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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37화 (137/1,064)

<-- 정전, 종전 - 1부 종료 - -->

사내아이였다. 이름은 보리스. 아이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사내아이라면 붙이기로 한 이름이었다. 여자 아이면 자넷. 남자 아이면 보리스.

“미안해. 함께 있어줬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그간의 고생을 드러냈다. 군터는 아이를 낳는 산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힘든 순간에 함께 해주고 싶었다. 군터는 밝게 웃는 그녀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함께 했어야 했던 순간은 지나갔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부터 잘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내가 말했던 것은 어찌 되었느냐?”

“그것이…최대한 재촉했습니다만…….”

살라스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였다. 군터는 평소와는 달리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벨리사가 돌아왔다. 아이도 생겼다. 그러니 머물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살마드에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었다. 당장 군터조차도 성 바깥의 숙영지에서 병사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관방 정도야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군터는 그런 싸구려 같은 공간에 아내와 아이를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살라스에게 지시를 해두었다. 난잡한 외성이 아니라 그나마 치안이 잘 잡혀있는 내성 쪽에 자그마한 집 한 채라도 구할 수 있게 알아보라고 말이다. 돈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한에서 얼마든지 써도 괜찮다고까지 덧붙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구하지 못했다. 신중하면서도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살라스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했을 리도 없으니, 이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뜻이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되었다.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원래부터 살마드는 바크렌의 주도로서 상당한 땅값을 자랑하던 곳이다. 그런 곳이 전란까지 맞고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으니 돈이 있어도 집을 구하기는 지난한 일일 터. 다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무리한 지시였다.

‘하는 수 없군.’

아무리 전장에서 공을 좀 세웠다고는 하나, 현재까지 그는 일개 백인장에 불과했다. 벽지의 도시라면 모를까, 살마드에서는 백인장 정도 되어가지고는 제대로 된 자리 하나도 만들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지금 같은 때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키지는 않지만…….’

백인장의 지위로는 어렵다. 하지만 천인장이라면, 그것도 말레이드의 임시 사령관까지 맡았던 천인장이라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청탁이라든가 개인적인 부탁 같은 것은 해본 적도,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갓난아이를 안은 아내를 북적거리는 여관방에 재울 수는 없다. 그가 머물고 있는 숙영지에서 지내게 하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군터는 카리비온 하야신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한다면 내성에 자그마한 집 한 채 정도는 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려던 차였다.

“군터. 오랜만이군.”

“……?”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코르넬이 병사 둘을 양쪽에 거느린 채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군터는 그와 가볍게 포옹까지 하며 반가이 맞았다. 평소 이런 낯간지러운 표현은 좀처럼 하지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던 동료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포옹 한 번이 대수겠는가.

“살아있었군.”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

간만에 다시 본 코르넬의 얼굴에는 못 보던 흉터 두어 개가 더 생겨 있었다. 그의 말처럼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었다. 슬쩍 웃던 군터는 곧장 웃음을 지웠다.

“대장님께서는?”

“무탈하시네. 살마드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자네 소식을 수소문하게 하셨지. 나는 자네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온 것이야. 주공께서는 아직 자네가 이곳에 있는 걸 모르신다네.”

“그렇군. 다행이야.”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조각 거슬림이 풀어졌다. 살마드에 당도한 후에 곧장 했던 일이 로크와 막시밀리언의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알게 된 로크의 소식과는 달리 막시밀리언에 대한 소식은 자그마한 것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내심 그가 오테론에서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던 차였다.

“지금 바로 뵈러 가지 않겠나? 무척 좋아하실 것이야.”

“음. 그러지.”

후련한 마음으로 코르넬과 함께 막시밀리언이 머물고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야외의 숙영지로 향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코르넬이 이끄는 곳은 살마드의 내성 쪽이었다.

“어찌 된 건가? 대장님께선 숙영지에 머물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니. 주공께서는 지금 본가(本家)에 머물고 계신다네.”

“본가라고?”

“주공께서 상인 집안에서 나신 건 알고 있겠지?”

어찌 모르겠나.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않았고, 막시밀리언이 먼저 말해준 적도 없었지만 그가 제법 큰 상가(商家)의 자제임은 알고 있었다.

헌데 아무래도 그 집안이라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한 모양이었다. 내성에 들어서고서도 중심가 쪽으로 한참을 이동한 그들은 한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사람 두 명을 겹쳐 세워놓은 것만큼이나 높은 담벼락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도 다 보지 못할 만큼 길게 뻗어 있었다. 정문으로 보이는 문은 사병으로 보이는 이들 십 수 명이 지켜도 모자라게 보일 만큼 컸다.

“자, 들어가지.”

코르넬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군터를 이끌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던 사병들은 코르넬을 알아보고는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낯선 얼굴인 군터가 있음에도 검문을 하거나, 이상하게 보지도 않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코르넬의 지위가 확실하다는 뜻이리라.

문으로 들어서자 마차가 달려도 충분할 만큼 잘 넓게 깔린 길이 드러났다. 큼지막한 건물들도 여러 채가 보였다. 그 건물들을 바쁘게 오고 가는 이들의 수만 해도 수십이 넘어 보였다.

“어마어마하군.”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이름 높은 귀족 가문의 저택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도저히 일개 상인 가문의 저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 놀랄 것 없네. 이 정도 부지의 저택은 내성에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 값으로 따진다면 진짜 중심가에 위치한 것들 비할 바가 되지 않고.”

그렇게 말을 해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다. 살마드에서 복무할 때조차 ‘진짜 중심가’에는 가보지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내성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검문하는 병사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십인장 정도 되어서는 제지당하기 십상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백인장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쪽이네.”

막시밀리언의 거처는 십 수 개의 건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큰 건물 중 하나였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저택의 입구에서 봤던 것 같은 사병들이 아니라 정식 제국군 복색을 한 병사들이었다. 예전에 오테론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었는지, 낯이 익은 이들도 몇 보였다.

“주공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코르넬은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 보인 하인들이 그를 보며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새삼 코르넬이 다르게 보였다. 처음 살마드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오테론에서 지내면서도 그에 대해서 그다지 특별한 인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이들이 그를 향해 고개 숙이고, 그런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질감이 들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저 달라보였다. 어쩌면 백인장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이린 가문이라.’

묘한 기분을 느끼며 병사 둘이 지키고 선 큼직한 문 앞에 섰다. 코르넬이 눈짓하자 병사 중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

“군터!”

그 한 마디뿐이었다. 무슨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막시밀리언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와 끌어안았다. 그 행동이 너무 급작스러워 군터는 제대로 군례조차 취하지 못하고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상관에게 안겨버렸다…고는 하지만, 둘의 덩치 차이가 워낙에 큰 탓에 실제로는 끌어안은 막시밀리언이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무사했었군. 무사했어! 그때 자네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내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목소리에서부터 기쁨의 감정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막시밀리언은 곧 손님맞이용으로 보이는 탁긴 탁자 쪽 자리에 그를 앉게 하고는 하인을 시켜 다과를 내오게 했다.

“그래. 대체 그동안 어찌 지냈나? 내 북방에 있을 때도 자네를 몇 번이나 수소문해 보았지만 도무지 들리는 것이 없었다네.”

군터가 막시밀리언을 찾았던 것처럼, 그 또한 군터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저는…….”

군터는 그간의 이야기들을 축약하여 들려주었다. 오테론에서 출진하여 북상하던 중 초원의 대군과 맞닥뜨렸던 것, 그들의 발을 늦추려다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왔던 것. 오테론의 함락을 확인하고 멜루니악으로 향했던 것 등. 그 후의 이야기들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여 말한다고 했지만 말솜씨가 부족했던지, 아니면 그간의 일들이 너무 다사다난했었던 것인지 하인이 다과와 함께 내온 차가 다 식을 때가지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어허. 그런…….”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졌던 데에는 앞선 두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막시밀리언이 중간 중간에 던지는 질문도 큰 몫을 했다. 그는 군터의 이야기에 한껏 몰입한 듯했다. 특히 시오도크의 사교 무리를 사전에 처리한 일이나, 성주와 연을 텄다는 대목에서는 짙은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레이드에서 활약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군터가 자신의 활약 부분을 최대한 축소해서 이야기했음에도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공을 세웠군.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야. 어쩌면 이제 자네는 내 그늘 아래 있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 무슨…당치도 않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흘러가는 것을 보아야겠지만, 어쩌면 자네는 천인장의 자리에 오르게 될 지도 몰라. 그리 되면 나와 동급이 아니겠는가? 같은 지위에 있는 이를 내 어찌 수하로 둘 수 있겠나.”

“허면 백인장으로 계속 있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막시밀리언은 들어올리려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군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보는 군터의 눈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것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욕심이 없는가? 천인장에 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어찌 그럴 수 있나?”

“주공께서 제게 고락을 함께하겠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또한 그럴 뿐입니다.”

“자네는…나를 참 부끄럽게 만드는군.”

“예?”

“아니. 아닐세.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기쁜 날인데 심심하게 차나 홀짝 거릴 수는 없지 않겠나.”

막시밀리언은 하인을 시켜 주안상을 차리게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 군터의 눈치를 보고는 말을 아꼈다. 아마도 계집들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곧 흥겨운 술자리가 벌어졌다. 큼지막한 연회장에 푸짐한 음식들과 듣도 보도 못한 맛의 미주들이 가득 들어섰다. 그 화려한 술자리에 자리한 것은 막시밀리언과 군터, 그리고 코르넬뿐이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군터는 막시밀리언에게 내성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얻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본래는 카리비온 하야신에게 물을 것이었지만, 막시밀리언과 재회한 이상 굳이 그에게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우리 집안에만 해도 빈 건물이 너덧 채는 될 텐데, 그 중에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에 묵게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안 그래도 오테론을 나올 때 자네 식구들을 챙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네. 당시에 부하들을 보냈지만 그때는 이미 집이 비어있더군. 내가 너무 늦었던 게지. 어쨌거나 무사했다니 다행이야. 내 집이다 생각하고 얼마든지 묵게나. 하인들도 부족하지 않게 붙여주겠네. 오테론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데 대한 내 사과의 뜻이라고 생각해주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로써 마음 쓰였던 마지막 일도 깔끔하게 풀렸다. 맛 좋은 술이 더 달달하게 혀에 감기는 듯했다.

술을 진탕 마신 그 다음 날. 군터는 식구들을 제이린 가문의 저택으로 데려왔다.

========== 작품 후기 ==========

어제는 몸 상태도 별로고 쫓기듯 써서 올리느라 댓글에 대한 피드백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하여 오늘 몰아서 하겠습니다.

2부도 바로 들어갑니다. 1부 완결은 스토리상 나누는 것일 뿐이니까요.

완결은 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 낼 생각입니다.

재미있게 봐 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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