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25화 (125/1,064)

<-- 세 군데의 전투 -->

그어어어!

쾅!

큼지막한 주먹이 성문을 때렸다. 이제껏 위태롭게 버티던 성문이 마침내 뒤로 밀리며 공간을 냈다. 그 순간, 전장의 1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반군 지휘부는 쾌재를 질렀다.

“성문을 돌파했습니다!”

부관의 들뜬 목소리는 유리한 전황을 대변했다. 베이론 메라디스 역시 다소 마음이 들뜨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지휘관으로서 침착함을 지켰다.

“병사들을 투입하기 전에, 시체거인이 먼저 진입하여 적의 예봉을 받아냈으면 좋겠소이다.”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리 하지요.”

제사장이 클클 웃으며 답했다. 여전히 껄끄러운 노인이나 그가 이번 전투의 제1공임은 분명했다. 그의 계획 덕에 큰 어려움 없이 말레이드를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왔으니까 말이다. 비록 사상자는 제법 냈으나 어차피 정예는 상하지 않았으니 작은 피해라 할만 했다.

“그나저나 허망하군. 그 유명한 카리비온 하야신도 별 수 없는가.”

“신의 힘 앞에 인간이 어찌 대항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신의 힘이라. 베이론 메라디스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저 시체거인은 분명 사신 하가록의 성물(聖物)과 그가 내린 법술로 일으킨 것이니.

하지만 그래봐야 이름 붙여진 신이 아닌가. 누가 벌판의 파수꾼이라는 이름을 부르는가. 세상이 말하는 그들의 신은 이제 하가록이었다. 신으로서의 위엄과 빛을 잃어버린, 과거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신도로서 절치부심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그마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저리 들뜬 것을 보니 비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밀어붙여라.”

허나 그들이 중요한 동맹인 것은 사실. 따라서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담담히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졸들이 뚫린 성문을 통해 도시 내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도…….”

그는 다가온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도시 내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헌데, 그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이었다.

“뭐지?”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지휘부의 외각에 서 있던 한 병사였다.

그는 우측에서 이는 희미한 먼지구름을 보았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허나 어둠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먼지구름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보곤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기마?’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기마대였다. 수십은 넘어 보이고 백에는 못 미치는 것 같은 기마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아군의 전령이라면 저렇게 다수가 움직일 이유가 없고, 전령이 아니라면 저렇게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남은 답은 하나.

“적이다!”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그 병사의 외침이, 도시 내로의 진입을 말하려던 베이론 메라디스를 붙들었다.

“적이라고?”

베이론 메라디스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고, 그제야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기마를 발견했다.

‘깃발도 없고…속도를 늦출 생각도 없어 보이니 적이 확실하군. 허나…수가 너무 적지 않은가? 백도 안 되어 보이는데.’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내달려오는 꼴을 보아하니 의도만은 확실하게 읽혔다.

‘내 목을 노리는가?’

확실히 지금 대다수의 노병(奴兵)들은 성문을 뚫고 들어가 있는 상황이고, 밖에 남은 것은 정병 오백뿐이었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기는 잘 잡았군.’

허나, 그렇다고 해서 수십에 불과한 기마가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장군! 소관에게 맡겨주십시오! 미친놈들의 목을 모두 베어 오겠나이다!”

“좋다. 맡기마.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거라.”

“옛!”

건장한 체격의 무관이 휘하의 기마를 이끌고 나섰다. 그 수가 백이 훌쩍 넘었다. 그들은 곧장 진을 빠져나가 다가오는 적에 맞서 달려 나갔다.

베이론 메라디스는 도시로의 진입을 미룬 채 가만히 그의 병사들이 저 정신 나간 것들의 수급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두 기마대는 서로를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서로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만큼 그들의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곧 두 선봉이 부딪쳤다.

콰앙!

베이론 메라디스는 아군 기병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다. 허나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용감하게 말을 달린 그의 수하는 단 일합 만에 목이 달아났고, 용맹하게 돌진했던 기병대는 반으로 갈려나갔다. 너무나 예상 밖의, 충격적인 결과에 그는 순간 평정을 잃고 말았다.

“이런 한심한!”

베이론 메라디스는 얼굴까지 붉히며 분을 터뜨렸지만, 그의 노함과는 상관없이 적 기병대에 의해 반으로 갈린 베이고르의 기병대는 그대로 진형이 붕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적의 기병은 꿰뚫은 기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여전히 그가 위치한 진영의 한가운데였다.

‘정예로군.’

베이론 메라디스는 명색이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었다. 말레이드 점령을 위해 베이고르의 왕, 주앙 칼 고르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사내였다. 그는 용맹함으로 이름 높았지만 일군을 이끌 만큼의 머리도 갖추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었으나 판단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단번에 상대 기병이 최정예임을 알아차렸다.

‘그래. 진지하게 내 목을 노린다 이건가.’

방금 전까지는 콧방귀만 나왔으나 이제는 그도 이 상황을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장군!”

“침착하라! 덤빈다면 맞아 싸워주면 될 일! 창병들은 1선에, 검병은 뒤를 받치고 궁병은 마지막이다. 목각을 좌우로 넓게 펼쳐 적의 선회를 대비하라!”

“옛!”

지시이행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세 병과의 병사들이 진형을 갖췄고, 녹각도 자리이동을 끝냈다. 베이론 메라디스는 그의 말에 올라 코앞까지 다가온 적군을 응시했다.

‘재미있군.’

그러고 보면 출병한 이후 직접 칼을 휘두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총대장으로서 그럴 기회가 없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몸이 근질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상황이 확실히 예상 밖이기는 하나, 그리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 어찌 할 것이냐.’

전면의 배치는 완벽하다. 적의 대장이 상식이 있는 자라면 준비를 마친 적을 상대로 들이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따라서 옆으로 우회하여 들이칠 가능성이 높지만, 양옆으로도 녹각을 배치해뒀다. 그렇다면 아예 크게 돌아 뒤를 치려 할 것인가?

‘그렇게 나온다면 뒤에서부터 물리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어찌 할 것인가.

*

“대장님!”

“그대로 돌파한다!”

살라스의 우려가 무엇인지는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군터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가장 단단한 곳을 깨부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에는 앞에 펼쳐진 대형이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금 전 적 기병을 그대로 갈라버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칸젤을 쥔 손으로부터 흘러들어온 힘은 그의 몸을 가득 적셨고, 나아가 그를 태운 쿠센에게까지 내려갔다.

“화살이 떨어진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살짝 늦춰졌던 속도가 그의 고함을 신호로 다시금 급격히 올라갔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화살은 그들이 지나간 후에야 땅에 내리꽂혔다.

“사격개시!”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마 위에서 병사들이 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긴 창을 치켜든 채 기다리고 있는 적들에게 화살을 선물해주었다. 느닷없이 날아든 화살에 적들이 우왕좌왕했다. 그 와중에 군터의 화살은 굳은 얼굴로 대기하던 창병의 눈을 정확히 관통했다.

“좋아! 이대로 돌파한다! 뒤처지지 마라!”

수십의 기마가 일제히 활을 안장에 걸고 창을 들었다. 간격을 최대한 좁히고 한데 뭉쳐 달리는 그들은 그 자체로 한 자루의 창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군터는 가장 앞에서 상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창극이 되었다.

콰앙!

양옆에서 창을 찔렀던 두 명의 반군 병사가 부러진 창과 함께 튕겨나갔다. 군터는 느릿하게 보이는 적의 공격을 거칠게 파쇄하며 쿠센이 힘껏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허나 느리게 보인다 하여 그의 목을 노리는 숱한 공격들을 받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미처 쳐내지 못한 공격이 갑옷과 마갑, 그리고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부위를 때리기도 했다.

푸욱!

창날이 종아리 뒤편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군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앞만을, 인의 장벽 뒤로 보이는 적장만을 응시했다.

“하압!”

용감히 막아서려던 병사의 목이 잘려나갔다. 더 없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머리는 빠르게 날아가 적장의 앞까지 다다랐다. 호위로 보이는 무관이 잽싸게 쳐냈지만 흩날린 핏물이 적장의 얼굴을 적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붉게 물든 적장의 얼굴을 확인하고, 군터는 씩 웃었다.

*

“이놈이……!”

베이론 메라디스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적 대장의 도발은 그에게 지독한 수치심을 안겼다. 그리고 정확히 자신을 향하는 웃음을 확인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침착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대담한 놈이로구나! 좋다! 어울려주마!”

휘하 무관이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잠자코 있던 제사장이 나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일군의 수장이신 장군께서 저런 놈과 직접 맞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 망아지는 이 몸이 처리하겠습니다.”

제사장의 주름진 입가에는 짙은 흥미를 담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베이론 메라디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산한 공기가 말라비틀어진 나무 지팡이에 몰려들었다.

“재미있는 놈이군. 산 채로 잡아주마.”

스산한 바람이 꿈틀대며 몰려갔다. 모든 것을 무심히 스쳐지나가야 할 바람이 의지에 속박되어 다가오는 적 기병의 선두에게 향했다. 제사장의 눈에는 이미 옴짝달싹 못한 채 구속되는 적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흥!”

허나 그의 달콤한 예상은 적이 내지른 창 한 자루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 어떤 칼날도 베지 못하는 신의 바람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 것이다. 그 반동으로 인해 제사장은 당혹할 틈도 없이 시커먼 피를 토해야만 했다.

“커헉!”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나, 실패한 모양이군.”

베이론 메라디스는 피를 토하며 무릎 꿇은 제사장을 비웃으며 칼을 빼들었다.

“자, 와라. 여기가 네놈의 묏자리니라.”

*

선봉에 선 군터의 무력과 뒤를 받쳐주는 부하들의 용전에 힘입어 똘똘 뭉친 적군을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속도와 기세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 군터는 내심 적장이 내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용력에 자신이 있나 보군.’

허나 그런 우려는 기우였다. 적장은 물러서기는커녕, 먼저 한 자루 칼을 치든 채 말을 달려왔다.

카앙!

칼과 창이 거세게 부딪치며 불똥을 일으켰다. 군터와 적장, 베이론 메라디스는 정면으로 붙은 몇 번의 격돌 이후 나란히 말을 달리며 연신 부딪쳤다. 그들의 뒤를 군터의 수하와 반군 기병들이 길게 따르며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제법이구나!”

베이론 메라디스는 한 자루 장검을 사용했다. 사실 검신이 길다 한들 검이라는 것이 마상에서는 어울리지 않아 좀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베이론 메라디스는 마상검술의 단점을 덮고도 남을 만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칸젤의 예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날과 날이 맞부딪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며 급소만을 노려 공격해왔다.

‘샌님 같은 놈이군.’

확실히 그의 검술은 명인의 그것이라 할만 했다. 그러나 군터의 눈에 비친 그는 훌륭한 무인일지언정, 군인으로서는 애송이였다.

카앙!크게 부딪치며 두 병기가 뒤로 밀려난 순간, 군터는 냅다 몸을 날리며 베이론 메라디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돌진이었기에 베이론 메라디스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낙마했다. 그가 먼저 땅에 처박히고, 군터의 몸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오만한 애송이.’

적장의 나이는 40줄이 넘어 보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보인 행동은 전장에 처음 나온 어린 애송이와 다를 바 없었다.

“컥!”

군터는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장의 얼굴에다 냅다 주먹을 날렸다. 돌덩이처럼 묵직한 주먹이 콧잔등을 강타하자 몸을 일으키려던 베이론 메라디스는 다시금 땅에 처박혔다. 군터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콰직!

얼굴이 찌그러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한 번 누운 베이론 메라디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것을 넘어 마침내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나서야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 완전히 망가진 머리통을 목에서 베어냈다.

“애송이면 애송이답게 겸손했어야 했다.”

산뜻한 바람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 작품 후기 ==========

용맹한 장수가 소수 병력으로 적진을 돌파하거나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은 역사서에도 여럿 실려 있죠.

슬슬 군터도 본격적으로 활약할 때가 되었지 싶네요.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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