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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28화 (128/1,064)

<-- 군주, 줄카 -->

쓰러졌던 말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물러서는 기색 없이 포라칸의 옆에 와서 섰다. 포라칸이 훌쩍 뛰어 애마의 등에 올랐다.

‘대족장께서 우려하신 바를 알겠군.’

그의 안에 자리한 짐승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허나 그의 이성은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유지되고 있었다. 짐승이 발산하는 야성 이상으로, 눈앞에 닥친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탓이었다. 흥분하는 것이 위협에 맞서 생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됨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포라칸의 안에서는 짐승의 힘과 전사의 냉철한 이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했다. 허나, 그런 상태로도 눈앞의 대적(大敵)을 상대로는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뭐 하는 자인가.”

상대가 초원어를 알아들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내용은 묻는 형식이나,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의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포라칸은 왠지 그가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줄카라고 한다. 알고 있나?]

“…….”

상대, 줄카라고 이름을 밝힌 그의 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울리며 들려왔다. 그것은 초원어도, 제국어도 아니었다. 귀로 들리는 소리 자체가 아니었다. 포라칸은 그것이 일종의 술법과 비슷한 것이라 느꼈다.

“아니. 들은 바 없다.”

[유감이군.]

침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온 몸의 수분이 날아가 메마르는 것 같았다. 초조와 긴장, 불안과 두려움이 족쇄가 되어 그를 짓눌렀다.

허나, 노련하고 뛰어난 전사인 포라칸은 이러한 동요가 전투력에 전혀 도움도 되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이기는 하나, 그 역시 부족하고 약했던 풋내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 무수한 고난을 넘어야만 했었다. 그때의 경험은 아직도 그를 받치는 큰 주춧돌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하아아앗!”

힘의 격차는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포라칸은 움츠러들기보다는 먼저 적극적으로 덤벼들기를 택했다. 하나가 된 인마(人馬)는 한 마리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로 적을 물어뜯었다.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사나운 맹수에 맞서 어린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그리고 거검을 휘둘러 반가운 인사를 대신했다.

쾅!

창과 검이 부딪쳤다.

무기의 무게 차이 이상으로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포라칸은 힘겨움을 느꼈다. 보기에도 육중한 거검은 그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쾌속하게 공격을 이어갔고, 순식간에 10여 합이 지나갔다. 그쯤 되었을 때는 팔이 뒤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실로 터무니 없는 힘이다.’

신체가 장성한 이후, 신의 축복을 받기 전부터 그는 힘에 있어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었다. 축복을 받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그는 전장에 나서서도 적수가 없었고, 무료함마저 느끼곤 했었다. 정확히 이번 전쟁에서 호적수라 할 만한 적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허나 지금, 그는 일찍이 그가 내려다보았던 숱한 적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런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쾅!

“크음!”

포라칸이 그렇게 고통의 순간들을 보내는 와중에, 상대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굉장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참 더러운 기분이었군.’

그것을 보며, 포라칸은 이제껏 그를 상대하며 좌절했던 적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리며 상대의 즐거운 얼굴을 본다는 건,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기분이지 않은가.

“즐거운가?”

[물론.]

“이쪽은 기분이 더럽다.”

[본래 세상 모든 것은 힘 있는 자 위주로 돌아가는 법이다.]

줄카가 거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너무나 쉬이 움직이는 손목이, 마치 그가 쥔 것이 사람보다 더 큰 검이 아니라 손가락 몇 마디 쯤 되는 나뭇가지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너 역시 전장에서 너보다 약한 자들을 마음껏 유린했을 것이 아니냐. 그래놓고 이제 와 새삼스럽게 불평이라니.]

그의 말이 백 번 옳았다. 당연히 새삼스럽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한 것은 상대의 주의를 끌며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작게는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 팔의 힘이 돌아오기를. 그리고 크게는.뒤편의 아군이 당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와아아아아!”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함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지근거리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즈음에서 포라칸은 줄카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웃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웃음이 더 짙어진 것만 같았다.

“걱정이 되지 않는가? 아군은 3만을 헤아린다. 게다가 모두 날랜 기병이지.”

[3만 기병이라…대단하군.]

“그들이 곧 이곳에 닿으면, 너희는 살아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3만에 둘러싸이면 답이 없어. 사실 3만은커녕, 3천만 되어도 위험할지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여유로워 보이는군.”

[여유가 아니라 즐기는 거지. 음…같은 말인가? 아무튼, 3만씩이나 되는 기병은 흔하지 않아. 그들에게 둘러싸이는 일도 덩달아 귀하겠지.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그러니 즐겨야지.]

마치 관계없는 제3자의 일을 말하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포라칸은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실 웃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코앞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왔음에도 전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감을 잃어버린 것 같은 태도까지. 전사로서 피가 끓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미친 자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일 수는 없었다.

“막으오리까?”

지금껏 가만히 줄카와 포라칸의 싸움을 지켜보던 용아군(龍牙軍)의 대장, 아라얀이 간만에 목소리를 냈다. 그의 시선은 다가오는 적군을 향해 있었다.

“아니. 그냥 오게 두어라.”

줄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아들은 그들과 맞붙은 괴인들을 순조롭게 제압해가고 있었다. 괴인들의 날카로운 발톱은 용아의 두터운 갑주를 뚫지 못했고, 인간을 벗어난 괴력도 용아들에 비하면 한 수 아래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괴인들은 전멸해 가고 있었으나 용아의 피해는 낙마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전무했다.

“오늘. 또 한 번 너희의 생사가 시험받겠구나.”

아라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큼지막한 도끼창을 고쳐 들었다.

“지긋지긋하군요.”

“그래도 간만이 아니냐?”

“전하를 따른 지 어언 70년입니다. 대강 잡은 것이니 어쩌면 그보다 더 됐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세월 같은 건 이제 더 이상 와 닿지 않습니다. 그저 번거로울 뿐이지요.”

“불평은 그만하고, 내게 네가 이 녀석보다 더 나음을 보여주어라.”

“그건 조금 흥미가 동하는군요.”

한 인간의 평생보다도 더 긴 세월 동안을 용아의 대장으로서 복무했다. 전투와 휴식을 끝없이 반복했던 그 세월은 그에게 전사로서의 경험을 주었지만, 대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갉아먹었다.

번쩍이는 귀물을 손에 넣어도 기쁘지 않고, 맛있는 술을 마셔도 흥이 오르지 않는다. 예쁘다는 계집을 벗겨놓아도 그년이 그년 같다.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쓰러져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아도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세상은, 이제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같은 경험을 하며 살아온 주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등을 보며 무작정 따라왔기에 회의의 바람이 몰아칠 때도 그의 등 뒤에 숨어 비켜갈 수 있었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군인이나 무인도, 전사도 아니다. 오직 용아라는 이름만이 그들의 전부를 가리킨다.

혹자는 그들을 일컬어 괴물이라 불렀다. 피와 살육으로 가득 찬 곳을 전전하는 악귀라고 표현했다.

괴물이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태어나기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군주 줄카의 권유를 받아들여 인간이 아닌 용아로 거듭났다. 인간을 초월했으니, 그런 초월자를 칭하는 말이 괴물이라면 그들은 괴물이 맞다.

“형제들이여! 어서 끝을 내라! 다음 상대가 다가오고 있지 않느냐!”

아라얀의 일갈에 바르바피들에게 죽음을 휘두르던 용아들이 고개를 들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들이 근처까지 당도했음에도 그들에게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감정의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카니악!”

퍼걱!

철퇴가 이를 드러내던 바르바피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두개골을 깊숙이 파고들어 짓뭉갠 철퇴를 한 사내가 힘주어 뽑아냈다.

“예.”

사내, 카니악이 아라얀의 부름에 응답했다. 아라얀은 그에게 고갯짓하며 명했다.

“네가 적을 맞아라. 시시한 놈들은 알아서 하고, 괜찮은 것들은 내게 보내라.”

“또 저는 잡부 역할입니까.”

“불만이면 날 꺾고 대장이 돼라.”

“…명대로 하겠습니다.”

40여 년째 용아의 부대장으로 남아있는 카니악은 못마땅한 기색을 팍팍 풍기면서도 용아들을 지휘해 대형을 갖췄다.

“…….”

그는 다가오는 적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곧 휘하 용아들에게 지시를 시작했다.

“선봉은 흘린다.”

맹금보다도 뛰어난 그의 눈은 적의 선봉에 선 둘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 특히나 가장 앞에 있는 자는 멀리서 봐도 피부가 쩌릿할 정도다. 저 정도면 괜찮은 정도를 넘어 위험한 수준 같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충실한 부대장은 받은 명령을 충실히 따를 뿐이다.

*

줄카는 포라칸을 일방적으로 몰아쳤다. 그의 거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30여 합이 지났다. 포라칸이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명마라 해도 과하지 않을 그의 말과 한 몸이 되어 싸웠기 때문이었다. 충격을 받으면 말과 함께 몸을 틀어 분산시키고, 반격할 때는 한 몸이 되어 들이 받았다. 그 같은 기마술은 긴 세월 동안 무수한 적을 상대해 본 제국의 군주도 거의 보지 못한 수준의 것이었다.

[놀라운 솜씨다. 딱히 특별한 말도 아닌 것 같은데…대단하구나.]

그저 그런 철검이라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명검 못지않은 쓰임을 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말 역시 누가 타느냐에 따라 그 효용이 천차만별이다.

줄카가 보기에 포라칸의 말은 그다지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평범한 말 중에서는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봐야 일반적인 군마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짐승일 뿐. 칭찬한다면 말이 아니라 그것을 저렇게 절묘하게 다루는 솜씨를 칭찬해야 하리라.

[그나저나…….]

줄카의 시선이 돌아갔다. 포라칸의 뒤편, 급하게 온 티가 묻어나는 몰골을 한 두 사내.

[그래. 너로군. 잘 왔다. 너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타르가이 베르겐의 눈과 짙은 흥미를 담은 줄카의 눈이 서로를 담았다.

========== 작품 후기 ==========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리시는 건 제가 인물묘사를 부족하게 했기 때문이겠지요. 노력하겠습니다.

쿠폰 주신분들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봐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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