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 종전 - 1부 종료 - -->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 바깥에 무질서하게 늘어선 무수한 인파였다. 갑옷을 걸치지 않은, 관리로 보이는 이들이 대충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병사들을 이끌고 바삐 움직이며 인파를 통제 하고 있었다.
“콘실로! 콘실로에서 온 이들인가!”
“맞습니다!”
“저쪽으로 가 있게! 이제 곧 이동할 것이야!”
맹세컨대 군터는 이만한 인파를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일전에 베브로스에서 일어난 난을 진압하고 살마드로 돌아와 개선식을 할 때 보았던 시민들의 장사진도 대단하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보이는 광경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지.”
질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립한 군중이었지만 무장한 병력이 앞장서니 어렵지 않게 길이 열렸다. 곧 관리가 약간의 병력과 함께 그들을 맞았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으로 보아 제법 지위가 있는 자 같았다.
“말레이드에서 오셨습니까. 혹 카리비온 하야신 공이 아니신지.”
“맞소.”
관리는 깍듯이 고개 숙이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길게 늘어선 인파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 밑이 거뭇한 것이 꽤 오랫동안 격무에 시달린 듯했다.
“알란딜 페레모어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께서 당도하면 곧장 안내하라 하셨지요.”
“그런가.”
“자,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이끌고 오신 인원에 관한 일은 이제 저희 쪽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군터는 카리비온 하야신과 함께 관리를 따라 움직였다. 천인장들을 제외하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백인장은 그가 유일했다. 시오도크의 원군대장 자격으로 따라붙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레이드의 전투에서 대공을 세운 이후 카리비온 하야신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처참하군.’
관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군터는 무너진 성벽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크게 무너진 곳은 몇 군데 없었지만 자잘하게 상한 모습이며 눌러 붙은 핏자국들이 이 도시가 치룬 고된 싸움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곳은 이제 그의 기억 속 웅장하고 멋지기만 하던 살마드가 아니었다.
“이쪽입니다.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식이 이미 전해졌는지 미리 나온 병사들이 관사까지의 안내를 이어받았다.
그들이 안내한 곳은 아란딜 페레모어의 위명에 비해 다소 초라한 저택이었다. 카리비온 하야신과 병사들이 나눈 짤막한 대화를 듣자하니 아란딜 페레모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관사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아마도 전투 중에 부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루마리를 몇 십 개 씩 쌓아놓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본 순간, 그것이 아님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간만이군. 말레이드의 늙은 사령관이 눈부신 용전을 펼쳤다는 소식은 내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목소리를 듣고서야 앉아 있는 노인이 아란딜 페레모어임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그때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고, 그의 목소리도 그의 모습과 함께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외관만 보면 장군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할 처지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카리비온 하야신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그가 장년에서 노년 사이에 걸쳐 있다면 다시금 만난 아란딜 페레모어는 완연한 노인이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곱게 늙지 않았나?”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너스레를 떨면서 농담도 던졌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카리비온 하야신 이하 말레이드의 천인장들은 그의 푸석한 백발과 주름진 얼굴에서 굳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주름진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적이 너무 강했어. 이기려면, 살려면 어쩔 수 없었네. 애초에 그것을 위한 준비였으니, 잘 써먹은 셈이야. 이렇게 초라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잘린 목을 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적어도 이렇게 대화라도 나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겉이 늙어서인지 아란딜 페레모어는 정말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특출한 기도를 풍기지는 않았었지만, 지금은 아예 병석에 누운 촌부처럼 기력이 쇠해있음이 느껴졌다.
“흠. 저 호걸이 그 친구인가?”
아란딜 페레모어의 시선이 뒤편으로 옮겨가 군터에게 닿았다.
“이름이…군터라고 했었지? 기억하고 있다네. 처음 봤을 때도 범상치 않다 싶었는데, 내 제대로 보았었군. 아주 맹활약을 했다지?”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 아란딜 페레모어에게 칭찬의 말을 듣는다면, 바크렌의 무관이라면 누구라도 기쁨을 참지 못하리라. 군터 역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며 고개 숙였다.
“운이 따랐고, 사령관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아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의 대공이야. 몇 번째 줄에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공신명부에도 필히 이름을 올리게 되겠지.”
제국의 입장에서는 입맛이 쓴 전쟁이었고, 종전이 아닌 정전이지만 어쨌거나 쉴 틈이 주어졌으니 논공행상을 진행할 것이다. 공이 있는 자는 높이 세우고 과가 있는 자는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 중에서도 단순한 포상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큰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을 적어 그 공에 맞는 상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쓰이는 것이 바로 공신명부였다. 여기에 이름이 적힌 이들은 어지간하면 직위상승이 이루어지는데, 아란딜 페레모어는 바로 그것에 군터의 이름이 쓰일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군터는 가슴이 뛰었다.
사실 그의 이름이 공신명부에 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군주 줄카와 반군세력의 주력이 맞붙는 중심 전장에서 활약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한 도시를 공격해온 적군의 총대장을 베었으니까 말이다. 그 공을 헤아려보면 공신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아란딜 페레모어의 말처럼 몇 번째 줄에 이름이 적히느냐다. 위에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먼저 적힌다는 것이며, 그만큼 큰 공을 세웠음을 의미하니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도 크다.
아란딜 페레모어의 짤막한 치사가 있은 후, 그는 다시 카리비온 하야신을 비롯한 휘하 천인장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군터는 그들이 뭐라고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온통 공신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적히는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얼마만큼의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
살마드에 당도하고 급히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한 후(그래봐야 병사들의 숙영지를 마련하는 정도였지만) 군터는 즉시 로크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살마드의 상황이 워낙에 혼잡하다보니 사흘이 지나서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자식! 무사했구나!”
로크는 군터를 보자마자 밝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그러나 군터는 그럴 수 없었다.
“너…….”
로크는 군인의 복색이 아니었다. 왼쪽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짧은 옷자락만 펄럭였다.
“이거? 목숨 값 대신 치렀지.”
로크는 쓰게 웃었다. 상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팔 한쪽이 날아갔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터는 로크에게서 아란딜 페레모어의 모습이 겹쳐 보았다. 그들 모두, 이곳에서 목숨 값을 치른 것이다. 목숨 값에 비하면 싸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가볍지 않은 값을.
“코앞까지 떨어지는 칼을 팔로 막았어. 그래도 내 뼈가 제법 두꺼운지 머리까지 쪼개지지는 않더군.”
“퇴역한 거냐?”
“외팔이가 돼서 뭘 할 수 있겠냐?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장군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물러나야지. 그래도 십인장이었어서 그런지, 참전 수당인지 제법 두둑하게 한 몫 챙겼다. 상황이 좀 안정되면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야. 물론 지금은 마을이 무사한지 어떤지도 확인 못 하고 있지만.”
“내가 알아봐줄게.”
“그래주면 고맙고.”
퇴역한 십인장보다는 제법 끝발 날리는 백인장의 정보력이 당연히 더 우수하다. 어차피 로크가 아니라도 마을 사람들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나저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뭐, 사실 네 걱정은 그다지 안 했어. 너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로크와 씁쓸한 재회를 한 날. 군터는 간만에 머리끝까지 취기가 오를 정도로 마셨다. 불구가 되어버린 친구가 안쓰러워서, 그렇게 만든 놈과 힘을 잃고 초라해진 친구의 모습에 화가 나서. 그래서 마시고 또 마셨다. 로크가 탁자에 머리를 박고서도 혼자 잔을 수 없이 더 채우다가 기억을 잃었다.
*
살마드에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렌이 보낸 병사가 왔다. 멜루니악에 있던 그들도 살마드로 향하는 중이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군터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북쪽 성벽에 올랐다. 혹시나 멜루니악에서 오는 인파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보름하고도 이틀이 지난 이른 오후. 마침내 멜루니악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군터는 뛰어내리듯 성벽을 내려가 말을 달렸다. 단기로 질주하는 군터를 발견했는지 접근해오던 선두가 살짝 동요를 보였으나 군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닿기도 전에 인파에서 일단의 기마가 빠져나왔다. 할렌과 휘하 병사들이었다.
“대장님!”
“할렌. 벨리사는?”
“저쪽에 계십니다.”
뒤따라오지 않은 병사 두엇이 벨리사를 양 옆에서 호위하며 천천히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군터는 적장의 목을 베러 갈 때와 비슷한 속도로 말을 달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메마른 얼굴을 하고서도 그를 보며 환히 웃었다. 두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군터는 멈추지도 않은 쿠센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벨리사도 마찬가지로 말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인가 했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꼭 안고 있는 천 뭉치 같은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달리듯 내딛던 걸음이 뚝 멈췄다. 군터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벨리사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내미는 천 뭉치를 떨리는 손으로 건네받았다.
“당신의 아이에요.”
“…….”
얇은 천을 손으로 걷어내려다 멈췄다. 두어 번을 그러다가 숨을 멈추고 천천히, 부드럽게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고이 잠들어 있는 생명이 세상에 드러났다. 군터는 그 자그마한 것에 붙들린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멈춰 있던 숨이 트인 것은 그것이 미세하게 꼼지락거리면서였다.
홀린 듯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자그마한 이마를 쓸었다.
아비의 손길을 느끼는지, 아이가 자면서도 슬그머니 웃는 듯했다. 그에 군터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몸 상태가 영 별로네요. 요즘 갑작스레 쌀쌀해졌는데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