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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30화 (130/1,064)

<-- 군주, 줄카 -->

“하하핫!”

타르가이 베르겐이 발동한 주신의 압제 덕분에 줄카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허나 그는 그 상태에서도 포라칸과 콰이렌을 맞아 물러서지 않고 싸움을 벌여나갔다.

서걱!

콰이렌의 창이 허벅지를 갈랐다. 줄카는 그의 수하들과 달리 두터운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다. 그의 갑옷은 오히려 경갑에 속할 만큼 가볍고 얇았다. 때문에 힘이 실린 공격에는 속절없이 갈려나갔다.

줄카의 몸은 곧 피범벅이 되었다. 오십여 합을 겨루며 입은 상처만 거의 열 개에 이를 정도였다. 허나 그 상태가 되어서도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상처 입으면 입을수록 더 거칠고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광인의 그것 같은 웃음은 덤이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또 다시 줄카의 가슴팍에 가벼운 상처 하나를 남긴 포라칸이 떨어지는 거검을 재빨리 피해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소문으로 들었던 광전사가 저럴까 싶었다. 이제 그는 의성을 쓰는 것조차 관뒀는지 알 수 없는 제국어를 중얼거리고, 때로는 외쳐대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말들보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월등히 많았다.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요.”

콰이렌이 나직이 말했다. 그 말에 포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들의 뜻과는 달리, 싸움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줄카는 그렇게 상처를 입고 또 입으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치명적인 공격은 어떻게든 막아내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한 채 도리어 역공을 가해왔다. 내 팔 하나를 가져가려거든 네 몸뚱이를 내놔라 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포라칸과 콰이렌은 다 쓰러져가는 그를 잡고자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런 식의 교환에는 절대 응하지 않았다.

‘이 무슨…불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완전히 혈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맹하게 움직이는 줄카를 보며 두 사람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든 생각이었다. 분명 그들이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음에도 승기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줄카는 쓰러질듯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고, 그 모습에 밀어붙이는 두 사람이 오히려 질릴 정도였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거의 손 하나 깜짝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 둘이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는 도저히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포라칸은 굳게 마음 먹고 콰이렌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가 틈을 만들겠다. 네가 끝내거라.’

‘아니. 차라리 제가…….’

콰이렌은 단번에 포라칸의 의중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는 미끼 역할로는 그보다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틈을 보인 적을 확실하게 끝장내는 역할은 자신보다는 그가 더 어울릴 테니까.

그런데 포라칸은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그는 눈에 띄게 힘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묵직하기 짝이 없게 떨어지는 거검을 간발의 차로 피해냈다.

쿵!

거검이 찍은 땅이 길게 쪼개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 저런 것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갑옷이고 뭐고 뼈째로 잘려나가거나 아예 박살이 나리라.

“흡!”포라칸은 떨어진 거검을 스쳐지나 짧게 쥔 창을 휘둘렀다. 그에 줄카는 슬쩍 뒤로 몸을 떼며 검을 회수하려 했는데, 포라칸은 계속해서 몸을 들이밀었다. 검의 사정권 안에 스스로 들어선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줄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즐거웠다. 아무리 창을 짧게 쥔다고 해도 이 거리에서는 제대로 된 공격을 넣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설마 근접 격투라도 벌이겠다는 것일까? 자신을 상대로?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아무리 억눌렸다고는 해도 힘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그렇다면.

‘주공은 뒤쪽의 저 녀석이군.’

협공을 가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뒤로 몸을 뺀 콰이렌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 높은 확률로, 이 재미있는 녀석은 미끼다.

‘흐음.’

수를 읽은 이상 이 녀석들을 거꾸러뜨리는 것은 쉽다. 적당히 틈을 보여준 다음에 뒤따라 들어오는 녀석을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 재미있는 녀석이 숨겨놓은 한 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좋다. 어디 한 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거검이 크게 횡으로 베었다. 한껏 몸을 낮춰 피해낸 포라칸이 창대를 쭉 뒤로 빼더니 창극을 거의 가슴팍에 붙여 찔러왔다. 허나 이미 너무 좁혀버린 거리로 인해 내지를 수 있는 간극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부웅!검을 쥐지 않은 줄카의 주먹이 첱퇴처럼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포라칸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그 힘도 힘이지만 속도가 가공할 정도라, 정면으로 내달린 포라칸이 피할 수 있는 수는 없어보였다.

쿵!포라칸은 피하지 못했다. 줄카의 주먹이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 고개를 숙인 결과였다.

하지만 건틀릿을 착용한 줄카의 주먹은 자그마한 바위 정도는 산산조각을 낼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비록 지금은 신이한 술수로 인해 평소보다 약화가 되어있지만, 그렇다한들 사람의 두개골 정도를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주먹을 맞았음에도 포라칸은 무사했다. 아니,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멀쩡했다. 그의 몸은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았고, 주먹을 허용하면서도 내지른 창극은 줄카의 가슴팍을 조금이나마 파고들었다.

크르르르!

아래로 숙여 보이지 않는 입에서 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줄카의 입가에 미소가 크게 번졌다.

콰앙!

다음 순간. 묵직한 주먹이 포라칸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또한 동시에 날카로운 세 개의 선이 줄카의 가슴을 할퀴었다.

크허어엉!

전력을 다한 주먹에 옆머리를 허용하고도 포라칸은 그 순간에만 살짝 비틀거렸을 뿐. 곧바로 줄카에게 달려들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창은 바닥을 굴렀다. 눈에서 시퍼런 불길을 토하는 야수가 휘두르는 것은 창이 아닌 발톱이었다.

“그래. 너도 발톱이 있다 이 말이지.”

줄카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괴물이었다. 대장인 그만 다를 이유도 없지 않은가.

줄카는 검을 놓았다. 괴물로 변한 포라칸이 계속해서 딱 달라붙어 발톱을 휘둘러대니 지금의 이 무거운 몸으로는 도저히 검을 쓸 틈이 나지 않았다.

쾅!

부드럽게 어깨를 틀어 발톱을 피해내고 주먹을 날렸다. 허리의 힘까지 가미한 주먹질에 포라칸이 비틀거렸다. 줄카가 기세를 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이어갔다. 그는 흉포하게 변한 포라칸을 상대하면서 오히려 더 거리를 좁히고 들어갔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쾅! 쾅!

줄카의 주먹은 철저히 급소만을 노렸다. 간간이 나가는 발은 발톱을 긁으려는 포라칸을 완벽히 제어했다. 포라칸이 필사적으로 반격했지만 그의 발톱은 모두 허공만 그을 뿐이었다.

‘힘도 늘었고, 몸뚱이도 튼튼해졌지만…무뎌졌구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쉬움에 줄카가 혀를 찰 때였다.

슬쩍 뒤로 빠져있던 콰이렌이 뒤에서 덮쳐왔다. 이미 그를 의식하고 있던 줄카는 포라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밀어내고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크허엉!

가슴을 차인 포라칸이 곧장 몸을 날려 오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무모하다.’

이제껏 싸우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틀을 유지하면서 진퇴를 거듭하던 포라칸이었다. 헌데 이번에는 아예 그런 틀도 없이 대놓고 들이댔다. 이건 숫제 몸통박치기를 날리는 수준이었다. 마치 내 목을 치라면 치라는 듯이 말이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모하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흡!”

줄카는 주먹 쥔 두 손을 펴고 포라칸의 돌진에 맞춰 상체를 뒤로 뺐다. 그 반응이 실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마치 포라칸이 줄카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턱!포라칸의 발톱을 피하고 손목 아래를 붙들었다. 그러면서 몸을 반 바퀴 돌리면서 포라칸의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스스로의 힘에 포라칸의 달려드는 힘까지 더하여 포라칸을 바닥에 메쳤다. 그 움직임은 그리 힘 들이지 않은 듯 부드러웠으나, 포라칸의 몸뚱이가 땅에 닿은 순간에는 굉음이 터져 나오며 흙과 돌이 비산했다.

커헉!포라칸의 입에서 굵은 핏방울이 여럿 튀었다. 흉흉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도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를 보였다.

푸욱!그리고 동시에, 창날이 줄카의 옆구리를 쑤셨다. 줄카는 비틀대면서도 콰이렌의 얼굴을 주먹 쥔 손등으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크…….”

옆구리를 파고 든 창은 거의 복부까지 꿰뚫었다. 그야말로 제대로 찔린 것이다. 이 화끈한 고통만큼은 그도 마냥 웃으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줄카는 살짝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몸 깊숙이 박힌 창을 잡아 뽑았다. 굵직한 핏줄기가 분수처럼 튀었다.

콰직!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줄카는 또 한 번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하게 기절하여 쓰러져 있었던 포라칸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어깨에 이빨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목소리가 살짝 떨려나왔다. 고통 때문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도 물론 아니었다. 그저 목 가까운 곳에 이빨을 박아 넣은 포라칸의 몸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그도 덩달아 흔들린 것이었다.

“엄청나게 튼튼한 놈이로구나.”

포라칸은 의식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눈에 빛이 돌기는 했지만 그 어디에도 이성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를 물어뜯고 있는 것은 그저 한 마리 짐승이었다.

‘이것도 좋지. 그래. 한 번 해보자.’

칼처럼 세운 수도(手刀)가 흉흉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찔렀다.

피가 튀며, 찢어지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

“와아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 군은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굳이 따지자면 살마드군이 퇴각하는 모양새였으나 초원의 군대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이미 대열이 엉망으로 무너진 상태였던 데다, 피해가 과할 정도로 커짐을 우려한 타르가이 베르겐이 추격을 명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엉망이 되셨군요.”

피로 갑주 전체를 푹 담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아라얀이 줄카의 앞에 섰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꽤나 떨어져 팔자 좋게 앉아 있는 괴마를 보았다.

“무슨 변덕이셨습니까?”

“상대하는 놈들이 다 형편없는 말에 앉아 있는데, 내가 구루를 타면 재미없지 않느냐.”

“저라면 그 꼴이 되느니 재미없는 편을 택했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핫.”

웃고 있지만, 줄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옆구리에서 흐른 피는 그가 앉은 자리에 아예 웅덩이를 만들었고, 오른쪽 어깨는 큼지막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으며, 가슴팍은 갑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거기에 전신에 가득한, 결코 자잘하다고 할 수 없는 무수한 상처들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치명상이라 할 만한 상처만 수십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니, 그가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죽었을 것이다.

“안 좋은 상황에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움직이셔야 합니다. 아니면 야만인 놈들이 금방 태세를 정비하고 들이닥칠 겁니다.”

“그런 말을 할 때는 목소리에 진심을 좀 담는 것이 어떠냐?”

“송구하지만, 이제는 진심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흐흐.”

줄카가 흐릿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틀대며 선 그의 옆에는 어느새 그의 애마가 다가와 있었다.

========== 작품 후기 ==========

음... 조아라가 좀 버벅이는 것 같은데, 저만 그런가요? 컴퓨터가 똥컴이라 그런 건지 사이트가 좀 아픈 건지...

소개글에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쓴 것은 글 전체를 두고 본 내용입니다. 이제 1부가 끝나가는 시점이니 아무래도 전쟁, 무장으로서의 이야기만 주구장창이었습니다만 2부 부터는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선작수에 대해서는 약간은 달관 했습니다. 앞으로 베스트 올라갈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냥 주시는 쿠폰이나 받으면서 가늘고 길게 쓰겠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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