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주, 줄카 -->
성벽 바깥에서의 때 아닌 회전은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다만, 똑같이 피해를 입었다 해도 그로 인한 결과까지 같지는 않았다.
본래 한껏 군기가 치솟아 단번에 살마드를 함락시킬 기세였던 초원의 군대가 주춤한 반면, 살마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새로이 합류한 병력의 수는 고작해야 이백 남짓이었다. 본래 삼백 가량이었던 용아가 초원 대군의 포위공격을 버티는 과정에서 삼분지 일 정도가 전사한 것이다. 거기에 줄카는 거의 빈사 수준의 중상까지 입었다.
그럼에도 살마드는 무한한 용기를 얻었다. 거기에는 성문으로 들어서기 전 줄카가 몸을 통째로 가릴 만큼 두툼한 외투를 걸친 덕이 컸다. 만약 시민과 병사들이 처참한 몰골의 줄카를 보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기 상승효과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신적인 존재로 통하는 군주라도 겉모습이 초라하면 불신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만하면 됐다. 이만 물러가라.”
“예, 예.”
도시로 들어온 직후, 줄카는 성주와 총독을 만났다. 바크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두 사람은 비스듬히 눕다시피 의자에 앉은 줄카의 앞에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초라한 몰골로 고개 숙이고 있었다.
본래 성주와 총독 다음에는 살마드의 무관들과 만나야 했다. 허나 줄카는 쓸데없다며 그 차례를 물렸다. 그리고 아란딜 페레모어 한 명만을 불렀다.
“오랜만이구나.”
성주와 총독을 볼 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거라. 보니까 내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 즈음 떨어졌겠더구나.”
백발의 노인 외형을 한 아란딜 페레모어에게 아무리 잘 쳐줘도 30대 초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줄카가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모습은 겉으로만 보면 상당히 이상해 보였다.
허나 이것이 당연했다. 수십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지금과 같은 젊은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고전하셨더군요.”
줄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음. 고생 좀 했지. 그 녀석, 제법이더군. 아직까지도 몸에 힘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끝내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자칫 추궁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는 감히 군주의 면전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아란딜 페레모어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에게 상식이란 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증거로, 줄카는 불쾌하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을 뿐.
“뭐, 그랬을 수도 있지. 아닐지도 모르고.”
그의 애마, 구루를 타고 싸웠다면 이렇게까지 고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세 놈의 목을 사이좋게 다 베어줄 수도 있었겠지. 허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수하에게 말했던 것처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하지만 그럼 재미없지 않으냐.”
“…여전하시군요.”
순간 감정이 일어 검미가 꿈틀거렸으나, 곧 한숨을 쉬며 털어냈다. 십년을 훌쩍 넘는 세월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든든하지만, 동시에 골치 아픈 원군이로군.’
그가 알고 있는 줄카는 변덕이 심한 사람이다. 아니지. 그보다는 보통사람과는 다르다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하겠다. 그의 생각, 행동방식, 그 모든 것이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지금만 해도 그는 전쟁을 끝내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숱한 사람이 죽어가고, 고통 받는 것은 그에게 있어 별 관심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원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원망하지 않는구나. 예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대들지 않았더냐.”
“예전이지요. 지금은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아니까, 괜히 힘 빼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똑똑하군. 아니, 잘 여물었어.”
잘 큰 자식 바라보듯 하는 줄카의 흐릿한 웃음이 어쩐지 거북하여, 아란딜 페레모어는 화제를 돌렸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넌 어찌 생각하느냐?”
“그것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떤 계획을 세우든, 전하께서 거절하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럼 말을 고치지. 넌 어찌 하고 싶으냐?”
“하루라도 빨리 적들을 몰아내고 바크렌을 안정시키고 싶습니다.”
태연한 듯 연기하지만 아란딜 페레모어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기색이 있었다. 그를 느낀 줄카는 혀를 차며 따분한 얼굴을 했다.
“재미없는 녀석이구나. 이만한 전쟁이 쉽게 일어나는 줄 아느냐? 즐길 줄도 알아야지.”
“전쟁을 즐기는 자는 없습니다.”
반박하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하지만 줄카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단언하지 마라. 전쟁 자체를 즐기는 놈들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전쟁을 좋아하는 놈들은 많다. 기회의 장이 아니겠느냐? 너 같은 무부에게도, 돈을 굴리는 장사치 놈들에게도. 또 그 외에 다른 놈들에게도.
”“…….”
“다 알만한 녀석이 순진하게 구는구나. 내가 이곳에 왔지만, 끝나고 나면 나중에는 아마 싫은 소리깨나 듣게 될 거다. 왜인 줄 아느냐?”
“짐작은 갑니다만,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군요.”
“순진한 녀석 같으니. 몰골은 곧 죽을 꼴을 하고서도 여전히 애 같구나. 그런 점마저 네 아비를 꼭 닮았어.”
다시 한 번 아란딜 페레모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는 꼬맹이의 재롱으로 밖에 보지 않을 터. 이럴 때는 심심한 반응이 최고였다. 예전에도 이런 수법으로 난감한 상황을 벗어난 적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 이어지는 말장난에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곧 줄카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어린놈은 어린놈다운 맛이 있어야지. 이거 원, 내가 벽에다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제 나이가 이제 오십 줄을 넘겼습니다. 겉으로는 거기에 20년 정도 더해도 모자랄 것이고 말입니다. 애 다루듯 하는 건 이제 좀 참아주시지요.”
“오십이 아니라 백오십이라도 내 앞에서는 애일뿐이다. 내가 네놈 어미 젖 타먹을 때의 모습도 기억하고 있거늘.”
“기억나지 않습니다. 확인이 안 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하.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 생각이냐? 사족을 멸해도 부족할 대죄니라.”
“하려면 하십시오. 어차피 혈혈단신인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의도하고 한 것은 아니나, 어쩌다보니 자조하는 식의 말이 되었다. 이번에는 줄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어찌해주길 바라느냐?”
“제 바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전쟁이 오래가길 원치 않습니다.”
줄카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아닙니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줄카는 무신이었고, 절대자였다. 그가 있는 전장에 패배란 없었고, 적들의 목은 항시 그의 손아귀 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초원의 대군이 강맹한 것은 사실이나, 줄카라면 어렵지 않게 끝장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줄카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내색은 안 했으나 꽤나 당황스러웠다.
“쉽지 않다. 이 땅에는 옛 신의 원념이 지독히 깔려 있다. 들어온 순간부터 날 억누르고 있어. 게다가, 적중에 묘한 놈이 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이곳 주신의 힘을 쓰더구나. 뭐, 그래도 온전한 것은 아닌 듯싶었지만.”
“주신……?”
“집에는 지붕을 받칠 기둥이 필요하지. 땅이 집이고 신이 기둥이라면, 주신은 그러한 기둥 중에서도 가장 큰 기둥이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많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 할 만한 존재는 주신뿐이다.”
처음 듣는 내용이 꽤 많았다. 그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을 알았는지, 줄카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가주었다.
“신지(神地)라는 말을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옥토(沃土)라는 말은 알고 있겠지?”
“예.”
농부가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안다. 농작물이 잘 자라는 비옥한 땅을 이름이 아니던가.
“흔히 살기 좋다고 하는, 생기가 만연한 땅이 있다. 반면에 살아있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삭막한 땅도 있다. 단순히 기후의 차이일까?”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말하자면 기둥이 있어 지붕이 바로 된 집이냐, 바람 불면 날아가고 비 오면 물이 고이는 야지(野地)냐의 차이지.”
줄카는 몇 번이고 주먹을 펴고 쥐기를 반복했다.
“주신은 자신의 영지(靈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똥개도 제 놈 집구석에서는 제법 용감하게 짖어대듯이 말이다. 이 땅의 주신이었던 놈이 이제는 초라해졌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적들이 바칼의 힘을 다룬다는 말씀이십니까.”
“주의 경계에 결계가 쳐져 있었다. 용아라서 여기까지 오는 것이 가능했지,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오는 도중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
늦어지는 원군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속을 태웠었다. 그 뿐만 아니라 살마드의 모든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원군은 오지 않았고, 마침내 그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결계라.’
정말 터무니없지만, 생각해보면 적은 이미 인위적으로 지진을 일으켜 성벽을 박살냈던 전례가 있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기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도…믿기는 힘들지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군. 쿠엘단 녀석이 이곳의 주신을 쓰러뜨리고 법보에 봉인하지 않았었더냐.”
“카락시아입니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법보의 이름을 말하자 줄카가 피식 웃었다.
“카락시아? 하여간 유치한 놈 같으니. 아무튼, 그것이 놈의 손에 있다. 말했듯 완전하지는 않으나, 성가시기는 마찬가지지. 게다가 그 뿐만 아니라…다른 무언가도 또 있어서 문제다.”
“다른 무언가라면?”
“너도 겪어봐 알겠지만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지. 그렇지 않으냐?”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힘겨운 상대였다. 물론 바크렌의 전력이 별 볼일 없었던 것이 크게 한 몫 하긴 했으나, 그걸 제하고 봐도 초원의 군세는 결코 얕볼 수 없는 전력이었다. 날랜 기병만 3만 이상에, 강체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괴이한 술법으로 무장한 특수부대. 거기에 괴물 같은 힘을 지닌 맹장들까지.
허나 아무래도 줄카는 그런 전력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신의 힘을 이르시는 겁니까.”
“하나라면 주신의 힘이라도 그럭저럭 처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때문에 확신할 수가 없다.”
“전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라고 전지전능한 줄 아느냐.”
줄카는 유쾌하게 웃었지만 아란딜 페레모어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그는 내심 줄카의 나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전세가 뒤집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기억 속에서 줄카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헌데 그 줄카가 확신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러면 또 다시 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네가 머리아파 하는 이상으로 저놈들도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게다. 아마 곧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르지.”
줄카의 위로 아닌 위로가 있었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 그다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는 이 만사태평한 군주가 이곳의 전쟁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별로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다음 수를 짜내기 위해 골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초원의 군대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간밤에 포위를 풀고 모두 물러가버린 것이다.
“어째서?”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아란딜 페레모어가 자문했으나, 당연하게도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감사합니다.
추천은 전혀 누추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생활이다... 제가 조아라에서 선작한 몇 안 되는 글 중 하나입니다.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글이기도 하고요. 참고한다고 해도 제가 그 정도 깜냥이 안 되어서... 하하.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