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주, 줄카 -->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하루, 이틀, 닷새, 열흘, 보름.
전장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날들 동안 도시 바깥에 주둔한 반군은 여전히 쳐들어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정군에다 수가 많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규모 있는 병력인 만큼 물자 소비도 상당할 텐데, 굳이 하는 것도 없이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저의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카리비온 하야신은 성벽위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사실 그 전부터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같은 일을 하곤 했으나, 이제는 하루에 많으면 열 번도 오르곤 했다. 군터는 그것이 그의 초조한 속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리비온 하야신이 성벽 위에 오를 때마다 함께하곤 했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짤막하게 대화도 나누었다.
“총대장이 죽고 급히 물러갈 때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보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어찌 아십니까?”
사람 하나라면 앞에 두고 표정을 뜯어보며 그의 감정 상태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 그것도 수천이 넘어가는 군대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그들의 상황을 추측한다는 것은 군터에게 있어 조금은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지. 병졸들의 표정, 걸음걸이, 무기를 든 자세, 이동할 때 움직이는 정도, 그 모든 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굳이 그렇게 하나하나 분리할 필요 없이 진영에 흩날리는 깃발만 봐도 군기(軍氣)를 느낄 수 있다네.”
“저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이야기로군요.”
“더 많이 경험하다보면 언젠가 자연스레 알게 되네. 자네 나이에 그런 것을 안다는 것도 이상하지.”
엄밀히 말해 나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크게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계속 보지 않는다면 전장에서 하염없이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무슨 안목이 트이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카리비온 하야신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후부터 군터는 성벽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전처럼 순회를 돌며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아니라 한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적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사령관이 말한 것들을 보려고 애썼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시력은 보통 사람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어서 적군 병사들의 행동거지까지 어느 정도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군.’
도시 내의 아군 병사들과는 달리 반군 병사들의 얼굴에는 불안감, 혹은 두려움이 비치지 않았다. 군터는 전장에서 보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안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안도할 수 있는 이유라면 하나뿐일 것이다.
‘쳐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적어도 근시일 내에는.’
말단 병사들이 지휘부의 생각을 알 리는 없다. 그들은 지휘관들이 걸으라 하면 걷고, 뛰라 하면 뛰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개새끼도 주인의 심기를 헤아리는데, 사람인 병사들이 지휘부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겠는가. 저것은 결코 전투를 앞둔 군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병든 닭 새끼들 마냥 쳐져있군.’
문득 든 생각이었다. 항시 긴장 상태인 자신들과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을 보고 든 심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적으로 든 생각을 곰곰이 되새김질 하다 보니 점점 왜 안 되겠냐 싶어졌다.
판단을 내린 군터는 즉시 카리비온 하야신을 찾아갔다.
“음? 무슨 일인가?”
“사령관. 적들이 아주 태만할 정도로 풀어져 있습니다. 군기는 느슨하고, 병사들은 방만합니다. 날랜 기병 이백 정도로 야습을 가한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락하신다면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야습?”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그러니까 거의 최악의 상황에서 다수의 적에게 포위된 도시 안의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우려부터 표할 것이다. 괜히 가만히 있는 적을 자극한다고 말이다.
허나 카리비온 하야신은 그런 일반적인 지휘관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자였다. 그는 군터의 입에서 나온 야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우려보다는 흥미를 보였고,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수염을 쓸었다.
“내 일찍이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 사람이 안 좋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급해진다고 말일세. 다급해지면 악수를 내기 쉽다고도 말했고.”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악수일지는 모르나, 저는 다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가능하겠다 싶어 사령관께 여쭙고자 온 것입니다.”
“한 번, 아니. 두 번 적진을 휘저었다고 해서 쉽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자네가 기병을 이끌고 가서 고립되어 당하기라도 한다면, 적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도시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르네. 괜히 불씨를 당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어차피 싸우면 죽든가 죽이든가,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자네의 간은 무슨 쇳덩이로 되어 있는가? 도무지 겁이 없군 그래.”
갓난아이에게는 의자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허나 성인에게는 그저 가벼운 장난일 뿐이다. 결국 두려움이란 것은 위험을 앞에 두고 생기는 법이고, 위험이라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니.
군터는 이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허나 그것을 말하면 자칫 오만하게 비춰질까 싶어 감탄하는 사령관을 앞에 두고 묵묵히 있었다.
“좋아. 허락하지. 한 번 해보게나.”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 바로.”
“그리하게. 인원 선별은 자네가 직접 할 텐가?”
“허락하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그리 하게.”
카리비온 하야신의 허락을 득한 군터는 곧바로 인원 선별에 나섰다. 자신의 휘하 병사들과 각 부대에서 용맹하고 말을 탈 줄 아는 이들을 모아 이백을 꾸렸다. 그들은 오늘 밤 야습을 가한다는 말에 놀랐지만 누구 하나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을 비치지는 않았다. 원래 명령이 떨어지면 아무리 험한 일이라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정예였던 데다, 이미 얼마 전에 군터가 보여준 대활약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운 좋게 그럴싸한 놈 목이라도 벤다면 완전 영웅취급 받겠는데?”
“아아. 틀림없지. 우리가 성공하고 돌아오면 아군의 기세가 확 살아날 것이야. 혹시 모르지. 사령관께서 후한 상을 내리실지도.”
“난 다른 것보다 계집이나 좀 안아봤으면 좋겠군. 하도 오랫동안 일 없이 지내니, 조금 있으면 내 아랫도리가 썩어버릴 것 같아.”
“글쎄. 사령관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실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정 급하면 과부들이나 노려보라고.”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병사들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군터는 과부 운운한 병사들을 슬쩍 흘겨봤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좋게 생각하면 저런 헛소리들도 저들 나름의 긴장 완화법인지도 모른다. 괜히 일을 앞두고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이 살아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게 날이 지고 밤이 왔다.
야습을 위해 미리 푹 쉬어둔 군터와 병사들은 은밀히 성문을 나섰다. 물론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고 해도 적들이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다면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여 그들은 성문을 나서자마자 빠르게 적진을 향해 달렸다. 미리 말발굽에다 풀을 뭉쳐서 엮어 놓았기에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시간문제였다.
말이 달리면 달릴수록 엮어놓은 풀들이 갈리고 빠져서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적이다!”
다행스럽게도 적들은 야습 부대의 존재를 제법 늦게 알아차렸다. 그들이 부산을 떨며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군터와 병사들은 그들 진영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내 뒤만 쫓아와라!”
군터는 큰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적장이 가까운 곳에 보인다면 목을 가져가지 않을 이유야 없지만, 적장의 목을 베겠다고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미리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눈 사항이기도 했다.
‘사기진작을 위한 활약. 딱 그 정도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는 자꾸만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꾸준히 눌러주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크아악!”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처음 적진에 돌입하는 한 번이었다. 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혼란에 빠져 진형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 군터는 최고속도로 적진 중앙을 돌파했다. 그러면서 적장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혼란 속에서 병사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은 하급 장교들일 뿐, 장군으로 보이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일전의 일이 있어 몸조심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능한 자라 아직까지 나설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빠져나간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미련을 둘 수는 없었다. 카리비온 하야신이 당부한 것처럼 이번 야습의 목적은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보다 피해를 덜 입고 빠져나오는 데 있었다. 군터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적이 가장 적어 보이는 방향으로 쿠센을 몰았다.
칸젤이 어둠 속에서 번뜩일 때마다 목 없는 시체가 쓰러졌다. 때로는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가는 시체도 있었다. 뭐가 되었건, 한 번의 번뜩임에 최소 하나의 목숨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적병의 모습은 여전히 소름끼쳤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그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야습은 대성공이었다. 군터와 병사들은 적진을 한바탕 크게 휘저어 정신을 쏙 빼주었고, 그 소란은 멀리 떨어진 말레이드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시끌벅적했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이곳에서 자네와 같은 호걸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카리비온 하야신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의 야습은 혁혁한 성과를 냈으면서도 사상자가 전무했던 것이다. 물론 자잘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제법 있었지만 사망자는 물론이고 중상자라고 할 만한 이도 하나 없었다. 이러니 사령관으로서 기뻐할 밖에.
“믿고 맡겨주신 덕분입니다.”
군터가 들뜨는 기색 없이 정중히 군례를 취하니 카리비온 하야신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그는 몇 번이고 군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야습에 참여했던 모든 병사들에게 성찬을 베풀었다. 심지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술까지 내려주었다. 그가 얼마나 이번 야습을 기껍게 생각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단 이백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적진을 보기 좋게 휘젓고 돌아오니 말레이드의 모든 군졸들의 사기가 높이 솟구쳤다. 두려움과 피로로 온통 물들어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용기와 생기가 감돌았다. 어수룩하던 민병들도 제법 군인 같은 태를 내며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한 번의 야습으로 생긴 효과가 너무 커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런 것을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설프지만 힘 있는 군례를 취한 민병들을 지나쳤을 때, 군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살라스가 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대장님께서는 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신 겁니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스스로 쌓아올리는 것이다. 남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스스로 쌓아올리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변의 환경이라던가, 여러 가지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요.”
‘다를 바 없군.’
병사나 일반 시민들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모두 사람이 아닌가. 사람은 강하면 강하지만, 약하면 한없이 약하다. 특히 몸뚱이보다도 이 마음이라는 놈이 어지간히도 말랑말랑한가 보다. 잘 흔들리고, 상처도 쉽게 받고, 한 번 자극을 받으면 끝도 없이 뛰어오르고. 무엇보다 남에게 기대려 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군.’
카리비온 하야신을 보면, 그는 절대로 수하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매사에 진지하게 반응은 해도 결코 들뜨거나, 특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그런 것들이 그의 진실한 모습이라 보았으나 이제 와 생각하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흔들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흔들리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그를 지탱했던 것은 아마도, 위에 서서 이끄는 자의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배우는군.’
역시 카리비온 하야신은 좋은 무장이었다. 그에게는 배울 것이 많았다.
군터는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야겠다고, 만약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훔쳐서라도 배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 작품 후기 ==========
늘 감사합니다.
내일은 연재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허리 치료를 받아야 해서... 한 번 받고 나면 그날은 거의 죽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