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군데의 전투 -->
시커먼 먹구름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알이 굵은 눈발이 쏟아져 내렸다. 그 기세가 엄청난 수준을넘어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살아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요란한 날씨도 날씨지만, 그런 것이 딱 일정 지점 이상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더 놀랍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경계라도 그어진 것처럼, 한 발자국 차이임에도 하늘의 색이 확연히 달랐다. 한 걸음을 넘어가면 시커먼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발이 반겨주고, 한 걸음을 물러서면 푸른 하늘의 온기가 굳은 몸을 녹여주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
녹색 망토가 바람에 흩날렸다. 경계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이 미풍이 되어 망토자락을 흔든 것이다.
그가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를 보며 말했다.
“전하. 이 이상 나아가는 것은 힘들 듯싶습니다.”
“결계로군.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들어오지 말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사내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는 거대하고 기이한 말에 앉아 있었다. 흡사 촘촘한 갑옷을 걸친 것 같은, 말이면서도 말 같지 않은 괴마(怪馬) 위에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부터 네가 군대를 이끌거라.”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만, 하오면 전하께서는?”
“일이 급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꼬마 놈의 시체는 보고 싶지 않다.”
“용아(龍牙)만 데리고 가시렵니까?”
“그 외에 저 결계에서 버틸 놈이 있을 것 같으냐? 일전에 쿠엘단 녀석에게 저것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녹색 망토의 장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소장은 여기서 잘 쉬고 있다가 저 결계가 걷히고 나면 곧장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음. 뭔가…조금 바뀐 것 같은데.”
“전하를 따르는 충실한 부하로서 전하의 명에 충실할 뿐입니다.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능글맞은 놈 같으니.”
괴마 위의 사내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를 태운 말이 거침없이 눈보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시에 일단의 병력이 그를 뒤따랐다.
*
어둑한 밤.
군터는 처음 홀로 말레이드의 거리를 거닐었다.
일이 없어도 성벽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며 시간을 보내던 그였지만, 오늘은 수하들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대장님께서 모범을 보이시는 것도 좋지만, 대장이 너무 성실하면 그 밑에 부하들이 고달픈 법입니다. 어차피 반군들도 잠잠하니 오늘이라도 숨 돌릴 틈을 좀 주시지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하들을 위해 좀 쉬라는 살라스의 말에 군터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여 이렇게 때 아니게, 하릴없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으으윽!”
제법 밤이 깊었건만 거리에는 깨어 있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자의로 깨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짚이며 옷가지를 두껍게 덮어도 다 막지 못한 찬바람이 지독히도 괴롭힌 탓이었다.
본래 말레이드에 거주 하던 인구에 주변의 마을들에서 몰려온 이들까지 더해지니 기존에 말레이드에 있던 건물들로는 도저히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기존 말레이드 시민들이 몇 가구 씩 한 집에 비좁게나마 끼어 지내고, 그렇게 해서 빈 집에 피난 온 이들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해서도 공간이 부족해 지금처럼 헛간이며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래도 하루마다 교대로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 있어 입이 돌아가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작스레 발발한 전쟁은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다. 한 순간에 집을 잃고 난민 신세가 된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자기가 살던 도시가 전장의 한복판이 되고 자기 집을 남에게 내주고 이웃의 집에 들어가 지내야 하는 말레이드의 시민들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콜록콜록!”
이따금씩 그를 쳐다보는 이들의 눈에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두려워할 뿐이다. 어쩌면 제국군이든 반군이든, 그들에게는 모두 두려움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이기든 어서 이 전쟁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새삼 입맛이 썼다.
‘하긴, 내가 씁쓸해할 것도 없군.’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저들을 위해 싸우는가?’하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생면부지의 이들을 위해 목숨 내놓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되고픈 마음도 없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일 뿐. 듣기에 좋은, 숭고한 이유 따위는 보기 좋으라고 걸어놓는 간판에 불과하다. 당장 여기서 그럴듯한 갑옷을 걸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모두가 다 그렇지 않겠는가?
단지, 그렇게 싸워 얻은 승리에 기뻐할 이들이 많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기분이 좋은 일일 것이다.
‘너무 감상적인 생각인가.’
긴장으로 잔뜩 팽팽해졌던 정신이 간만의 휴식으로 흐트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비렁뱅이 꼴이 되어 콜록거리는 어린 아이를 보고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벨리사.’
멜루니악에 있을 아내가 떠올랐다. 지금쯤 곧 세상에 나올 아이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
당연히 승리를 원하지만 그보다는 생존을 더 갈망하는 이유. 그것은 삶에 미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군터에게 있어 그 미련은 하나뿐인 가족과, 아직 보지 못한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어머니. 당신이 아직 살아 있어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를 소중히 여겼던, 가장 헌신적이었던 여인은 아직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따금씩, 그는 그녀를 벨리사에게 투영하곤 했다. 벨리사 역시 그녀처럼 헌신적인 어머니가 될까? 군터는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자신이 항상 함께 할 것도 믿었다.
댕-! 댕-! 댕-!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하며 흐릿한 미소를 짓던 찰나.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종소리가 울렸다. 군터는 즉시 땅을 박차고 달렸다.
*
섬뜩한 광경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물결이 밀려왔다. 대열은 맞추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오는 듯했고, 그래서 더 소름끼쳤다.
“야전(夜戰)이라니.”
반군 병사들이 모두 올빼미 눈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야전을 벌일 경우 유리한 것은 수성하는 제국군 쪽이었다. 그들은 그저 성벽 아래로 화살을 쏘고, 올라오는 놈들을 찌르고 베면 그만이지만, 반군은 어두컴컴한 가운데 성벽 위로 화살을 쏘고 사다리를 올라야 할 테니까 말이다. 나름대로는 허를 찌른답시고 야습을 감행한 것 같지만, 군터가 보기에 이것은 영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즈림! 발다루드! 좌우를 맡기겠다!”
“맡겨 주십시오!”
며칠 간 전투를 거듭하며 안면을 익힌 두 백인장이 각기 병사들을 이끌고 좌우로 달려갔다. 군터는 성문 바로 위. 중앙에 위치한 채 적을 기다렸다.
‘뭐 하자는 수작인지 모르겠군.’
어쩌면 사령관의 추측처럼 성벽 아래 잔뜩 쌓였던 시체로 뭘 하려다가 이쪽에서 시신들을 깡그리 불태워버리니 인내심을 잃고 덤벼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껏 며칠 동안 열심히 준비해놨더니만 허탕이 되면 아무래도 짜증이 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려고 해도, 묘한 불길함이 자꾸만 등줄기를 간질였다.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은, 아무런 근거 없는 의심이 들었다.
군터는 본능의 속삭임을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적절한 긴장을 유지한 채 밀려오는 적을 똑똑히 두 눈에 담았다.
‘여전히 미친놈들 같군.’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달려오는 반군 병사들에게서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심히 이상했다. 물론 사기가 높고, 정예인 병사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안고서도 적을 향해 돌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선봉에 서게 되면 망설임에 발을 붙잡히기 마련이다. 당장 군터 자신조차도 적을 앞에 두고 선봉에 설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군터는 저 많은 잡병들이 모두 자신보다 용감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뭘까? 저 징그러운 하루살이들은 어찌 저렇게 겁이 없을 수 있을까?
“궁수 준비.”
“궁수 준비!”
뭐, 그런 것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저 겁 없는 놈들도 화살에 맞고 창에 찔리면 비명을 지른다. 목을 따면 죽는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지 않은가.
“쏴라!”
첫날 전투에서는 한 번의 호령에 수백 발의 화살이 쏘아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크악!”
마구잡이로 달려오던 수십이 우수수 넘어진다. 그러자 그 뒤의 수백이 쓰러진 이들을 밟고 달린다. 성벽 위의 다른 병사들은 그런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군터는 볼 수 있었다.
‘정말 미친놈들이 아닌가.’
첫날부터 저랬던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오합지졸들 주제에 사기는 살아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분명 이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쏟아지는 화살에도 아랑곳 않고 달린다. 아무리 방패가 있다고는 해도 저 정도면 용감한 것을 넘어 무모한 수준이다. 그런데 한두 명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렇다.
적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자 아군 병사들도 슬슬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터는 그들이 동요를 보이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정신 나간 놈들이 오늘밤에는 마음을 아주 단단히 먹었나 보구나! 기세에서 밀리지 마라! 주제도 모르는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요 며칠 한쪽 전선을 통째로 책임지고 싸우면서 군터는 크게 배운 바가 있었다.
전투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 흐름은 한 전투에서도 몇 번이고 바뀌곤 하는데, 한 번에 몇 번씩 자주 바뀔 때도 있고 한 번 바뀐 흐름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군터가 느끼기로, 그 흐름은 바람과 같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 순풍을 만나 등에 업으면 더 강한 기세로 내달릴 수 있지만 역풍을 맞으면 눈을 뜨기조차 힘들어지고 자연히 달리는 속도도 죽는다.
전장의 흐름이 바로 그와 같다. 편승하면 이롭고, 거스르면 괴롭다. 허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바람은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전투의 흐름은 인위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방패수들은 정신 바짝 차려라! 너희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궁수들이 활을 쏠 수가 없다!”
“사다리가 올라오면 재깍 밀어버려라! 알겠나!”
“예, 예엣!”
오들오들 떨고 있는 민병들 중에는 이번에 막 징병되어 아예 전투 경험이 없는 이들도 있었고, 한두 번 정도 전투를 치른 나름 경험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
“와아아아!”
적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수십 개의 사다리가 턱 하니 걸쳐졌다. 병사들이 황급히 밀어내려 했으나 개중 방패로 몸을 가리지 못했던 몇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끄아악!”
“안 죽는다! 당장 일어나!”
그런 식으로 구멍이 생겼을 때 그를 메우는 것은 기존 병사들의 몫이었다. 방패로 머리와 상체를 가리고 사다리를 걷어차 밀어낸다. 그리고 쓰러진 민병에게 욕설과 발길질을 적절히 섞어 안겨주면 어지간히 심한 부상이 아닌 다음에야 일어서게 되어 있다.
“죽고 싶나! 어! 죽고 싶어?! 그럼 여기서 헛짓거리 하지 말고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려 이 새끼야!”
“으으!”
죽지 않으면 싸운다. 죽을 것 같지 않으면 싸운다.
이러한 모든 군졸들의 분투에 힘입어 전황은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격전이었으나 이대로 계속 버틴다면 며칠 동안 그랬듯 퇴각의 북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았다.
등줄기를 간질이던 불길함이 뒷목까지 타고 오르기 전까지, 군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
두려움은 아니다. 굉장히 역한, 꺼림직스런 느낌이 들었다. 근원지는 성벽 아래. 군터는 기를 쓰고 기어 올라오던 적병을 방패로 후려쳐 떨어뜨리고 성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저건?’
어느새 수북이 쌓인 시체더미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봐 주시는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미녀에 대해 다다익선을 외치는 건 수컷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