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21화 (121/1,064)

<-- 세 군데의 전투 -->

“고생했군. 둘 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덤덤한 말에 포라칸과 콰이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포라칸은 전날 자신만만하게 맡겨달라고 하고서 군을 이끌고 갔음에도 끝내 살마드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한 데 대한 자책감에 눈을 감았다.

“무슨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야. 난 오히려 자네를 칭찬하고 싶네. 자네가 괜한 미련 갖지 말고 적시에 물러선 덕에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어. 만약 고집스레 밀어붙였다면 괜히 피해만 커졌을 것이야.”

“…….”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번엔 그의 충실한 전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딱딱한 편이긴 하지만, 지금의 그는 평소보다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 단지 패퇴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미한 혈향이 그에게서 풍겨왔다.

“당했군.”

“가벼운 상처입니다.”

“어지간히 고생했던 모양이군. 너 또한 애썼다.”

“대족장께 실망을 끼쳐드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포라칸과 콰이렌은 일정부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둘 모두 순수한 무인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딱딱하고, 입 발린 소리를 할 줄 모른다. 그러기는커녕,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들이다. 보다 보면 참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곁에 두는 면도 조금은 있었다.

“결계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타르가이 베르겐은 앙상하게 변한 팔을 들어올렸다. 며칠을 굶은 노인의 그것처럼 앙상해진 팔은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그만큼 결계를 치기 위해 소모된 원기가 컸던 것이다. 당장 숨을 쉴 때도 버거운 느낌이 들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게다가 그를 보조하던 무자들도 다섯이 더 죽었다. 남은 이들도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헛된 희생은 아니었다. 큰 희생을 감수하고 친 결계로 인해 확실히 시간을 벌었다.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기다려라. 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때 단번에 저 도시를 친다.”

적은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원군이 당도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일 터.

이제 시간은 이쪽의 편이다.

*

이틀, 사흘, 그리고 오늘로 나흘 째. 반군의 공격은 여전히,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 번 공격을 할 때마다 수백 명씩 죽어나갔지만 반군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제국군은 수성의 이점 덕분에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으며 싸웠지만, 그래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나흘에 걸친 전투에서 이백이 죽고 백 오십이 전투불능이 되어 내성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민병이 채웠다.

“정신 안 차리나! 창을 찌를 때 눈을 감으면 적을 죽이겠다는 거냐, 네가 죽겠다는 거냐!”

얼굴에 너덧 개의 자상이 난 병사가 앳된 얼굴의 병사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열다섯이나 넘었을까 싶은 소년 병사는 숨통이 막혀 컥컥대며 발버둥쳤지만 억센 손길을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네 멍청함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다! 내가 죽고 나면 넌 무사할 것 같으냐! 앙?!”

누구도 얼굴이 새빨개진 소년을 동정하지 않았다. 소년을 구한 것은 다시금 성벽 아래서 들려오는 요란한 함성 소리였다.

소년의 멱살을 쥐고 있던 병사가 신경질적으로 소년을 내팽개쳤다. 그리곤 벗어던졌던 투구를 다시 눌러쓰고 급히 자리로 향했다. 쓰러져 콜록거리던 소년도 머뭇거리다 곧 그 뒤를 따랐다.

‘엉망이군.’

군터는 자리를 지키고 서 있으면서도 뒤쪽의 소란에 귀를 열고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정규병사와 민병간의 갈등 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비슷한 일이 수십 번은 일어났을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 한 번 받은 적 없는 민병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어쩌면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들려주는 것보다는 그냥 화살이라도 막으라고 방패나 한 개 들려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고기방패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전황이 너무나 좋지 않기에, 엉망일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싸움터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실로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저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군의 피해가 큰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반군의 피해도 컸다. 성벽 아래에 깔린 시신만 해도 천여 구는 가뿐히 넘어간다. 시체 썩은 냄새에 코가 마비된 지 오래일 정도다. 그런데도 놈들은 계속해서 병력을 들이붓고 있었다. 피해가 얼마가 나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적 지휘관의 머리통을 한 번 열어서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술적 식견이 모자란 군터조차 이리 생각할 정도이니, 카리비온 하야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적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꿍꿍이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성벽 아래에 쌓인 시체를 치우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기(死氣)를 이용한 어떠한 술수를 부리려는 것이 아닐지.”

말레이드에서 가장 이름이 높다는 술사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다. 사령관 카리비온 하야신의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술사의 말에 카리비온 하야신은 수염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생각에 빠진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확실히…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군. 그러고 보면 요 나흘간 적의 공세는 이상할 정도로 과격했다. 무모할 정도였지. 그 모든 것이 어떠한 술수를 위한 사전작업 같은 것이라면…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군인들에게도 사실 술법이라는 것은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아예 모를 정도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낯설지 않은 것은 또 아닌 정도랄까.

대개 술법과 같은 신비라는 것이 높으신 분들을 위한 것이었다. 군문에서 그나마 술법이 쓰이는 경우는 대부분 각인 같은 쪽이나, 이마저도 중앙군의 고위 장교들 급 정도 되지 않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값이 비싸고 각인을 할 수 있는 술사 자체가 드물었기에 지방군에서는 장군급이나 최소 천인장 이상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술법에 관련해서는 잘 알지 못하네. 그대의 의견을 묻고 싶군.”

“어…음.”

우물쭈물 대며 망설이는 꼴을 보니, 저 자가 정말 말레이드 최고의 술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카리비온 하야신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군터도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던 술사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기를 다루는 술법은 무수한 술법들 가운데서도 가장 은밀한 것 중 하나입니다. 죽음이란 것이 아무래도 생명으로서는 쉬이 다가가기 어려울 수밖에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세간의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사령술(死靈術)을 연구하던 술사의 일맥이 역병의 주모 세력으로 몰살을 당한 적도 있을 정도지요.”

누가 술사 아니랄까봐 서론이 길었다. 군터를 비롯해 제장들의 반응이 좋지 못했지만 역시 카리비온 하야신이 경청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손톱으로 살을 찍거나 하는 식으로 졸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때 죽음의 기운을 남깁니다. 일각에서는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며 생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찌꺼기 같은 것이 사기라고도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생명이 죽고 나서 얼마간 사기가 남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대개는 시체에 남게 되지요. 어떤 생물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경우를 기준으로 하면 보통 열흘 정도를 머문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죽고 나서 시일이 지날수록 그 기운이 옅어지기 마련이나, 한 곳에 많은 수의 사기가 발생할 경우 때때로 넝쿨처럼 서로 얽히며 크게 뭉치기도 하지요.”

그 즈음에서, 끝도 없이 늘어지려는 술사의 말에 카리비온 하야신의 인내도 조금은 한계가 드러난 듯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거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방의 성벽 아래에 깔린 시신의 수만 해도 최소 천이 넘어갔다. 모두 합치면 도시 바로 바깥에 깔린 시신이 오천, 육천 구도 넘어갔다. 그렇다면 그 시신들에서 나오는 사기는 얼마나 지독할 것인가.

‘좀 쌓이긴 했지만…그렇게까지 심하다고는 느끼지 못했는데.’

군터는 저 나이 지긋한 술사가 과장하여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전문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적들이 사용할 거라 예상하는 술법이 있는가?”

“우선은 저주를 걸 수 있겠지요. 음습한 사기를 이용한 저주는 통상의 저주보다 더 강력합니다.”

저주라니. 듣기만 해도 고약함이 물씬 풍기는 단어다.

“아니면 사령술도 가능합니다. 시독(屍毒)을 이용한 독술(毒術)도 가능하지요.”

“범위가 너무 넓군. 그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겠는가?”

“우선은…시신들을 다 태워야겠지요. 화기는 정화의 힘이 있습니다. 시신들을 불태우면 사기도, 시독도 상당부분 사라질 터이니 그것이야말로 혹시 있을지 모를 술법을 이용한 공격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비입니다.”

“시신을 태우라? 연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를 모두 태우기 위해 써야 할 기름을 생각하면…암담하군.”

군수품으로 보관해 둔 기름을 다 끌어다 써도 모자랄 것은 분명하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도시 내의 시민들에게서 징발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도시 밖의 시신을 다 태운다고 해도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싸움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시신은 그때마다 계속 쌓일 것인데, 그때는 어찌한다는 말인가?

“허나, 아직 확실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적들이 꼭 술법을 이용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할 필요는…….”

“적들이 일부러 성벽 가까이 시신을 쌓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 의심 가는 정황이 있다면 응당 의심을 해야 하네.”

카리비온 하야신은 휘하 무관의 반론을 일축했다. 보통 때의 그라면 터무니없는 의견일지라도 일단 다 듣기는 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역시 겉으로는 덤덤한 척을 해도 속으로는 그리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허나 너무 뻔히 보이는 정황이다. 설마하니 우리가 이런 생각을 못하리라 낙관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알아도 막지 못한다는 계산이었던가?’

적이 바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겠으나,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알아도 막지 못하리라 계산했다는 것인데, 이건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다.

‘결국, 이 끌려가는 흐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어느 쪽의 경우건 적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수성을 하는, 한 자리에서 버티는 입장이라지만 후방의 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싸움이 계속 된다면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야음을 틈탄 기습? 아니. 쫓기는 상황에서의 발악은 상대도 예측하고 있을 터.’

기습은 양날의 검이다. 야습을 시도하려면 확실한 정예로 꾸려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시도한 야습이 성공한다면야 큰 이득을 보겠지만 실패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정예를 잃고 민병들로만 도시를 사수할 수는 없다.

‘변수는 없는가?’

애당초 반군이 움직였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옥쇄를 각오했었다. 그러니 새삼 두려울 것은 없었다. 다만, 패배의 그늘이 점차 짙어져가니 역시 지휘관으로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한다. 성벽 아래에 쌓인 시신들을 모두 불태우겠다. 있는대로 기름을 가져오고, 모자란 부분은 징발하라.”

“옛!”

너무 앞서간 통찰은 암울함만을 부른다. 지금은 미래를 두드리기 보다는 현재에 집중할 때였다.

*

잔뜩 부운 기름 위로 불화살이 떨어지니 순식간에 불길이 일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리를 두고 말레이드를 포위한 반군 진영까지도 그 후끈함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발악을 하는군.”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번 말레이드 정벌군을 이끄는 사령관 베이론 메라디스는 거칠한 목소리에 절로 찌푸려지는 표정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준비는 확실히 되었소?”

“예.”

두터운 로브로 머리를 포함한 전신을 감췄지만, 그럼에도 굽은 등을 가릴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허리춤에는 올까 싶을 정도로 구부정하고 작은 노인.

참으로 볼품없는 자였지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 노인은 티레토를 함락시킨 하가록 교단의 수장이었으니까. 그가 모시는 왕조차도 표면적으로는 이 노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그 수하인 그가 어찌 노인을 함부로 대하겠는가.

“이미 전장에 사기가 그득하니, 신물의 힘이 충분히 차올랐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시행할 수 있습니다.”

“좋소. 그럼 결행일은 내일 밤으로 합시다.”

“내일 밤? 어째서입니까?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저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데…….”

“연이은 전투에 부하들이 많이 지쳤소. 그대의 말처럼 저 도시야 오늘도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면 피해가 너무 커지오.”

“클클. 그런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신의 은총만 있다면 병사는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거늘.”

“아무렇게나 쓰고 버리는 것들과 왕국의 병사들을 같게 보는 것인가?”

그의 말이 싸늘해지자 노인이 웃음을 그쳤다. 그리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워낙에 작고 굽은 몸뚱이라 고개를 숙인다고 해도 그리 표가 나지는 않았다.

“이런, 이런. 들뜬 마음에 말이 지나쳤군요. 사과하겠습니다. 결코 왕국의 충성스런 군졸들을 욕보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알겠소. 사과를 받아들이지. 허나 주의해주시오. 내가 이끄는 왕국의 병사들은 결코 쓰다 버리는 말이 아니외다.”

쏘아붙이듯 말을 마친 베이론 메라디스는 막사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끄무레한 연기를 피워내는 커다란 모닥불 주변으로 수십, 수백의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넋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전날 업로드를 하면서 실수를 했었네요. 분명히 자정 꺾이고 나서 바로 올린다 했는데 11시 59분에 업로드가...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또 한 번 얻네요. 살면서 백 번은 넘게 얻은 교훈인 것 같은데, 매번 리셋이니 제가 생각해도 저는 참 멍청이구나 싶습니다.

항상 재미있게 봐 주시는 독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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