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27화 (127/1,064)

<-- 세 군데의 전투 -->

제국의 여섯 군주(軍主)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굉장히 특별한 존재들이다. 이는 그들이 지닌 힘이 아니라. 제국 내에서 그들이 누리는 지위에 대해 말함이다.

황제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다시피 한 카라누르에서, 그들은 독자적인 군세를 이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곳에 머물 수 있으며, 원하는 곳에 나타날 수 있다. 제국의 철저한 관료체계에서 오직 그들만이 벗어나 있다.

그들은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대귀족들보다도 존귀하게 여겨진다. 황가의 일족조차 그들 앞에서는 예를 표한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오직 카라누르의 황제뿐이며,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오직 카라누르의 황제뿐이다.

권력에 눈이 먼 제국의 황제가 어찌 군주라는 터무니없는 자리를 용인했는가는 의문이다. 허나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고, 그들의 지위가 제국의 멸망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제국에서 그들의 위상은 절대적이며, 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떠받치는 기둥임은 카라누르에 이를 가는 이들조차 모두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중략…

제국의 다섯 번째 군주, 줄카를 말할 때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그를 저주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조차 그가 세운 한 가지 위업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거짓이라고 말하기에는 증거가 너무나도 많고, 깎아내리기에는 그 업적이 너무나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전투에 임하기 전 부는 나팔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의 곁을 지키는 친위대가 인간과 동떨어진 외형을 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은 그가 세운 업적을 빛내는 증거이다.

어쩌면 줄카는 영웅담(그것도 영웅담 중에서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현실감 없는)에나 나올 법한 그의 위업을 빛내기 위해 일부러 곁에 증거들을 마련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일각에서 이르는 바에 따르면…….

-우슬라 익세이온 저(著). ‘제국의 여섯 군주’ 中 ‘용살자(龍殺者) 줄카’ 편 일부 발췌-

*

우우우우우--!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소리였다.

크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고, 귀가 아프지도 않지만 그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려지고, 오직 텅 빈 세상에 한 가지 울림만이 그득하다.

세상을 정적에 빠뜨린 긴 울음은 그가 나팔에서 입을 떼며 끝났다.

그는 조용해진 전장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좋구나. 좋아.”

치열한 살육의 현장에 고요는 존재할 수 없다. 허나 한 번 내려앉으면 그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다. 모두 시체가 된 것처럼 말을 잃고, 아주 조용해지면 커다란 폭풍이 몰아치기 전처럼 잠잠해지면 말이다.

“군기(軍氣)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얼굴 전체를 가린 투구의 숨구멍으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터운 전신갑주에 얼굴 전체를 가리는 투구까지 눌러쓴 거한은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무수한 병력을 눈에 담았다.

“수가 많습니다. 돌파한다고 해도 살마드군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힘들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걱정이 많구나. 아라얀. 언제부터 그리 겁이 많아졌느냐.”

“…….”

사내가 웃으며 검을 들었다. 사람 키보다 더 길고, 사람 어깨너비보다도 더 폭이 넓은 기형의 거검(巨劍)이었다.

“자, 슬슬 가보자. 어디 실력 한 번 보자꾸나.”

갑옷과 같은 비늘로 뒤덮인 괴마(怪馬)가 주인과 함께 앞으로 나아감에, 잔잔하던 바람이 거세게 출렁였다.

*

저 멀리서 들려온 정체 모를 소리를 접한 순간, 심령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이었다. 풀을 뜯는 작은 짐승이 사자 앞에 선 것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의 발현.

그 본능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소수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꼭대기에는 타르가이 베르겐이 있었다.

“측면에 적이다! 대비하라!”

대수롭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으나 그 역시 마음속의 동요를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그의 안에 깃든 신이 발작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다.

‘동요할 것 없다. 어차피 적은 소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나가서 쓸어버리거나, 무시하고 이대로 살마드로 진격하거나.

측면에서 나타난 소수의 병력을 별동대라 친다면 그들의 목적은 교란이다. 따라서 일부러 나가 응전하는 것은 적의 의도대로 되는 꼴. 그렇다면 이대로 살마드를 치는 게 옳다. 하지만.

신을 울게 하는 것은 같은 신,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언가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소리가 그만큼 강력한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거나, 혹은 저 소수 중에 신을 울게 만들 만한 존재가 있다는 뜻.

어느 쪽이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적이 움직입니다.”

콰이렌의 말에 타르게이 베르겐이 퍼뜩 적을 살폈다. 과연 그의 말처럼, 얼마 되지 않는 적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 그들이 있는 쪽을 향해서 말이다.

“시선을 끌어보겠다는 건가? 무모하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포라칸의 말이 옳다. 허나 이미 모든 감각이 최고조로 곤두 선 타르가이 베르겐은 돌진해오는 삼백여 기의 중장기병에게서 짙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군을 돌린다.”

“예?”

“도시는 나중에. 우선은 저놈들부터 상대한다.”

다소 당황한 듯했던 포라칸은 곧 진지한 기색으로 변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저놈들이 결계를 뚫고 왔다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신이 경계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주의할 이유는 충분하지.”

“…….”

포라칸은 다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무모한 것만 같았던 적이 새롭게 보였다. 확실히 중장기병이라 그런지 무게감과 힘이 느껴졌다. 그 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하라.”

타르가이 베르겐의 재가를 얻은 포라칸은 기병 삼백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그 삼백은 모두 바르바피였다. 과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신중을 기하는 차원이었다.

‘검?’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를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무식하게 큰 철추를 들고 있는 줄 알았다. 허나 거리가 가까워지며 그 형체가 뚜렷해지자 그것이 철추가 아니라 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드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검을 무기로 쓰다니, 힘 하나는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타고 있는 괴이하고 거대한 짐승도 눈길을 끌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당연히 말이라 생각했지만, 저것을 과연 말이라 볼 수 있을까? 무슨 파충류처럼 비늘로 뒤덮여 붉은 안광을 토하는 짐승은 괴물에 가까워 보였다.

‘과연. 확실히 신이하군.’

비범함은 알겠다. 이제는 직접 칼을 부딪쳐 그 힘을 알아볼 차례다. 보기 전에는 저런 게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거검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근력은 출중해 보이나, 풍기는 기세는 그리 특출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중장기병들이 풍기는 기운이 더 강맹했다.

‘그게 전부냐, 아니면 숨겨놓은 무언가가 있느냐. 이 창으로 시험해주마.’

창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두 군세의 거리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노려보는 서로의 눈마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

쿠웅!

호승심에 불타오르던 포라칸은 일순, 맑던 하늘에 짙은 그늘이 졌음을 느꼈다.

영문 모를 아찔함이 밀려오며 소름이 전신을 뒤덮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스치는 바람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거인이 있었다. 머리는 하늘에 닿았으며, 내뿜는 숨결은 공간을 뒤틀었다. 얼굴은 검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볼 수 있는 거라곤 그의 거대한 상반신과 두 팔. 그리고 그 중 한 팔에 들린 산처럼 거대한 검 한 자루 뿐이었다.

쿠구구구구!

거인이 검을 들어올렸다.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굉음이 울렸다.

높이 치켜든 검은 하늘마저 꿰뚫고 올라갔다. 돌덩이처럼 굳은 포라칸은 거인의 팔이 구름에 닿은 것만을 볼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

폭풍이 몰아쳤다. 잿빛으로 멈춘 세상이 통째로 으깨어지는 것 같았다. 구름너머로 올라갔던, 산과 같이 거대한 검이 떨어지는 모습은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장엄하고 절망적이었다.

운명과 같았다. 피할 수 없고, 항거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눈을 감아 끔찍한 공포를 조금이나마 외면하고 최후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포라칸은 구름을 날려버리며 떨어지는 검을 처음 보았을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 했었다.

허나, 그의 강인한 정신은 그를 짓누르는 절망을 빠르게 몰아냈다.

지독한 무력감에 억눌려 있던 몸이 힘을 되찾았다. 그는 손에 쥔 창에 힘을 불어넣었다. 세상을 두 동강낼 것처럼 떨어지는 거신(巨神)의 검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초라한 창이었으나, 그는 굳건한 의지로 그 창을 들었다.

“크으으으음!”

그의 전신에 짙푸른 불길이 일었다. 같은 색의 안광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우오오오오!”

절규와도 같은 포효와 함께, 혼신의 힘을 담은 창이 떨어지는 거신의 검과 격돌했다.

-----!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멈춰 있던 세상도 다시금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

콰앙!

단순히 내리친 검과 내지른 창의 격돌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충돌은 투석기가 던진 큼지막한 돌이 성벽을 때릴 때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오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의 시선은 뒤로 튕겨나간 야만족 전사에게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대단하군.”

“또 가늠하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이었다. 한 번에 끝낼 생각으로 전력을 다했어. 그런데…죽지 않았군.”

두 군세는 정면으로 충돌하여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야만족 기병들은 마치 괴물처럼 변하여 용아병(龍牙兵)들에게 덤벼들었다. 무기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손톱인지 발톱인지 분간 안가는 것을 휘둘러대면서 말이다.

그 격전의 와중에 오직 그 두 사람만이 태평했다. 치열한 싸움은 그들 주변만을 자연스럽게 빗겨가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그의 부정이 있자 뒤편의 수하가 중얼거렸다. 말은 감탄인데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어 진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 대단해. 어쩌면 네 녀석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말씀은,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봐라.”

포라칸은 투구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드러난 그의 얼굴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얼핏 보면 지금 괴물로 변해 날뛰고 있는 그의 수하들과 비슷해 보였는데, 뭔가 조금 달랐다.

“멀쩡하지 않으냐? 그 일격은 정말 진심이었거늘.”

얼굴은 반쯤 괴물처럼 변했지만 여전히 몸은 사람의 몸이었다. 창을 내던지고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수하들과는 달리, 무섭도록 차분하고 절제된 투기를 발산하고 있다.

“끼어들지 마라.”

그는 호승심을 내보이는 수하에게 짤막하게 한 마디 남긴 뒤,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가 포라칸을 바라보듯, 포라칸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두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하려고 애쓰는 난폭함만이 가득했다.

“꼬마가 애를 먹은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간만에 만난 제대로 된 상대다. 설마하니 이런 벽지에 이 정도의 무인이 있었을 줄이야.

그는, 줄카는 그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웃음을 띠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소개글을 바꾸는 건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독자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신 독자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