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 종전 - 1부 종료 - -->
이주 준비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없었다. 병사들을 미리 대기시키고, 최대한 식량을 챙기면서 백성들을 통제하면 끝이다.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군터는 따로 할렌을 불렀다.
“멜루니악으로 가라.”
“마님을 모셔오면 됩니까?”
척하면 척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못 짚었다.
“아니. 장거리를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이주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혼란스러워지겠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네가 벨리사를 지켜라.”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직접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끄는 수하들이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당장에 기병 수십도 아쉬운 판국인데 군터는 거기에 더해 시오도크와 멜루니악의 병력까지 함께 이끌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 십인대 하나를 빼서 쓰는 것도 카리비온 하야신이 마음을 써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로 움직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주가 끝나고 나면 나중에 두어 놈 보내 소식을 전하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허면 그때 뵙지요.”
“그래. 부탁한다.”
수하들에 대한 믿음이야 모두 굳건하지만, 그 중에서도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가슴속에 박힌 가시 같던 벨리사의 일을 할렌에게 맡기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또 살마드인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겠지만, 우선 살마드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지독한 전투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의 살마드는 그의 기억 속에 그 모습은 아닐 터였다.
‘로크 녀석. 무사하겠지.’
살마드에는 그의 친우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1년도 넘은 것 같았다. 살마드에서 복무하는 녀석이니 아마 살마드에서 벌어진 전투에도 참전했을 터. 부디 무탈하게 살아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
이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령관 카리비온 하야신이 시민들과 이주민들(전선 이북에서 넘어온 이들)을 모아두고 간략한 설명을 마쳤을 때는 다소 소란이 일기도 했지만 도시를 포위한 대병을 앞에 둔 적도 있는 이들인 만큼,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민병으로 동원되었거나, 된 적이 있는 만큼 과도하게 우왕좌왕 하는 일은 없었다.
“살마드까지는 먼 길이야. 정전협정을 맺었다고는 하나, 도적으로 위장해 들이칠지도 모르지.”
그런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을 했다가는 정전이고 뭐고 바로 다시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제국에서 협정을 맺으며 이미 한 번 체면을 구긴 마당에 그런 얕은 수작을 부릴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실리건 뭐건 제쳐두고 들이 받아버릴 것이다. 그리 되면 반군 세력도 좋지 않을 터. 카리비온 하야신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은 살마드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풀지 말라는 의미였다.
“염려 마십시오. 경계는 철저히 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정전이건만, 병사들과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종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싸움이 다 끝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그간 너무도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의 끈이 조금 느슨해지는 상황이 오니 지나칠 정도로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은밀한 지시를 받은 장교들이 휘하 병사들을 다잡았고, 그 병사들은 또 다시 그 아래의 병사들을 다잡았다. 경험 많은 병사들이 거친 욕설과 아직까지 날이 선 살기를 적절히 섞어주면 그 밑으로는 윗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조절되어갔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도 잠시.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집을 버리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니 그제야 그들은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헌데 사령관. 어찌하여 살마드입니까?”
군터는 이제껏 열심히 지킨 도시를 뒤로하고 꼬리를 말듯 떠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어찌하여 말레이드에서 몇 달씩이나 걸리는 살마드까지 가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의문점은 모두가 갖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나서서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그냥 있으면 살마드에 도착할 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 기세라, 본의 아니게 군터가 대표로 나서서 묻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쎄.”
모두가 묻기를 꺼려했던 이유가 있었다. 힘들여 지킨 도시를 그냥 버리고 떠나는 것은 일개 병졸에게도 불쾌한 일이지만, 도시 자체를 책임지다시피 했던 사령관의 심정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무리 명령이 내려왔고, 상명하복을 충실히 따르는 군인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요 며칠 이주를 준비하는 동안 카리비온 하야신의 안색은 전에 없이 메말라 있었고, 그의 불편한 심기가 휘하 무관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군터 역시 그것을 잘 알았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기분이 더러운 것은 사령관부터 그 휘하 무관, 말단 병졸에 이르기까지 다 마찬가지였다. 명령이 내려와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카리비온 하야신 또한 그들에게 화난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령을 내린 아란딜 페레모어나 군주 줄카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그 역시 사람인 것을.
카리비온 하야신은 짜증난 상황에 물음을 던지는 부하를 책하지 않았다. 그저 짤막히 한숨을 내쉴 뿐.
“장기전으로 돌입한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예? 그게 무슨…….”
“말레이드도 그렇고, 이주가 시작된 지역들 모두, 곧 수복할 것이라면 굳이 멀리 떨어뜨려 놓을 필요는 없지. 허나 많은 백성들을 굳이 살마드까지 이동시킨다는 것은 신경 써서 재배치를 하겠다는 뜻.”
“아아.”
거기까지 했을 때는 군터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단 정전을 맺었지만 곧 다시 전쟁을 재개할 거라면, 다시 말해 반군 세력을 몰아낼 자신이나 계획이 있었다면 굳이 이주한 백성들을 후방 깊숙이 끌어올 필요가 없다. 수복한 땅에 다시 가서 살게 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반군 세력에게 점거 당한 땅을 단시일 내에 되찾을 계획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주한 백성들을 새로이 정착시키는 작업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다.
‘생각보다는 실망인데.’
그의 속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동료 무관들이나 카리비온 하야신이 들었다면 대번에 노성을 질렀겠지만, 군터는 내심 제국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본래 제국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따로 그에게 제국에 대해 깊이 알려준 이가 없었기 때문에(아쿼러즈로서 거친 ‘교화과정’에서 기억나는 거라곤 교육관이라는 작자가 골백번도 더한 ‘제국은 위대하다’는 말 밖에 없었다) 그가 제국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아주 막연한 개념. 이를테면 제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하고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랬는데, 그 거대하고 강한 제국이 기껏 망한 나라의 잔당과 초원에서 넘어온 3만 기마를 어쩌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제국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반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고, 신비한 힘을 쓰는 초원의 대군이 막강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뭐랄까…제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랄까? 그저 거대하게만 보이던 제국의 실체가 이제는 좀 보이는 것 같았다.
‘거인에게는 거인의 사정이 있다고 했나.’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한 사람이 등 뒤에 붙은 날랜 벌레 한 마리를 잡지 못해 끙끙댄다. 지금의 제국이 딱 그 짝이었다.
“출발하지.”
나흘에 걸친 준비 끝에 말레이드의 백성들은 군대와 함께 살마드로의 길에 올랐다. 급조한 것까지 합해 수레가 수백 대였고, 무장하지 않은 백성의 수가 이만을 헤아렸다. 반군과의 전투에서 꽤나 줄어나갔는데도 그 정도였다. 본래 말레이드의 시민들에 더해 각지에서 피난을 온 백성들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뒤로 쳐지는 자는 챙기지 않는다.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비정하고 냉혹한 말에 백성들은 이를 악 물었다. 그들은 울지 않았고 투정부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포위된 도시에서 장기간 버티며 날카롭게 갈린 독기는 이번에도 제 몫을 해냈다.
그들은 우는 대신 수레를 밀었고, 투정의 소리를 내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내딛었다. 말레이드의 성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징징거리지 않아 좋군.’
머리가 희고 허리가 굽은 노인도, 어미의 손을 붙잡고 짧은 다리를 놀리는 어린 아이도, 누구 하나 눈에 독기 없는 이가 드물었다. 군터가 보기에 그들은 실로 강했다. 두려움으로 지새운 매일 밤이 그들을 이토록 강하게 벼려낸 것일까.
터벅터벅 제 갈길 알아서 가는 쿠센 위에 앉아 긴 행렬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부모 없이 혼자 걷던 한 아이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돌부리에 걸렸는지, 갑자기 풀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군터는 쿠센을 몰아 쓰러진 아이 곁으로 갔다. 그가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백성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거나 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갔다.
“힘이 드느냐?”
“괜찮습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다시 걷는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무릎에 흙을 묻힐 것 같았다.
“혼자더냐? 부모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는 혼자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아는 체를 하는 이도, 부축해주는 이도 없었다. 부모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것이다.
“…….”
척 보니 꽤 오랫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한 듯 몸이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필시 전쟁 통에 말레이드로 흘러들어온 무수한 피난민 중 하나였으리라.
무슨 변덕이었는지, 군터는 안장에 매단 주머니에서 육포 두어 개를 꺼내 아이에게 던졌다. 아이는 엉거주춤 하면서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입에 물고 천천히 씹어라. 힘이 좀 날게다.”
그야말로 변덕이었다. 곧장 돌아선 군터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아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한 번 눈 먼 도적떼들이 얼씬거리는 것을 쫓아낸 뒤로는 행렬의 보호에 전념 하느라 꾀죄죄한 아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석 달 후.
1만을 훌쩍 넘기는 대인원은 마침내 살마드에 당도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몇 번 글을 엎었습니다. 원래는 여러 시점에서 정전협약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려고 했었는데, 그러려니 짧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글이 늘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군터의 시점에서만 진행하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러다보니 전개가 너무 급속도로 나가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일전에 지적 받은 사항도 있고 굳이 모든 것을 다 깔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그냥 이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1부가 끝납니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안에는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마지막까지 쭉 달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