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주, 줄카 -->
군터가 한바탕 휘저은 뒤에도 말레이드를 포위한 반군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이 도시를 함락시킬 생각이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싸울 거면 싸우고, 물러날 거면 물러날 일이지 뭐한다고 병량을 축내면서 저러는지 모르겠군.”
카리비온 하야신도 저들의 의중을 모르겠다고 했다. 혜안을 지닌 사령관도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반군이 취하는 행동이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타당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을 때, 마침내 반군은 포위를 풀고 풀러났다. 참으로 어이없으면서도 허무한 결과였다. 혹여 함정이 아닐까 싶어 이리저리 탐마를 뿌렸지만 얻은 결론은, 정말로 반군이 물러갔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포위가 풀렸으므로 사령관인 카리비온 하야신은 곧장 인근의 성들과 도시들에 전령을 보냈다. 그러는 한편 탐마를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답답하군.”
무관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카리비온 하야신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반군이 포위진을 치고 있을 때야 눈앞의 적만 생각하면 되니 딱히 복잡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적이 물러나고 포위가 풀린 지금은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거의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고립되었던 말레이온이기에 당장 전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우위의 병력으로 포위를 하고 있던 반군이 스스로 물러갔으므로, 전황이 꽤 괜찮게 흘러가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물론 희망사항이 어느 정도 가미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적극적으로 전령과 탐마를 뿌리기 시작하고 열흘 정도가 흘렀을 때, 열심히 말을 달려 돌아온 전령이 큼지막한 소식 하나를 전했다. 그러나 전령이 가져온 소식도 큼지막했지만, 카리비온 하야신을 비롯한 말레이드의 무관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소식 이전에 두 달여 간 있었던 일들이었다. 반군에 포위당하여 고립되어있던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 중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과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군주 줄카의 참전 소식이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으며, 또한 다른 모든 좋은 소식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큰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와 버금가게 놀라웠던 것은, 줄카가 휘하의 용아들을 이끌고 참전했음에도 여전히 팽팽한 전황이었다. 야만인들을 살마드에서 몰아내기는 했으나 이후 야만인들과 반군, 사교도들의 연합군과 맞붙은 핸키스트 평야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대치를 이어갔다. 그 사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반란군(말이 반란군이지 실상은 도적들에 불과한)들은 점점 더 세를 키웠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멀쩡한 지역을 찾기가 더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믿기 힘들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다시 말해 야만인과 반군, 사교도의 무리가 줄카가 이끄는 제국군과 대등하게 맞서고 도적들이 겁을 상실한 채 망국의 깃발을 들고 창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제국군의 병력 부족 때문이었다. 아무리 군신으로 추앙받는 제국의 군주라도 이끌 병력이 있어야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법인데, 바크렌의 군대는 수도 적고 그마저도 정예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에 반해 제국에 맞서는 연합군은 군대의 질은 오합지졸이라 할지라도 수가 많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외부에서의 원군이 바크렌에 들어설 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레 주 경계에 생긴 결계는 바크렌을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그 어떤 이름 높은 주술사가 온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적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바크렌의 옛 주신, 바칼의 힘을 이용해서 말이다.
‘바칼.’
그 이름이 나온 대목에서 군터는 속으로 되뇌었다.
익숙한 이름이다. 어떤 이들이 종종 입에 담곤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바칼이라는 이름은 그의 운명에 꽤나 선명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허면 지금 줄카 전하께서는?”
“파이메인 강에서 적과 대치중이십니다.”
“파이메인 강?”
“보름여에 걸친 폭우로 기존의 지류 몇 개가 이어져 새로 생겨난 강입니다.”
어찌나 강폭이 넓고 길게 뻗어 있는지, 며칠을 달려도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대하(大河)였다. 뿐만 아니라 물살이 어찌나 강한지 어지간한 뗏목 같은 것으로는 건널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라고도 했다.
“폭우? 그것도 보름씩이나?”
바크렌은 본래 비가 많은 지방이 아니다. 특히 북부로 갈수록 비보다는 눈이 많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보름여에 걸친 폭우는 분명 비정상적이다. 무언가 또 술법적인 힘이 작용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 앞으로 저희는 어찌해야 할지.”
“달라지는 것은 없네. 숨통이 좀 트였을 뿐, 우리의 방침은 이제까지와 같다.”
당장 말레이드에서 가장 가까운 티레토가 사교도의 손에 떨어졌고, 인근의 다른 성들도 이미 적의 손에 떨어졌거나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 주변에서는 오직 말레이드만이 자력으로 버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여기서 밖으로 힘을 쓴다는 것은 무리다. 명령이라도 떨어졌다면 모를까.
“당분간은 말레이드 사수에만 집중하면서 관망하도록 하지.”
전력이 부족한 말레이드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
사령관인 카리비온 하야신은 관망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휘하 무관들에게도 그리 말해 두었으나 군터는 매일같이 무장과 부하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지금은 지방정부와 연통이 단절되어 있어 관망할 수밖에 없지만, 혹여 언제든 명령이 내려온다면 움직이게 될 것이라 여겼다. 외딴 섬과 같은 형국이 되어버린 말레이드는 위태로이 고립되어 있는 모양새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적의 뒤를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전력이 부족해 도시를 사수하는 데 급급하지만, 한 번 무리를 한다면 날카로운 창을 찔러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백. 아니, 단 삼백이라도 좋았다. 일전에 반군의 본진을 휘저었을 때처럼 기병 삼백만 주어진다면 한 번 제대로 날뛰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그런 생각을 속에 품고 조용히 칼을 갈던 와중. 급보가 들어왔다.
“보고! 줄카 전하께서 적 수뇌와 회담 끝에 정전협약을 맺으셨습니다!”
“뭐라……?”
“회담은 파이메인 강에서 이루어졌으며, 정전 기간은 반 년. 그에 따라 영토조정이 이루어지며 파이메인 이북의 제국민들은 강남(江南)으로 이주하라는 명이십니다! 또한 여기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께서 사령관께 전하는 서신이…….”
도무지 뜬금없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얼이 빠져있던 것도 잠시. 카리비온 하야신이 전령에게서 서신을 받아들고 그것을 읽어가기 시작하자 좌중의 소란도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은 서신을 읽고 있는 카리비온 하야신에게 집중 되었다.
“…그래. 그렇군.”다 읽은 서신을 내려놓고서, 카리비온 하야신은 무릎 꿇은 채 대기하고 있는 전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수고했지만 바로 다시 움직여줘야겠다. 내 곧 답신을 써서 줄 터이니 그것을 장군께 전하거라.”
“옛!”
전령이 물러가고, 그는 곧장 휘하 무관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아줘야 했다. 가장 먼저 참지 못하고 입을 뗀 것은 군터였다. 내심 또 다른 싸움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느닷없는 정전 선언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령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다 설명하자면 기니 간단히 설명하지. 이 정전협상은 아국의 사정상 불가피한 것이네. 현재 아국은 이런 변경의 실속 없는 전쟁에 힘을 쓸 수 없는 형편이거든. 단기간에 끝내버렸으면 모를까, 이렇게 장기전의 형태로 돌입한 이상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게 무슨…….”
“말했듯, 다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네. 일단은 움직일 준비를 하도록 하지. 이주 준비를 해야 하네.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 서두르되 조용히 진행하도록 하지. 협약이 체결된 이상은 적들도 우리를 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경계를 늦추지는 말도록.”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명이 떨어진 이상은 따라야 했다. 군터는 수하들에게 일러 이동 준비와 도시 내 치안 통제를 지시하는 한편,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수하들 중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모페이브와 살라스를 불러 의논했다.
“확실히 느닷없긴 하군요. 이번 정전협약은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국의 위신이 걸린 일이니까 말입니다.”
무슨 단순한 도적떼도 아니고, 제국에 반기를 든 반군이다. 그것도 일찍이 망해서 없어진 망국의 잔당들이 잊힌 깃발을 다시 내걸고 일으킨 복권 전쟁이다. 이런 움직임을 그대로 두고 볼 경우, 살라스의 말마따나 제국의 위신이 크게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용인할 만큼 제국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겠지요. 애초 제국의 현 사정이야말로 베이고르가 이 전쟁을 기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군터가 모페이브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사안에 대해 모페이브의 말은 신뢰가 갔다. 한때 그는 반군 세력에 몸을 담고 있었고, 그것도 꽤 높은 자리에 있던 내부자였다.
“제국의 사정?”
“제국은 땅이 넓습니다. 그냥 넓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광활하지요. 그러다보니 국경도 많고 전선도 많은데, 그 중에서 자잘한 것은 제외하고 제국이 크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쪽의 아바시스 왕국과의 전선 바로 그런 곳이지요. 아바시스는 제국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을 치러온 적대국입니다. 당장 제국의 정병 수십만이 아바시스와의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것만 봐도 제국이 그곳을 어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흠.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지? 어차피 그 전선이 남쪽이라면 북부와는 그다지 상관없지 않나. 이곳의 전쟁에 남쪽의 병력을 끌어다 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차피 전쟁이 격화된다면 투입되는 전력은 제국의 기준으로 북부에 위치한 지방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쪽에 위치한 아바시스와의 전선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대표적으로 꼽았을 때 아바시스라는 것이고, 그보다는 못해도 역시 제국 입장에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전선이 그 외에도 몇 군데가 더 있습니다.”
“제국이 그렇게 적이 많은가? 반군 하나 마음대로 쓸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국이 큰 만큼 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평소였다면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제국의 상황은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베이고르는 그들이 어느 정도 바크렌에서 소란을 피우면 각지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었습니다.”
“움직임?”
“제국은 꾸준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왔습니다. 수도에서 먼 변경일수록 병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땅이지요. 그런 만큼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아도 제국에 불복하는 세력들이 다수 암약하고 있습니다. 바크렌만 봐도 베이고르의 잔당들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들은 초원의 힘을 등에 업고 일어섰지만, 그들이 바크렌에서 전쟁을 이어가며 북부의 제국군을 상대해주면 다른 지방에서도 들고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 제국 북부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져들게 되겠지요.”
“그게 진정 가능한 일입니까?”
살라스가 물었다. 모페이브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으나, 너무 그 규모가 방대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전혀 계획에도 없던 제국의 군주가 나타나는 바람에 바크렌의 완전 점령은 물 건너갔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렇게 정전협상까지 이끌어낸 셈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제국에 있어 지방군 몇 만 정도가 한 지역에 묶이는 것은 그리 큰 손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군주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여섯 군주야말로 제국이 쓸 수 있는 최강의 패입니다. 그런 패를 별 실득도 업는 변경 지역에 묶어둘 수는 없겠지요.”
모페이브는 이번 정전협상이 군주 줄카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군주가 아니라 다른 고위 장군이었다면 제국은 계속 전쟁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 정도만 되어도 부담이 덜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군주는 다르다.
“군주는…이런 전장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몸값이 비쌉니다.”
모페이브는 확신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작품 후기 ==========
치료 받으면서 다시금 건강이 최고라는 걸 느꼈습니다.
평소 괜찮으니까 소홀하다가 한 번 망가지고 나면 고치는 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그만큼 노력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멀쩡해지기는 힘들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인간의 몸뚱이라는 것이 컴퓨터 부품처럼 어디 고장나면 바꿔끼고, 아니면 아예 새로 장만할 수 있는 편리한 것이 아닌데 말이죠...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항상 건강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고장나고 나면 정말 삶이 우울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