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주, 줄카 -->
[당신은 제국의 군주인가?]
[음. 줄카라고 하지. 뭐, 그리 유명한 이름은 아닌 것 같지만.]
줄카는 타르가이 베르겐이 의성(意聲)을 구사하는 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소수의 병력으로 수만의 대군과 맞서는 상황. 그야말로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그는 여유로웠다. 반면, 정반대의 상황인 타르가이 베르겐은 오히려 굳은 인상을 풀지 못했다. 겉으로 비치는 모습만 봐서는 두 사람의 상황이 바뀐 것 같았다.
[대담하군. 그 대담함이 도를 지나쳐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야.]
[네놈이 쳐놓은 장난질이 심해서. 내 군대는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겠더군. 그래서 이렇게 단출하게 온 거다.]
[경계를 그음은 발을 디디지 말라는 뜻. 의도한 대로 그냥 따랐으면 좋았을 것을……. 제국의 군주여. 지금 그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만용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대는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산한 기세를 풍기는 타르가이 베르겐. 그에 맞서 줄카는 변함없이 즐거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거 좋지.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애송이.]
타르가이 베르겐, 포라칸, 콰이렌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과하다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들은 줄카와 마주한 순간부터 거대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압박감은 그들로 하여금 강제로 전력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쾅!
전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타르가이 베르겐이었다. 그의 장도(長刀)는 빛살처럼 빠르고 철퇴처럼 무겁게 움직였다. 포라칸과 콰이렌은 각기 양 측면과 후방을 노렸다. 그들은 완벽한 삼각형의 포위망을 짠 채 줄카의 목을 노렸다.
“하하하하!”
줄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크게 웃으며 세 사내의 합격을 받아냈다. 그의 거검과 그것을 든 팔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조금 전 포라칸 한 사람을 상대할 때보다도 한층 더 속도가 붙었다. 그의 검은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벼락 치는 소리를 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세 명이 몰아붙이고 있음에도 그다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 무슨 괴물 같은!’
타르가이 베르겐은 또 다시 막힌 재빨리 칼을 회수하며 이를 갈았다.
놀랍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과 포라칸, 콰이렌까지 세 명이 달라붙어 싸우고 있거늘 우위를 점하지 못하다니.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일전에 베이고르와 회동을 했을 적에 양측의 무장들끼리 간단히 어울린 적이 있었다. 무장들의 친목은 직접 몸을 부대끼며 나오는 법이니, 실제로는 서로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 가볍게 붙어본 것이다.
그때, 초원에서는 포라칸이 나서서 베이고르의 잘났다 하는 무관들을 모조리 꺾었었다. 그때 베이고르의 왕이 감탄하며 이르길, 제국에서도 그와 비할 무인은 없을 거라 하였다. 물론 그 말은 띄워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겠고, 실제로 베이고르의 왕이 제국의 무인들을 모두 만나본 적도 없으니 어떻게 보든 그다지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다.
허나 타르가이 베르겐은 제국에 아무리 인재가 많다한들 포라칸과 비등한 이는 있을 수 있어도, 그보다 더 뛰어난 무인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을 몸에 받아들인 그조차도 포라칸과는 동수였다. 정말 전력을 다한다고 한다면 이기기야 하겠으나, 그런다 해도 간발의 차일 것이다.
그러한 포라칸에, 자신. 거기에 콰이렌까지.
설령 신이라 해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신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어찌!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제껏 가슴을 옥죄어오던 감각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았다. 아니, 확신했다.
[당신의 안에도 신이 있군.]
[음. 그것 참 투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표현이군. 뭐…이제 알았나? 생각보다 둔한데 그래.]
피식 웃음과 동시에 잠잠했던 기세가 무섭도록 치솟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불길이 일었다. 실제로는 그저 투기가 유형화되어 눈에 보이는 것뿐이었으나, 그 선명함이 너무도 짙어 실제 불이 이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색이 붉은 색이라는 점도 이유였다.
[이 땅은 제법 거북하군. 짙은 원념이 무겁게 억누르고 있다.]
줄카가 짜증스럽게 몸을 털며 투덜대듯 한 마디를 뱉었다.
그 순간, 타르가이 베르겐의 눈이 번뜩였다.
*
3만 기병과 삼백 용아의 싸움.
그야말로 몇 겹으로 포위 된 형국이었으나 용아들은 원진을 짠 채 철벽 같이 버텼다. 그 중심에는 위태로울 때마다 바람처럼 나타나는 두 사내, 아라얀과 카니악이 있었다.
퍼억!
카니악의 철퇴가 말의 머리를 후려쳤다. 머리가 호박 깨지듯 박살이 난 말이 그대로 쓰러지며 기수까지 같이 땅에 처박혔다.
달리는 말을 정면에서 후려쳤음에도 카니악은 어깨를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충격을 해소했다. 빈틈없이 육중한 그의 갑주는 이미 핏물로 붉게 염색을 한 지 오래였다.
땅! 따따당!
숨을 고르던 그가 연이은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갑주를 뚫지 못한 화살이 대가 꺾여 땅에 나뒹굴었다. 그 수가 무려 수십 발에 달했다.
“이 정도의 기사(騎射)라니. 짜증나는군.”
아무리 화살을 날려봐야 갑주를 뚫지는 못한다. 또한 육체에 별다른 충격도 주지 못한다. 용아의 육체는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초월체(超越體)니까 말이다. 하지만.
‘성가신 놈들 같으니.’
다른 것을 다 떠나, 체력이 빠지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용아라고 해도 체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보통의 갑옷보다 배는 무거운 전신갑주를 걸친 그들은 장기전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하려면 할 수는 있겠으나, 이렇게 계속 체력을 뺀다면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란딜 페레모어. 주군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쯤에서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나.’
애초에 이런 벽지에 오게 된 것도 전적으로 군주의 의중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이 터졌을 당시 그들이 있던 곳이 바크렌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때문도 있지만, 설령 더 가까이 있었더라도 군주가 내키지 않아 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없었다.
그리고 군주의 의중이 일었던 것은 오직 과거에 눈여겨 본 애송이가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흑포장군이니 뭐니, 결국에는 별 것 없는 애송이일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점점 고개를 들 무렵.
“와아아아!”
저 멀리, 뒤편에서 들려온 희미하고 이질적인 함성에 카니악은 작게 입술을 씰룩였다.
현재, 적군은 원진을 펼친 용아를 둘러싸느라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 호응을 하기에는 꽤나 적절한 시점이다. 만약 노린 거라면…….
‘뭐, 영 못 쓸 물건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카니악이 철퇴에 눌러 붙기 시작한 피를 시원하게 휘둘러 털어냈다.
*
“군을 내보내야 하오.”
“적은 3만에 육박하는 대군이고, 우리는 소수입니다. 그런데 어찌 나가 싸우자는 말씀을 하십니까.”
사경을 헤매는 부친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리에론 가문의 장자, 파비우스 리에론. 그는 평소 같았으면 감히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어 했을 아란딜 페레모어에게 무려 반박을 하고 있었다. 부친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콧대를 높여준 게 하나고, 아란딜 페레모어가 척 보기에도 기력이 쇠했음이 둘이며, 셋째로 초원의 대군에게 기를 눌린 까닭 때문일 것이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이 겁 많고 권위의식만 충만한 애송이와 길게 말을 섞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상종도 하지 않을 부류의 인간이다. 겁은 많고, 고집은 세니 무슨 말을 할 것이며 무슨 일을 함께 이루겠는가.
허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그는 이 애송이와 길게 말을 섞지 않아도 됐다. 그의 입을 닫게 하는 데는 한 마디면 족하다.
“그대도 조금 전의 나팔 소리를 들었을 것이오.”
“물론 들었지요. 헌데 그게 무슨…….”
“그것이 바로 줄카 전하의 나팔 소리요. 용의 뿔을 잘라 만든 귀물이지.”
“예?”
“저 밖에 당도한 군세는 줄카 전하의 용아군이오.”
파비우스 리에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의 눈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으므로 아란딜 페레모어는 다시금 출병을 주장했다. 이번엔 파비우스 리에론은 물론, 그 누구도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밖에 있는 이가 제국의 위대한 군주임에야, 감히 누가 반대를 입에 담겠는가.
그리하여 아란딜 페레모어는 살마드의 전력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오천 병사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그리고 용아를 두텁게 포위하고 있는 초원의 군대를 들이쳤다. 물론 제대로 된 기습이라 할 수는 없었다. 초원의 군대 또한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이 다가옴을 인지하고 대응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란딜 페레모어의 군세가 당도함에 포위당한 용아의 숨통이 트이는 한편, 앞뒤로 협공하는 형세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쐐기 대형으로 간다! 밀어붙여라!”
아라얀은 아란딜 페레모어의 군세로 인해 포위가 흔들리자 곧장 진형을 바꿨다. 기본적으로 원진을 유지하는 것은 같았지만, 적이 흔들리는 방향으로 인원을 보태어 힘을 실었다. 그는 쐐기의 가장 앞으로 나가 가장 먼저 도끼창을 휘둘렀다.
“날파리 같은 놈들.”
초원 전사들의 기사는 그에게도 거추장스럽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는 몸을 두드리는 충격을 무시하고 말을 몰았다. 두터운 마갑을 걸친 그의 말은 이까짓 화살로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도끼창이 큼지막한 궤적을 그릴 때마다 한 두 명은 꼭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아라얀은 육중한 도끼창을 무슨 가벼운 작대기 다루듯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맹진에 힘입어 용아들도 점점 쐐기의 크기를 키워갔다. 아란딜 페레모어의 공격으로 흔들리던 포위가 빠르게 옅어져갔다.
한편, 줄카와 그에 맞서는 세 사내의 싸움은 전장의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 네 사람만이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억…허억…….”
그들 모두는 숨을 헐떡대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네 사람 중 가장 실력이 쳐지는 콰이렌은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했고, 포라칸과 타르가이 베르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줄카 또한 즐거워하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으나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진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장이 급변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그들만의 격전을 줄기차게 이어갔으며, 족히 수백여 합을 나눴다. 그런데도 지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못해 불가능한 일이다.
[나쁘지 않군.]
순간 미간에 주름이 잡혔던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 말이 자신들이 아닌 전장의 상황을 일컬은 것임을 알고 낯빛을 굳혔다.
그의 말마따나, 전황은 점점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살마드의 군세가 당도한 이상 난전이 불가피. 보통 때였다면 맞붙어 쓸어버리면 그만이나, 줄카가 이끄는 중장기병의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기에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살마드의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끝을 봤어야 했다. 허나 상대가 상상이상으로 강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로 어찌될지 모른다.
“대족장. 혹…….”
“이게 최선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포라칸이 입을 열었으나, 그는 포라칸의 우려 섞인 말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두근!
심장 아래. 복부에 박아 넣은 카락시아가 그의 의지를 느끼고 반응했다. 뜻이 이니 극심한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뭘 하려는가?]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줄카가 흥미를 보였다. 그는 방해하려는 기색 없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정신을 집중하는 와중에도 그의 그런 여유가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당신은 진지함이란 것을 모르는가.]
[난 지금도 진지하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이 순간을 즐기고 있지.]
[당신에겐 전쟁이 유흥인가?]
[아니.]
줄카가 가벼이 고개 저었다. 그리곤 웃음 띤 얼굴에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삶이 유흥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한 마디에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리고 거칠게 일갈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즐겨보아라!]
그의 힘을 잔뜩 빨아들인 카락시아가 권능을 발휘했다. 주신(主神)의 힘이 외신(外神)을 짓눌렀다. 땅에 깃든 저주는 갓난아이의 장난처럼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압제.
“크윽!”
지금까지 줄카의 얼굴에 항시 머물던 웃음기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온 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압력이 그를 억압하니 줄카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쳐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의 타르가이 베르겐이 포라칸과 콰이렌에게 명했다. 명을 받은 두 사람이 곧장 줄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깜짝 연참. 점심식사 맛있게 하세요.
선작 오천...저도 달성하고는 싶지만 대충 계산기 두들기니까 올해 안에는 힘들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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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를 바꿔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