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26화 (126/1,064)

<-- 세 군데의 전투 -->

내성 코앞까지 치고 들어갔던 반군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다시 도시를 빠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도시를 포위했을 때보다 훨씬 더 거리를 벌려 다시 진을 쳤다. 총대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닿은 탓이었다.

그어어어억!

악몽처럼 날뛰어대던 괴물들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자 불붙은 양초마냥 녹아내렸다. 괴인을 구축한 음습한 사기는 태양이 발하는 강렬한 양생(陽生)의 기운을 견디지 못했다.

“살았다.”

그 한마디를 뱉고서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은 것은 민병들만이 아니었다. 필사의 각오를 다졌던 정예병들조차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만큼 간밤의 전투는 힘겨움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와아아아!”

어둠이 다 걷히고, 시체와 피 비린내만이 남은 도시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을 질렀다.

*

“정말 해낼 줄이야.”

카리비온 하야신은 얼굴이 완전히 엉망으로 찌그러진 수급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머리가 진짜 적 총대장의 수급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하기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도시를 함락시킬 것 같았던 반군이 물러갔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승기를 굳힌 반군이 굳이 물러갈 이유는, 총대장에게 생긴 참변 같은 큼지막한 사유가 아니고서는 없었다.

“사령관께서 완벽히 호응해주신 덕분입니다.”

군터는 슬쩍 카리비온 하야신에게 공을 돌렸다. 겸손이 다분히 섞인 말이었지만 또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가 일부러 성문을 내어주고 적을 도시 깊숙이 끌어들인 덕에 적 총대장의 호위가 최대로 느슨해졌었고, 덕분에 100기도 안 되는 기마를 이끌고 돌격해 단시간 안에 수급을 취할 수 있었다. 만약 그의 호응이 없었다면 적 대장의 목을 딴다는 무모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이번의 대공에 대한 지분을 나눈다면 군터의 몫은 10중 7정도. 나머지 3은 카리비온 하야신의 몫이라 할만 했다.

“이제 적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글쎄. 일단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게야. 총대장이 갑작스럽게 비명횡사 했고, 서쪽의 군대를 지휘하던 장수도 목이 달아났으니 지휘 계통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 괴물은…….”

“그래. 그게 문제지.”

실상 간밤에 도시가 함락 직전까지 몰렸던 것은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드는 반군 병사들의 기세도 기세였지만, 무엇보다 사기 덩어리 괴물의 존재 때문이었다. 주먹질로 성문을 깨부수는데 멈출 방도도 없으니, 괴물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일단 도시 내의 모든 은을 수거해 녹이고 있네. 급한 대로 병장기로 만들어 공급할 계획이야.”

“은을 말입니까?”

“그래. 본래 저런 부정한 괴물은 축성은제 무기로 상대해야 하지만…없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일반 은제 무기라도 써야지.”

군터는 축성은은커녕 은이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도저히 답이 안 나와 보이던 괴물을 상대할 방도가 어떻게든 마련되는 것 같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피해가 막심합니다.”

다소 화기애애하던 회의장의 분위기는 천인장 차모스가 뱉은 한 마디에 다시 무거워졌다.

그의 말처럼, 간밤의 피해는 크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막심하기 그지없었다. 병졸들이 상한 것도 상한 것이고, 성문이 뚫린 것도 뚫린 것이지만 무엇보다 민간의 피해가 너무도 컸다. 잠깐 동안 도시로 들어왔던 반군병력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살육하고 파괴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사상자의 수가 최소 수천에 이를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복구 작업에만 전념하도록.”

비정하다 말할지 몰라도 그게 최선이었다. 전장에 선 지휘관은 길거리에 넘쳐나는 슬픔에 동화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슬픔을 증오로 바꿔 성벽 너머에 있는 적군에게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카라비온 하야신은 그러한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그는 가족과 친지를 잃고 비통함에 빠진 백성들을 모아두고 짧은 연설을 했다. 잔뜩 쉰 목소리로 피끓는 감정을 토하며 슬픔에 잠긴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우리의 원수들은 지금도 저 밖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남은 가족들을 넘보고 있다! 슬프게도 우리의 힘이 부족하여 성문을 열고 나가 원한을 갚지는 못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는 살아남은 이들의 분노와 생에 대한 욕구를 거침없이 자극했다. 서로 달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그 두 가지는 그의 연설로 인해 자연스레 합쳐져 거센 반발, 혹은 용기로 나타났다.

“우리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쉬이 죽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반군에 용감히 맞서 싸우라 했다면 그들은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카리비온 하야신은 싸우라는 말 대신 살아남으라 했다. 이는 그 어떤 거부감도 주지 않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고마운 요구였다. 격하게 호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허나 도시를 둘러싼 원수들로부터 살아남으라는 뜻이 무얼 의미하는가. 어차피 성문이 뚫리면 죽고, 적이 성벽을 넘어도 죽는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아주 간단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말장난 몇 마디로 도시를 뒤덮었던 우울한 공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능숙하게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는군.’

군터는 칼을 뽑아드는 카리비온 하야신을 보며 감탄했다.

휘하 병사들에게라면 그 역시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훈련도 되지 않은, 싸울 의지조차 없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의를 불어넣는 일은 단언컨대 그의 능력 밖이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지휘관으로서 카리비온 하야신은 완벽해 보였다. 이상적인 장군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쓸 수 있는 건 모두 사용한다.’

이제부터는 민병의 수가 대규모로 늘어날 것이다. 자연히 피해도 더 커지겠지. 카리비온 하야신은 말레이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이와 노인, 여자까지도 모두 전장에 밀어 넣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의중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했다. 상황이 최악으로까지 흘러간다면 도시 내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총동원하여 적에 맞서겠노라고.

허나 전의에 불타오르는 민병들이 피를 뿌릴 일은 생기지 않았다.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져 진을 친 반군이 좀처럼 공격을 재개할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총대장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말레이드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피해를 복구하고 민병들을 훈련시킬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

와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함성이 성 전체를 울렸다. 누가 시켜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마다 차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내뱉음이었다.

적들이 물러갔다. 포위를 풀고 물러나고 있었다. 혹여 추격이라도 붙을까 주의하는 것을 보아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만에 하나 저 퇴각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이 무수한 피와 죽음으로 얻어낸 승리는 분명 진짜였다. 반나절이 넘게 이어진 대혈투 끝에, 그들은 진정 승리한 것이다.

이 순간에는 막시밀리언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듯 주저앉은 군졸들을 하나하나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한 뒤 자택으로 향했다. 죽음을 각오했던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배불뚝이 성주와의 연회가 아니라 라일라의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뇌쇄적인 눈빛이었다. 더해서는 육감적인 그녀의 몸까지.

“라일라.”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때, 격한 환영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뭔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라일라는 평소와 똑같았다. 커다랗고 푹신한 침대는 놔두고 굳이 딱딱한 바닥에 내려앉아 향을 피운 채 뭔지 모를 것들을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또 점을 치고 있는 건가.”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이래서 라일라였다. 이렇게 사람을 섭섭하게 만드는 것 또한 그녀의 매력이었다.

막시밀리언은 허리춤의 칼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 그녀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늘어놓은 것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땅에 드리웠던 거대한 그림자가 주춤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힘겨운 승리였다.”

“이곳의 일을 이름이 아닙니다.”

“음?”

순간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얻어낸 힘겨운 승리가 폄하당한 느낌이 든 탓이다. 허나 라일라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에 박혀 있었다.

“이 땅에 무언가 다른 존재가 들어섰습니다. 죽은 신과는 다른…또 다른 신이.”

굳어 있던 그녀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것이 그녀의 눈을 짓누르는 듯했다.

*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목소리에 힘을 되찾은 타르가이 베르겐이 선두에서 초원의 전사들을 이끌었다. 색이 바랐던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본래의 색을 찾은 상태였다. 노인의 그것처럼 쪼그라들었던 몸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항시 자유로이 자연을 노니는 정령들마저 떨게 하는 패기가 그의 몸 전체에 거세게 넘실거렸다.

“바로 오늘! 우리는 저 지긋지긋한 도시를 끝장낼 것이다!”

“오오오오오!”

이전과 똑같이 군은 양 갈래로 찢어졌다. 한 쪽은 타르가이 베르겐이 직접 이끌었고, 다른 한 쪽은 포라칸이 맡았다. 일전에 포라칸과 나누어 군세 하나를 맡았던 콰이렌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내가 포라칸보다 미덥지 못했더냐?”

“제 자리는 대족장의 곁입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슬쩍 장난을 쳤으나 역시 이번에도 콰이렌은 별 반응이 없었다.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찬 타르가이 베르겐은 다시 살마드의 높은 성벽으로 눈길을 돌렸다.

‘참으로 오래도 걸렸군.’

아무리 도시의 성벽이 높고 튼튼하다 해도,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진즉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상대의 저력은 놀랍게도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란딜 페레모어라.’

포라칸을 곤란하게 만들고, 콰이렌마저 패퇴시킨 자다.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가 해낸 일만 보아도 대단한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제국의 황제가 직접 임명한 장군이라고 해야 할까.

‘제국에는 그런 자들이 여럿 있겠지.’

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걸기 전에 상대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공부를 마친 그였다. 전쟁의 시작부터 가장 큰 장애가 될 아란딜 페레모어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제국의 4위장(位將) 중 3품계인 흑포장군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다.

일국의 왕과 같은 권세를 누리는 군주라는 작자들을 제하고, 제국 군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대장군과 역시 군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상장군들을 제외하면 일선에서 활약하는 최고위 장군들이 바로 청녹흑적(靑綠黑赤)의 4위장. 그러니 단순히 계급만으로 본다면 흑포장군이라는 자리는 3번째다. 그 넓은 제국에서 3번째라 함은 물론 대단하지만, 제국을 상대로 맞서야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고작해야 3번째 위계에 위치한 자에게 이리 애를 먹는다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지키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기는 하지만…….’

타르가이 베르겐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의 기다란 칼을 뽑아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얼굴이나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

“장군! 적이…….”

“알고 있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카르골을 지팡이삼아 몸을 일으키던 그는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장군! 괜찮으십…….”

모그로프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들었기 때문이다.

“괜찮네. 잠깐 발을 헛디뎠을 뿐이야. 그러니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

모그로프는 상관의 어설픈 거짓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악몽 같았던 전투가 끝난 후. 그는 전투 시작 전과 너무도 달라진 그의 상관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검은 색이 더 많았던 머리카락은 노인의 그것처럼 완연한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도 주름이 졌다. 하루가 지났건만 그 홀로 족히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아란딜 페레모어를 오랫동안 따랐던 장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혈염술. 실로 끔찍하구나.’

아무리 대가 없는 힘은 없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째서 혈염술이 그 놀라운 위력에도 불구하고 금술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그 까닭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괴물 녀석! 그 놈 때문에…….’

모그로프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순조롭게 전투가 흘러가던 와중에 나타난 푸른 눈의 괴물. 그놈이 날뛰기 시작하며 전황이 어려워졌다. 그놈을 몰아내기 위해 아란딜 페레모어가 직접 나섰지만, 끝내 놈의 목을 베지 못하고 패퇴시키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아란딜 페레모어가 자신의 삶을 불살라 얻은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모그로프는 살아서 다시 보게 된 그날의 아침 하늘이 그리 달갑지 않았었다.

‘다시 혈염술을 사용하시면…장군은 버티지 못하신다.’

안다. 모두가 그것을 다 안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성벽은 더 이상 적을 온전히 막아주지 못한다. 부족한 전력으로 적에 맞서 싸워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나서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싸우는 대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려 들지도 모른다.

‘막아낼 수 없겠지.’

아란딜 페레모어가 남은 생명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적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다.

‘장군의 옆에서 죽겠습니다.’

모그로프는 결연하게 의지를 벼렸다. 그리고 힘겹게 걸음을 떼는 상관의 뒤를 따랐다.

*

아란딜 페레모어는 성벽 위 망루에 올랐다.

뻥 뚫린 광경을 눈에 담기도 전에 칼바람이 먼저 그를 반겨주었다. 몸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으나 마음은 더 없이 상쾌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적군을 보고도 답답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이번이 살마드와, 자신의 마지막 전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억지로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후련히 놓아버렸다.

“윌리스 리에론 장군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모그로프가 다가와 말했다.

“장자가 있지 않은가?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자입니다만. 그런 자로 괜찮겠습니까?”

“달리 인물도 없지 않나.”

바크렌 군부의 수장인 윌리스 리에론은 일전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사가 몇 명씩 붙어 상태를 살피고 있었지만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력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장군이 쓰러졌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아란딜 페레모어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그가 군문에 처음 들어서고 나름대로 활약해가며 이름을 알리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도 없을 만큼 지고한 위치에 있던 한 사내가 그에게 말했었다.

‘없는 솜씨로 그렇게 무모하게 설쳐대다간 끝이 좋지 않을 거다…….’

그때의 그는 참 철이 없고 무모했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던진 그 말에 감히 대꾸를 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을 했었나 싶다.

‘아니라고, 두고 보라고 했지만…결국 당신의 말씀처럼 되고 말았군요. 그래도 뭐…이 정도면 무부의 것치고는 괜찮은 결말이 아니겠습니까.’

명예타령을 하는 이들은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야말로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고들 말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그런 말들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어쩌다보니 그런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사실 바크렌으로 온 것은 자청한 것이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더러 왜 그런 벽지로 향하느냐 물었다. 더러는 만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바크렌 행을 고집했다.

지쳤던 탓이다. 그는 바크렌에서 적당히 세월을 보내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은퇴를 할 생각이었다.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꼬여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뿌우우우-!

전투가 벌어지던 내내 저주스러웠던 뿔 나팔 소리가 이제는 기분 좋게 들렸다. 사감을 접어두고 귀를 여니 웅혼한 나팔 소리는 꽤나 듣기 좋은 소리였다. 왜 이제껏 몰랐던 것일까?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팔 하니 또 그 분이 생각나는군.’

그 역시 항시 뿔 나팔을 허리춤에 휴대하고 다녔었다. 싸움이 있기 전, 그는 항상 그의 나팔을 직접 불어 올리며 아군의 전의를 북돋고 적의 사기를 짓뭉개곤 했었다. 그 나팔 소리로 인해 그가 이끄는 군대는 싸우기 전부터 승리했고, 그에게 대적하는 적은 싸우기 전부터 패배했다.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들은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어찌 그 소리를 잊겠는가. 그.

우우우우우우우우---!

영혼의 밑바닥까지 전율에 떨게 하는 소리를.

“뭣……!”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던 아란딜 페레모어가 급히 난간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리의 시발점을 눈으로 쫓았다.

“…….”

아주 먼 거리에, 아주 희미하게 깃발 하나가 보였다. 그 형태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 작품 후기 ==========

덜 애송이가 더 애송이에게.

오늘도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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