤 했었다. 막시밀리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었다면 모를까, 살았다면 응당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갈등은 공신명부에 이름이 오를 거라는 아란딜 페레모어의 말을 듣고서 더욱 심해졌다.

탁!

술잔이 탁자를 강하게 때렸다. 내려놓으며 그도 모르게 살짝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일이랄 것도 없다. 그냥…내 마음이 조금 이상해서 그런다. 그럴 만도 하지 않으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버지가 되기도 했고, 전쟁도 얼마간은 멈춘 셈이고.”

“그렇긴 합니다. 안 그래도 아기씨를 뵙고 싶다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흐. 아직은 안 된다. 아기는 약해서 손도 많이 타면 안 되고, 북적이는 곳에 있어서도 안 된다더군. 잘은 모르겠지만…전문가가 그리 말하니 따라야지.”

막시밀리언은 군터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경험 많다는 보모까지 구해주었다. 그 보모가 말한 것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아비 입장에서는 그저 믿고 따를 밖에.

“한 이십 년 뒤쯤이 기대되는군요.”

“음?”

“아기씨 말입니다. 사내로서 대장님을 닮았다면 보기 드문 호걸로 자라나시지 않겠습니까?”

“낯간지러운 소리. 아직 제 몸뚱이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기에게 호걸은 무슨…….”

“하하. 그러니까 이십 년 후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십 년이라니.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다. 지금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보리스가 어엿한 사내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설마하니 그때도 백인장인 것은 아니겠지? 스스로를 과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인장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바라는 바로는 그 이상이었으면 하지만.

‘나를 따르는 게 좋다. 그러니 거부하겠다…라.’

부하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상관으로서 가슴 한 구석이 뜨끈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대답이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출세에 대한 욕구는 분명 지니고 있다. 그것도 꽤나 큰 욕구다. 군문에 들어설 때부터 높은 곳에 이르기를 늘 꿈꿔왔으니까 말이다. 왜? 라는 질문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사람이 맛 좋은 음식을 찾듯, 자연스러운 갈망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살라스에게 있어서는 출세욕보다도 자신과 함께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가.’

막시밀리언에게는 큰 빚을 졌다. 시시한 일이나 하면서 일개 십인장으로 썩어가던 그에게 기회를 주고, 이끌어 준 이가 막시밀리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높은 확률로 여전히 십인장으로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빚을 졌다. 마음을 다해 따르기로 약속했다. 그를 주공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제 다시 만난 그에게는 주공이라는 말 대신 ‘대장’이라는 말이 더 입에 붙었다.

‘내 처지가 바뀌었으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말레이드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신명부에 이름이 오르는 것은 확정적이며, 카리비온 하야신이라는 거물과의 연도 생겼다. 시오도크의 성주 파지오가 준 추천장도 가지고 있다. 막시밀리언이 아니더라도 위로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굳이 그의 밑에 계속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탁!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 떠난다고 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막시밀리언은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그는 막시밀리언 천인대 소속이기 이전에 제국군 소속이다. 막말로 천인장이 된다면 자연히 그와 갈라서야 하는 것이다.

따로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너무나 쉬운 선택이다. 하지만 그는 그 쉬운 선택에서 틀린 답을 골랐다.

‘마음이 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맞아. 난 틀리지 않았다.’

막시밀리언에게 부채 의식을 느낀다. 막시밀리언은 단 한 번도 그를 홀대한 적이 없었다. 홀대는커녕, 항시 후대했다. 때로는 그 대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출셋길이 열렸다 해서 어찌 그를 등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막시밀리언을 계속 따른다고 해서 마냥 출셋길이 막히는 것도 아니었다. 막시밀리언은 분명히 능력이 있는 사내고, 전날 보았던 그의 가문은 든든한 배경이기도 하다. 늦든 빠르든 그가 높은 곳에 오를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출셋길은 열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뭐, 그래도 아쉽긴 하군.’

마음이 한 곳으로 온전히 쏠린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7대 3 정도일까? 따로 길을 찾는다는 선택지에 3이나 마음이 가는 것은, 그가 욕심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을 하고서도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일말의 미련을 두는 법이다. 그러니 그 역시 그러할 뿐이다.

탁!

“너도 마시거라. 상대 좀 해달라고 데려다 놓았더니만 멀뚱히 앉아 하는 일이 없구나.”

“아, 예. 송구합니다.”

괜히 가만히 있는 살라스에게 핀잔을 주며 잔을 건넸다. 마음을 정리한 군터는 살라스와 잔을 부딪치고,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후끈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스럽게 넘어갔다.

*

“무리이겠습니까?”

막시밀리언은 맞은편에 앉은 푸짐한 몸매의 중년인에게 은근한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장년인은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쓸었다.“아니. 무리랄 것은 없소만…아무래도 말이 좀 나오지 않겠소이까?”

“어째서입니까? 없는 공을 만든 것도 아니고, 공에 따른 포상을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음. 허나 모양새가 좀…….”

“쉽지 않은 청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양새가 조금 껄끄럽다한들, 공께서 나서주신다면 누가 다른 말을 내겠습니까. 말씀드렸듯 없는 공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으음.”

사내가 망설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천인장이라는 자리는 공이 있다 하여 내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무려 천 명의 병사를 이끄는 자리다. 마음만 먹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바크렌 같은 변경에서는 특히 반란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 때만 해도 각지에서 일어난 도적떼며 반란군에 얼마나 시달렸는가.

때문에 꼭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심증이나 가벼운 의심 같은 것이 없더라도, 천인장 급의 지위는 아무에게나 줄 수 없었다. 특히나 하나의 군벌이 형성될 것 같은 정황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더더욱.

막시밀리언은 여전히 난색을 지우지 못하는 사내에게 슬그머니 상자 하나를 밀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그를 본 사내의 눈이 빛나고, 막시밀리언은 흐릿하게 웃었다.

“어려운 부탁인 줄 압니다. 허나 그런 부탁이기에 공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공이 아니라면 제가 누구에게 이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같은 배를 탄 맹우가 아닙니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흠! 뭐…이 몸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고맙습니다.”

사내가 상자를 슬쩍 품속에 갈무리했다. 막시밀리언이 진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자, 그럼 이야기도 다 끝났으니 슬슬 즐겨보도록 할까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지은 화장을 한 여인들이 들어섰다. 마주앉은 사내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걸렸다.

*

아란딜 페레모어는 줄카와 함께 첨탑의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조금은 따스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내일 떠나십니까?”

“그래. 찝찝한 마무리라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대니 어쩔 수가 없구나.”

“전황이 좋지 않다고 합니까?”

“글쎄. 가봐야 알겠지.”

잠시 대화가 끊겼다. 줄카는 얄팍한 잔에 담긴 포도주를 기울였고 아란딜 페레모어는 먼 들판에 시선을 던졌다.

“마지막입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넌 이곳에 계속 머무를 테고, 난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을 테니.”

어렵게 이어진 대화는 다시금 끊겼다. 얼마간의 침묵 후, 이번에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줄카였다.

“네 수명. 길어야 5년이다.”

“그런 것도 보이십니까?”

“생의 불꽃이 거의 사그라졌다.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아. 5년도 상당히 길게 잡은 것이야.”

“…그렇군요.”

“후회하지 않느냐?”

“어째서 후회하겠습니까? 그때의 결단 덕분에 5년씩이나 명이 늘었는데 말입니다.”

줄카가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아란딜 페레모어를 보았다.

“용혈(龍血)을 받아라.”

“명령입니까?”

“제안이다.”

“그럼 거절하겠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두렵지만, 괴물이 되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끝없이 심유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이 무심함이야말로 완벽한 비인(非人)의 그것이었다. 그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물속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이 두렵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하지 않았다. 그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인간으로서 죽고자 하는 의지를.

그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 침묵의 시간 끝에, 줄카가 입을 떼었다.

“쓸 데 없는 고집일 뿐이다.”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흥!”

줄카의 손이 벼락처럼 뻗어왔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감히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큼지막한 손이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후끈한 열기가 정수리로 흘러들어왔다.

“흐윽!”

후끈했던 열기는 점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지만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움켜잡은 줄카의 손이 그가 몸부림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입을 떡 벌린 채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허억!”

줄카가 손을 뗌과 동시에 아란딜 페레모어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흠뻑 젖은 상태였다.

“빈 것을 채웠다. 전처럼 원없이 칼을 휘두를 수는 없어도, 네 본래 명줄만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어째서…….”

“너희 가문이 내게 바친 충정의 대가다. 더해, 날 따르다 죽은 네 아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자. 네놈이 이렇게 가버리면 네 아비가 꿈속에 나올 것 같거든. 뭐 그래봐야 감히 내게 뭐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돌아서서 발코니를 빠져나가기 전, 줄카가 멈춰 섰다.

“말했듯, 전처럼 튼튼한 몸으로 살 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이제 칼은 놓고 유유자적 하며 살아라.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아란딜 페레모어는 얼마간 멍하니 있다가 일어나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러면서 몇 가닥 손에 묻은 머리카락은 진한 검은 색이었다.

“…….”

그 몇 올의 검은 머리카락을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내려보다, 그는 다시금 시선을 먼 밖으로 옮겼다. 한결 가벼워진 몸에 훈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거의 하루 종일 뻗어 있었네요. 요즘 조금 무리를 했었나 봅니다.

오늘 중으로, 아니면 내일 중으로 1부가 끝날 것 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