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군데의 전투 -->
일군을 이끄는 장수라 하면, 그것도 적의 칼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지휘를 한다면 일신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무예 정도는 지니고 있기 마련.
요 며칠 동안 몇 번씩이나 성가시게 했던 적장 역시 그러한 일반적인 범주에 속했다. 그는 떨어지는 무게까지 실은 찌르기를 경황없는 와중에도 막아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크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친위병력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반응은 기민했다. 한 번의 찌르기 직후에 벌써 주변을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싸가고 있었다.
백이 훌쩍 넘는 수에 포위를 당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여 군터는 즉시 전면으로 나아갔다. 적장과 그 사이를 막아서는 것은 대여섯의 병졸들뿐이었다. 아직까지, 적장의 목은 사정권 내였다.
“찔러!”
역시 잘 훈련된 병력이었다. 호령에 맞춰 일제히 창을 내지르니 공격에 시간차와 사각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포위에 이은 협공.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
군터의 눈에는 그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그리 빨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한 번 창을 내지르는 시간 동안, 군터는 칸젤을 두어 번은 휘두르고 찌를 수 있었다.
그 두어 번이면 충분했다. 적의 공격을 쳐내고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서걱!
흐릿한 궤적에 걸린 창두 네 개가 시에 떠올랐다. 상황파악을 못한 병사들을 쿠센이 머리와 몸으로 밀어젖혔다.
‘칼 솜씨는 활 솜씨를 못 따라가나 보구나.’
더없이 집중해 있었기에 보였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적장의 눈이.
한 번의 베기는 막혔다. 칸젤과 부딪친 칼이 위로 크게 튀었다. 그리고 연달아 이어진 두 번째 공격은 확실하게 적장의 목 줄기를 베었다. 본래는 깔끔하게 머리통을 목에서 떼어내려 했건만, 적장이 반응하여 몸을 뒤로 뺀 탓에 빗나가고 말았다.
“커흑!”
적장이 핏물이 왈칵 솟아나는 목을 틀어쥐고 뒷걸음질 쳤다. 고통에 일그러졌으면서도 원독에 찬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를 보며 군터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던졌다.
“컥!”
슬금슬금 물러나던 한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군터가 던진 단검은 그의 무릎 깊숙이 박혀 있었다.
서걱!
이번에야말로 온전히 들어간 공격에 적장의 목이 잘려나갔다. 군터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지휘관을 잃었지만 반군 병사들은 눈앞의 적을 앞에 두고 마냥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다.
창이며 칼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군터는 위험할 것 같은 공격만 쳐내며 최대한 속도를 냈다. 그 와중에 허벅지며 어깨가 베이고 찔렸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으, 으아앗!”
쓰러진 사내는 언뜻 보면 그저 장군 옆에 붙은 부관 정도로 보였다. 나름대로 갑옷에다 칼까지 차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무관이라고 보기에는 체구가 다소 왜소하고 근육이 부족해 보였지만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군인도 있으니 이해 범주 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냄새가 났다. 숨길 수 없는 악취. 저 성문 앞에서 주먹질을 재개한 ‘인형’과 비슷한 썩은 내가.
‘살려서 데려가고 싶지만…어쩔 수 없군.’
욕심이 나지만,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도끼처럼 내리찍은 칸젤의 창대가 썩은 내 나는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머리뼈가 으스러지고 안의 내용물이 튀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노렸던 바였다. 제 아무리 잘 훈련된 병사라 해도 결국은 사람. 그리고 사람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하!”
군터는 적군의 그 순간적인 경직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금 말머리를 돌려 목이 날아간 시체를 지나치며 주인을 잃고 땅을 뒹굴던 칼을 집어 들었다. 수천을 이끌던 장군이 사용하던 것이란 점을 놓고 봐도, 무지막지한 예기를 자랑하는 칸젤에 두 번이나 부딪치고도 멀쩡했던 칼이었다. 그것만 해도 틀림없이 보기 드문, 쓸 만한 검임에 분명하다. 사람 하나는 무리여도 칼 한 자루 챙기는 데 여유 운운할 정도는 아니니, 주인 잃은 좋은 검을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다.
“막아!”
쿠센은 얼마 안 되는 거리에서도 빠르게 속도를 붙였다. 속도가 붙은 기병은 보병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존재였다. 군터는 막아서는 병사들 서넛을 그대로 베어 넘기고 포위를 돌파했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내달리던 와중, 등에서 다발의 충격이 느껴졌다. 아마 화살 몇 대가 박힌 것 같았다. 군터는 이를 악 물고 고삐를 당겼다. 쿠센은 알겠다는 듯 있는 힘껏 다리를 움직였다. 이 영리한 군마 역시 아는 것이다. 지금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두두두!
성벽 앞. 시신이 자그마한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쿠센은 거침없이 시신을 밟고 달렸다.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던 중. 군터가 창병의 일선을 뛰어넘을 때처럼 널브러진 시신을 창대 끝으로 내리 찍었다. 동시에 쿠센이 높이 뛰어올랐다.
히히힝!
뛰어올랐다가 아니라 날아올랐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날갯짓하는 새처럼 높이 떠오른 한 마리 흑마는 아슬아슬하게 성벽 위에 안착했다. 뒤따라오던 적병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성벽 위에서 적에 맞서 싸우던 아군 병사들도 입을 떡 하고 벌렸다.
“후우…후우…….”
직접 쿠센을 몰았던 군터조차 현실감이 들지 않아 슬쩍 성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때마침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화살을 피해내고는 비로소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믿기지 않는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밟고 뛰어오를 만큼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벽과의 높이 차이는 상당했다. 이렇게 내려다보니 그게 더 확실히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쿠센을 재촉했다. 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에 대해 아무 의심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리어 성벽 위로 올라온 지금은 믿기지 않는 일이라며,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너냐?’
손에 꽉 붙든 창, 칸젤에 눈이 갔다.
적장의 목을 베고, 술사의 머리를 터뜨리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성벽 위에 뛰어오르기까지의 과정. 그 모두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것들뿐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이은 전투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몸이다. 피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기운이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네가 부린 조화더냐.’
차가운 창에서 감정이 전해져온다. 기쁨, 즐거움, 흥분. 그러한 칸젤의 감정은 군터의 마음을 살살 간질였다. 우리는 더 신나고 대단한 것을 할 수 있을 거라며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군터 대장! 급보입니다! 납골당에 괴물들이 나타났답니다! 지원 병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가 또 하나의 비보를 전했다. 군터는 대답 대신 흘깃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의 그 괴물은 모페이브의 구속에서 풀려나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성문을 두드려대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보이는 반군 병사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 놈에게는 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적의가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놈이군.’
통제를 벗어난 인형은 정말 괴물이 되었다. 아마 납골당에 나타났다는 괴물도 저 녀석과 같거나, 비슷한 부류일 터. 다행이라면 말레이드의 납골당은 외성의 구석에 위치해 있다는 것일까. 병사는 다급하게 와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리 급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 성 밖에서 열심히 성벽을 넘으려고 발광을 하는 반군들에 비하면 말이다.
“군터 대장! 차모스 대장으로부터의 지원 요청입니다! 정체 모를 괴물 때문에 성문이 뚫리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납골당 건으로 지원 요청이 오고 곧바로 또 다시 지원요청이 왔다. 차모스는 말레이드의 천인장으로, 남쪽 성문을 지키고 있는 자였다.
‘위기로군.’
아무래도 괴물은 다른 곳에서도 다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고, 멈춰 세울 수도 없는 공성병기 급의 파괴력을 지닌 괴물은 가뜩이나 움츠린 채 수성에 임해야 하는 말레이드의 입장에서는 재앙일 수밖에 없다.
급박한 상황에도 상념에 잠겨 있던 군터는 문득 얼마 전 카리비온 하야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급한 처지에 몰리면 악수를 내기 쉽다고 했지.’
하지만 패배를 부르는 것이 악수라면, 그가 보기에,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야말로 악수였다. 이대로 버텨봐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결국 외성을 내줄 것이고, 내성으로 도망가 버티다가 천천히 죽어가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가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무언가 수를 낸다고 하면 지금뿐이지 않겠는가.’
성벽 아래 반군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군을 이끄는 장군이 비명횡사 해버렸으니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장교들이 혼란을 수습하려 하겠지만 쉽지 않을 터.
하지만 정예라고 할 만한 병사들이 흔들리는 반면에,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잡졸들은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눈이 먼 말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지, 지금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무작정 달려간다.
‘홀리기라도 한 건가.’
이쯤 되었으면 퇴각을 해야 정상이다. 계속된 무모한 돌진은 아군에게도 피해지만, 반군에게는 더욱 큰 피해니까 말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성문을 두드리던 괴물이 자신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성벽을 오르려 한다. 정말로 진지하게, 무언가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술법으로 인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즈림에게 가서 전해라. 지금부터 서문의 지휘는 네게 맡기겠다고.”
“옛!”
아즈림은 말레이드의 백인장으로, 제법 출중한 실력을 지닌 무관이었다.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능력도 괜찮았기에 당장의 위협이 가신 지금, 서문을 지키기에 무리는 없으리라.
“그리고 넌 북문으로 가라. 가서 내 말을 사령관께 전해라.”
“옛. 하온데 말씀이라면 어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나는…….”
군터의 말이 이어지며, 듣고 있던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사령관! 성문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카리비온 하야신은 성문 앞에 달라붙어 있는 두 마리 괴물을 보고 이를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좋지도 않지만 적의 주력을 상대로 하는 것치고 크게 나쁘지도 않은 흐름이었다. 하지만 저 괴물들의 등장으로 그 잔잔하던 흐름은 격변을 맞았다.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 주술사는 저것이 사기의 응집체이며, 없애기 위해서는 특별한 술법을 써야 한다고 했다.
“불을 질러버리는 것은 효과가 없겠나?”
“어렵습니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다 해도 저것은 끝없이 재생할 겁니다. 저것을 이루는 사기는 그만큼 막대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시신을 다 태운 것이 아니었나.”
“그것이…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디서 저만한 기운이…….”
무기력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카리비온 하야신은 이 늙은 술사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기대하기를 포기했다.
‘피곤하군.’
흰 머리가 늘어가며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나날이 실감했지만, 한 번도 노쇠했다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피로했다. 모든 것을 놔 버리고 눈을 감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고, 그럴 수 없음을 알지만 말이다.
‘성문을 사수하기는 힘들겠군.’
군문에 든 지 40여 년. 그리고 아란딜 페레모어를 따라 전장을 누빈 세월만 20년이 훌쩍 넘었다. 바크렌에 온 뒤로는 휴양에 가까운 세월이었지만, 전쟁에 관한 그의 경험은 여전히 풍부하고 쓸 만했다.
사람과 싸운 적이야 셀 수도 없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과 싸운 적도 적지 않았다. 이따금씩 약탈을 위해 넘어오는 야만인들만 신경 쓰면 되는 평화로운 북부와는 달리, 진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남부와 서부에서는 별의별 것들을 다 볼 수 있다.
‘사기 덩어리라고 한다면…축성은(祝聖銀)으로 된 무기를 써야 하는데.’
최선의 방법은 그것이지만 당장에 축성은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축성은으로 된 무기는 귀물이지만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싸구려 철검보다 못하다. 그런 것을 일일이 들고 다니는 이는 없다.
‘막을 수 없단 말인가? 허나 성문을 내준다면 그 다음은?’
카리비온 하야신의 고민이 깊어갈 무렵. 한 병사가 다급히 달려왔다.
“군터 대장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군터? 말하라!”
설마하니 서문이 뚫린 것인가 싶어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병사가 전한 말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으며,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다면…이미 움직였단 말이냐?”
“예. 아마도……. 군터 대장은 사령관의 선택에 목을 맡기겠노라 하였습니다.”
“이런 무모한 자 같으니…….”
깊은 탄식 뒤에는 또 다른 고뇌가 따랐다.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이 갑작스레 벌어지니 그로서도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이제는 그의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시급한 결단을 요하고 있었다.
“…….”
질끈 눈을 감았던 카리비온 하야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 댓글이 많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참고할 만한 의견들이 많이 보였고, 제 능력의 부족을 느꼈네요.
특히 잦은 시점 변환으로 몰입감이 떨어졌다는 의견은 정말 크게 와닿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건 틀림없이 제가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타 플랫폼 연재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셨는데, 그 부분은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제 능력이 부족한 이유입니다.
이제 날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다가 또 다시 더워질지도 모르지만,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여름 동안에 건강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