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20화 (120/1,064)

<-- 세 군데의 전투 -->

“드십시오.”

“고맙다.”

살라스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감자를 건넸다. 군터는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에 가득 차게 먹은 것도 아닌데 한 번 씹으니 감자의 4분지 3이 사라졌다. 살라스가 하나를 더 내밀었지만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도 똑같이 감자 하나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대장이랍시고 특혜를 누릴 생각은 없었다. 비록 그의 몸뚱이가 어지간한 장정보다 훨씬 더 크더라도 말이다.

배급이 돌아가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던 살라스가 그의 옆에 조금 떨어져 엉덩이를 붙였다.

“어떻게든 막아냈군요.”

“아아.”

첫날의 공성전이 끝났다. 사상자가 백 명에 이르렀다. 피해가 크지만 적은 그 서너 배는 더 죽고 다쳤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기쁨이나, 하루를 버틴 데 대한 안도는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그저 힘겨울 뿐.

‘힘들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군터도 제법 지친 상태였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많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도 녹록치 않았고, 성벽 안쪽에서 밀려드는 적들을 막아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또 쉽지 않았다. 차라리 적들과 야전을 벌였다면 더 나았으리라. 수성하는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지구전뿐이었는데, 군터는 이것이 영 익숙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전사자들의 시신을 나르고 온 할렌이 간략히 보고했다. 그의 손에는 역시 자그마한 감자 한 덩이가 들려 있었다.

“그나저나 저놈들은 시신을 수습할 생각도 않나 보군요. 그러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제국군의 시신은 수습하여 묻고 있었다. 하지만 반군은 한 번 물러간 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성벽 아래로 병사들을 보내 시신을 치울라치면 곧장 들이치겠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건 뭐 시체를 발판으로 삼아 성벽을 오르겠다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내버려둬라. 썩은 내야 좀 나겠다만, 어차피 시체를 밟는 건 놈들이다.”

실은 벌써부터 악취가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성벽 아래서 올라오는 시체 썩은 내가 아니더라도 피비린내며 쇠 냄새며 하는 것들이 뒤범벅이라 거기에 하나 더해진다 한들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코가 괴롭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작구만.’

남은 감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모두 이런 것을 먹고 버틴다. 자그마한 불평도 내지 않고, 내색조차 할 수 없는 이유다.

“천천히들 먹어라.”

군터는 성벽 위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위무했다. 자그마한 감자 하나를 무슨 귀한 보물처럼 쥔 병사들의 모습은 초라하기보다 처량했다. 더 답답한 것은 오늘이 전투 첫날이라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밥이라도 든든히 먹이면 좋을 것을.’

현재 말레이드는 도시의 크기에 비해 인구가 너무 과포화 되어 있었다.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다 몰린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전선 이북에서 도망쳐 온 난민들의 수가 상당했다. 그게 다 입이었으니 그 입들을 어떻게든 처리할 것이 아니라면 군량의 배급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군터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위무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감자를 다 먹고 일어설 때만 해도 아직 노을이 보였건만 어느새 캄캄한 하늘에는 별들이 그득했다. 그는 부하들을 쉬게 하고 동이 틀 때까지 성벽 한 쪽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

케인지모렌의 전투는 치열하게 흘러갔다. 도적들은 압도적인 수를 앞세워 사방팔방에서 성을 공략해왔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조잡한 사다리뿐이었지만 병력이 부족한 케인지모렌으로서는 그마저도 큰 위협이었다.

“방패를 들어라!”

성급하게 사다리를 걷어내려던 병사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막시밀리언은 직접 방패를 들고 뛰어가 사다리를 걷어찼다. 그 사이 기어 올라오던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적이 남쪽에서 밀려오고 있습니다!”

“코르넬! 이쪽은 자네에게 맡기겠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막시밀리언이 휘하 백인장 몇을 이끌고 황급히 남쪽 성벽으로 향했다. 보고받은 대로 그곳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성벽 위로 올라온 도적들도 제법 되었고, 더 많은 수가 사다리를 타고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싸워라!”

막시밀리언의 화려한 갑옷은 아군의 눈에도 띄었지만 적의 눈에도 띄는 것이었다. 그가 대장이라는 것을 알자 도적들이 그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이는 막시밀리언이 노리던 바라, 그는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어차피 뒤는 없다. 물리치면 살 것이고, 밀리면 죽을 것이다.’

본래 이렇게 일선에서 칼부림을 하는 것은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이 필요했다.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직접 선봉에 서면 휘하의 병사들은 용기를 얻는다. 가장 극한까지 다다른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도 높으신 분께서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지치고 두려웠던 마음에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은 그 힘이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것이 바로 막시밀리언이 직접, 누구보다 앞서서 적과 싸우는 이유였다.

“내가 이 성의 대장, 막시밀리언이다! 이 무도한 도적놈들아! 내 목을 가져가 보아라! 그러면 너희의 승리니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철저한 규율이라면, 이 도적들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막시밀리언은 욕망이라고 보았다. 훈련된 군대라고 욕망이 없겠냐마는, 도적들은 그런 욕망을 통제할 규율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 그러므로 바로 보이는 보상에 눈이 멀게 마련이다. 재물, 여자, 혹은 적 대장의 목.

“저놈의 목은 내 것이다!”

스스로 대장임을 밝히고 주의를 끄니, 도적들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즉시 달려들었다. 그렇게 등을 보인 놈들은 대열에 구멍을 냈고,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뜩이나 성벽 위라 물러설 곳도 없는 상황에서 병사들이 밀어붙이자 도적들은 곧 지리멸렬했다.

“쓸어버려라!”

갑옷으로도 막지 못한 자상을 열 개에 가깝게 입고서도, 막시밀리언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쉰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전투가 끝난 후. 막시밀리언을 대신해 북쪽 성벽을 사수했던 코르넬이 녹초가 되어 널브러진 막시밀리언에게 다가왔다.

“군졸들의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상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대로는…….”

“민병들을 징집해라.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내라면 애, 노인 할 것 없이 전부.”

“괜찮겠습니까? 너무 이른 것이 아닌지.”

태어나 한 번도 무기를 잡아보거나, 그 무기로 사람을 찔러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무장을 시킨다한들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머릿수만 채울 뿐이다. 아마 전투 한 번에 징집한 인원의 삼분지 일이 쓸려나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민병의 동원은 통상적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곤 했다.

“피해가 크겠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녀석들은 곧 익숙해질 거다. 몇 해의 훈련보다 한 번의 실전이 더 효용이 있을 수도 있다네. 특히나 목숨이 걸렸다면 말이지.”

죽음 앞에서 보통의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다.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아 죽거나, 혹은 이를 악물고 발악하거나.

설령 천 명의 민병 중 구백이 전자의 경우라도, 후자가 십분의 일이라도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물론 케인지모렌의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겠지만…도적놈들에게 패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도적들이 성을 함락시키면 그들에게 닥칠 미래는 두 가지뿐이다.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그리고 다음 전투에서는 되도록 민병들을 앞세우도록.”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며칠 동안의 전투로 병사들이 많이 지쳤네. 칼에만 맞지 않았다 뿐이지 상태가 좋지 않아. 어차피 오늘 크게 밀어붙였으니 놈들도 숨을 고르려 할 터. 다음 공격은 그리 거세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쉬게 하려 해도 그럴 틈이 없을 것이야.”

병사들을 쉬게 함에 더불어 민병들에게 적은 피해로 전투 경험도 쌓게 해줄 수 있으니 화살 하나에 두 마리 새를 잡는 셈이다. 그리고 만약, 적들이 또 한 번 거세게 나온다면, 민병들을 방패삼아 병력의 온존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뭐가 되었든 나쁠 것은 없다.

“알겠습니다.”

코르넬은 한 번의 반문 이후 더 이상의 토를 달지 않았다. 십 년이 넘도록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잠시 들어가 쉬다 오겠네. 일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도록.”

“예.”

막시밀리언은 성주가 그를 위해 내어준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딸린 하인들이 그의 피 묻은 갑옷을 벗겨주었다. 그러자 역시 또 피로 얼룩진 옷이 드러났다. 하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한 명이 의사를 부를지 물었으나 막시밀리언은 됐다고 했다. 그는 솜씨 좋은 의사를 알고 있었고, 그녀는 이미 이 저택 안에 있었다.

“무리하셨습니다.”

막시밀리언은 침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일라가 물에 적신 천으로 군데군데 붉게 물든 그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상처에다 약을 발랐다. 그녀가 직접 제조한 약으로, 베이고 찔린 상처에 상당한 효험이 있음을 일찍이 확인한 바 있었다. 오테론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던 그의 부하들이 그녀의 이 약 덕분에 여럿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런 건 무리라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뭐라 해야 합니까?”“발악.”

“…….”

“편히 죽느냐, 힘들게 사느냐의 사이에서 살기를 택한 거지. 그 대가를 치렀을 뿐이고.”

요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매순간이 한계였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매순간마다 있는 힘껏, 그 스스로 한 말처럼 발악을 했다. 그랬기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위태로워 보이십니다.”

“상황이 어려우니까. 하지만 난 죽지 않아. 저따위 도적놈들에게 내줄 목이라면 이제껏 살려고 아등바등 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두려워하고 계시는군요. 장군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막시밀리언이 조소했다.

“네가 그런 것을 물으니 우습군.”

“…….”

“죽음? 물론 두렵지. 죽음이란 결국 모든 것의 끝이니까. 난 끝나는 게 두렵다.”

“어떤 끝 말씀이십니까?”

“꿈. 더 이상 꿈꾸지 못한다는 것이…그것이 두렵다.”

“꿈?”

“야망이라고도 하지. 무슨 뜻인지 아나?”

“자세히는 모릅니다. 제국어는 어렵군요.”

“출세하고 싶다는 거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지.”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있느냐고?”

막시밀리언의 입가에 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소가 아니었다.

“의미가 있는 정도가 아니지. 그것이 전부다. 인간의 삶에 더 무엇이 있겠나? 계속해서, 끝도 없이 높아지고픈 것은 인간의 본성이야. 난 그 본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죽음을 가져와도 말입니까?”

“야망이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숨만 쉰다고 사는 게 아니야. 무언가 사는 의미가 필요하다.”

“그것이 야망이라는 것입니까?”

“더 없이 중요하고, 달콤한 의미지.”

막시밀리언의 웃음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았다.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낸 감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라일라가 약 바르기를 마쳤다. 그러자 대뜸 거친 손이 그녀의 가슴 사이를 파고들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글쎄. 나는 좀 무리하고 싶은데.”

등불이 환히 밝혀진 침실에 열락이 몰아쳤다.

========== 작품 후기 ==========

작품설정에 전장을 대략적으로 표기하여 올렸습니다. 그냥 가볍게 '아. 대충 여기가 여기에 있구나.' 정도로만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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