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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32화 (132/1,064)

<-- 군주, 줄카 -->

“대족장. 어째서입니까?”

철군을 서두르던 밤. 오른쪽 눈을 붕대로 감싼 포라칸이 드물게 먼저 목소리를 냈다. 언성도 조금은 높아져 있었다. 또한 전신에서는 진득한 투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감정 조절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불경이었지만 타르가이 베르겐은 너그러이 이해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없다. 한쪽 눈이 박살이 난 것도 난 것이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제국의 군주에게 당한 치욕적 패배였다. 지금 포라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눈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처절한 패배에 대한 굴욕감이었다.

그는 설욕을 원하고 있었다. 타르가이 베르겐 자신 또한 그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사감은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자와 휘하 병사들이 강하다한들, 전력은 이쪽이 우위입니다. 사흘…아니, 이틀이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에겐 뭐가 남지?”

서늘한 대꾸에 포라칸의 말문이 막혔다.

“무수한 피해가 남겠지. 폐허가 된 도시를 손에 넣고, 우리는 숱한 형제들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우리가 얻으려 하는 것이 폐허가 된 도시인가? 아니면 몰살당한 제국군의 시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 자의 목? 그것들을 다 가진다고 해서 우리에게 남는 게 뭐지?”

포라칸의 숨이 거칠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낼 수 없었다. 그가 전에 없이 흥분했다면, 타르가이 베르겐 역시 전에 없이 서늘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고자 했던 건 우리 민족의 번영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상처뿐인 승리가 아니란 말이다.”

“그 말씀은?”

“우리가 여기서 피를 흘리고 전력이 약화되면 누구에게 이득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베이고르 놈들과 우리가 연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힘이 있고 놈들에게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던 것이란 말이다. 허나 여기서 우리가 힘을 잃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 되겠나.”

“설마 베이고르 놈들이 돌아서기라도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감히 놈들이 수작질을 부리려 한다면 제가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그거야말로 모든 걸 잃는 지름길이지.”

타르가이 베르겐은 얼음장 같던 표정을 풀고 이마를 짚었다.

“제국은 현재 여러 국경에서 마찰을 빚는 중이다. 때문에 놈들에게 있어서는 변방에 불과한 이곳까지 군사를 낼 이유도, 여력도 없지.”

그것이야말로 베이고르와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제국이 당장 손을 쓰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군을 일으켜 단숨에 살마드까지 장악하고, 나아가 바크렌 전역을 수중에 넣어도 제국은 그저 변방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변란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또,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당장 병력을 내어 토벌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계산으로는 그랬다.

허나 변수가 생겨버렸다. 이제까지의 변수는 변수도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변수가.

‘설마하니 제국의 군주가, 이런 곳에 나타날 줄은.’

제국의 군주라는 작자들은 자신들만의 군대를 가지고 각자의 영지(領地)에서 머물거나, 아니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전장을 전전한다고 들었다. 절대로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 이들인 것이다. 설령, 정말 만에 하나 황제가 명을 내려 움직였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나타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이미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변수에 대해 대응을 해야 한다.

일단 살마드군과 합류하기 전에 제거하는 방법은 실패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만약 제거에 성공했다고 해도 문제였다. 제국에게 있어 변방 오지의 땅 하나를 잃는 것과 군주 하나를 잃는 것의 의미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클 테니까 말이다. 당장에 어거지로라도 병력을 끌어모아 토벌군을 급파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제는 제거하려고 해도 힘들다.’

그래도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포라칸에게 말했듯, 그렇게 해서 얻을 것이 전무했다. 기껏해야 군주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깃거리 하나 정도? 물론 그 대가로 제국의 적의를 한 몸에 받게 되겠지. 물론 이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전력의 온존. 그리고…….’

그의 시선이 조잡한 나무 탁자 위의 지도로 향했다.‘

*

초원의 군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줄카는 명을 내렸다.

“따라간다.”

“위험합니다. 유인책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아란딜 페레모어만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그에 경악한 좌중의 시선이 꽂혔다. 그들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제정신인가?’ 정도겠지.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말이다.

그들은 내심 줄카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견했다. 어쩌면 당장 뒤편에 놓은 거대한 검을 들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줄카는 전혀 노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설마하니 내가 몇 천 명 정도 꾸려서 추격하자고 하겠느냐?”

“전하라면 그리 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쯧! 나를 완전히 미친놈으로 여기는 모양이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바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최대한 절절한 목소리로 결백과 부정을 외쳐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란딜 페레모어의 반응은 정상의 궤를 벗어났다.

“그건 아닙니다만, 솔직히 불안하기는 합니다.”

이쯤 되니 모든 이들이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와 줄카 사이에 어떤 연이 있기에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아란딜 페레모어가 줄카의 숨겨둔 자식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물론 겉모습만 보자면 줄카가 아란딜 페레모어의 자식, 혹은 손자뻘이었지만 그들은 줄카가 군주의 위에 오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하고도 오십 년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느냐? 네 아비도 내게 이리 대하지는 않았다.”

“제가 어릴 적에 아는 아저씨처럼 편히 대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줄카가 반박 대신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이 꼬마 녀석이 어렸을 적에(지금도 그의 기준에서는 어리지만) 몇 번 같이 놀아준 기억이 있었다. 오물거리며 자신을 따르는 것이 귀여워 꽤 잘 대해 주었었는데,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물론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놈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핀다. 또한 각 도시와 성에 파발을 보내 각지의 사정을 파악하도록 하고.”

살마드까지 치고 들어와 포위를 했던 초원의 군대 말고도, 도처에서 발생한 도적들 때문에 주의 업무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북쪽에서는 반군까지 말썽을 피우고 있으니 신경을 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다른 것보다 반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포위 때문에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이니, 현재 북방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을지…….”

살마드로 오기 전, 급한 대로 전선을 형성해놓았으나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반군이 움직였는지, 어디가 떨어졌는지, 혹은 지켜냈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이러한 정보의 부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급변하는 전장에서 치명적인 위협이다.

아란딜 페레모어의 굳은 얼굴이 풀어질 수가 없는 이유였다.

*

“움직일 만하십니까?”

“음. 문제없다.”

붕대를 너무 질끈 동여맨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오래 할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 어차피 경험상 이 정도 상처는 늦어도 이틀이면 거의 아물 테니까.

허나 그의 경이적인 회복력을 모르는 늙은 의사는 약까지 처방하며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직업의식 하나는 투철한 사람이다. 아니면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르고.

크게 물러난 반군이 며칠째 잠잠한 지금. 말레이드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를 꼽으라면 단연 군터였다. 그가 단기로 뛰쳐나가 서문의 적 대장을 죽이고, 나아가 소수의 휘하 기병들과 함께 적진을 돌파해 총대장의 목까지 베었다는 소문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말레이드 전체에 퍼져나갔다.

어딜 가던지 알아보는 것은 물론, 경외의 시선이 무수히 쏟아졌다. 그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그토록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군터조차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내딛는 발걸음도 조금은 의식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부담 아닌 부담이 이어진 것도 기껏해야 하루 정도였다. 다음날이 되었을 때는 그런 시선들도 덤덤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잠잠하군요.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합니다.”

군터는 카리비온 하야신의 명을 받아 살라스와 할렌 둘만 대동한 채 성벽을 쭉 거닐며 성벽과 성문, 병사들의 상태 등을 점검했다.

“대장이 죽었잖습니까. 겁을 집어먹은 거겠죠. 또 왔다가 이번에도 대장님한테 지들 목이 달아날까봐서요. 하핫!”

일전의 전투로 할렌은 자신감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올라 있었다. 군터의 뒤에서 함께 말을 달렸던 그는 그날 밤 군터가 보여주었던 신위(神威)에 단단히 빠진 상태였다. 맹세컨대, 그는 태어나 이제껏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군터를 바라보는 시선에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이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적들이 방비를 굳건히 하고 공격을 개시한다면 아무리 대장님이라도 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살라스의 말에 할렌이 반박하려는 찰나, 군터가 먼저 입을 떼었다.

“그 말이 맞다. 일전의 일은 운이 좋았지. 사령관의 협력도 더없이 적절했고.”

그날 밤의 자신은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했었다. 또 한 번 같은 것을 해보라고 하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똑같이 시도할 것이다. 그것만이 방법이라면 말이다.

“한심하군.”

뚫렸던 성문은 어떻게든 복구했고, 성벽의 보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하지만 병사들, 그러니까 민병들의 상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하긴, 평생 무기를 들고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는 이들을 단 며칠 만에 군인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당장 적들이 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쳐들어온다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원군은 도대체 올 생각을 안 하는군.”

“그에 대해서는 사령관께서도 이제 마음을 비우신 것 같습니다.”

처음 반군이 말레이드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지도 오래 되었고, 당도해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지도 보름여가 지났다. 그런데도 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곳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터.

“소식이 들어오는 게 없으니 갑갑하군.”

반군이 포위망을 구축한 상태다. 몇 번이고 전령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아마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발각 당했겠지. 몇 번 그런 뒤로는 카리비온 하야신은 전령을 보내는 일도 무의미하다 판단하고 그만두었다.

‘그나마 입이 줄어서 다행인가.’

잔혹한 일이지만, 그간의 전투로 머릿수가 크게 줄어 상대적으로 식량 사정이 나아져 이렇게 시일이 흘러도 먹을 걱정 할 일은 없어졌다. 그런 것에라도 안도해야 하는 상황이 우스울 뿐이다.

“그나저나…날씨가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할렌이 맑게 갠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 말처럼 얼마 전부터 급격히 날씨가 풀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갑옷 안에 두껍게 껴입었던 옷을 벗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제는 좁은 집에 구겨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전투로 사람 수가 줄어 그런 것도 있었지만, 밤바람이 더 이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갑작스럽고 익숙지도 않은 급격한 변화였다.

========== 작품 후기 ==========

저야말로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전쟁 챕터를 쓰면서 느꼈습니다. 아마 이번 챕터를 넘기고 나면 잦은 시점 변환으로 몰입감을 흐리는 일은 없...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줄어들 겁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차남의 역사 추천 감사합니다. 설마 이런 스핀오프가 있었다니... 다만 옆동네 글이라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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