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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19화 (119/1,064)

<-- 세 군데의 전투 -->

콰앙!

돌덩이에 깔린 병사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편육이 되어 뭉개졌다. 그 옆에 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병사는 주저앉아 가랑이 사이에서 노란 물을 흘렸다.

누구도 그를 겁쟁이나 오줌싸개라 놀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은 지금 성벽 위에 있는 누구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남 신경을 쓸 여유가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쾅!

“정말 빌어먹을이군.”

군터는 똑바로 선 채 인상을 찡그렸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몸을 숙이거나, 엄폐할 만한 곳에 숨어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적이 눈앞에 있기라도 하면 활이라도 쏘라 윽박을 지르겠건만, 적은 처음 포진한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투석기를 운용하여 돌덩이만 신나게 쏴댔다.

이쪽에서도 고지에 위치한 내성에서 투석으로 대응하고 있었지만 적이 쏟아 붓는 것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적이 사방을 포위한 탓에 공격이 분산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말레이드에는 투석기가 별로 없었다. 애초 초원민족을 상대로 지어진 군사도시에 투석기가 필요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나마 지금 열심히 가동 중인 투석기도 반군이 발호하며 급히 제작한 것이었다.

쾅!

투석에 대한 반격도 내성에서 하는 것이었다. 군터가 있는 성벽 위에서는, 뭘 하려고 해도 할 게 없었다. 그저 성벽 위에 서서 날아오는 돌덩이를 보며 혼비백산하는 것이, 그러면서도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돌덩이가 날 빗겨가기만을 신께 기원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같잖은 수작을.’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저런 돌덩이를 수백 개쯤 쏘아댄다고 해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성벽을 무너뜨리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큰 것을 쏴야 할 텐데, 그런 것을 쏘려면 적이 가진 투석기보다 훨씬 더 커다란 것을 써야할 것이다.

결국,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아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적의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거다.

“으으으……!”

귀를 막고 벌벌 떠는 병사가 보였다. 아마도 멜루니악이나 시오도크군이겠지만, 그를 욕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조금 전에 그의 옆에 멀쩡히 살아있던 동료 병사가 돌덩이에 깔려 몸이 찌그러져 죽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역한 광경이었고, 그것을 바로 옆에서 본 저 병사가 벌벌 떠는 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투석용 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조급해 보이느냐?”

“예. 다소…그래 보이십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군터는 살라스를 신뢰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자신보다도 더 신뢰했다. 군터는 자신이 다혈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성미는 직접 적과 부딪쳐 싸울 때는 큰 힘이 되지만, 지휘관으로서 병졸들을 이끌 때는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냉정하게.’

카리비온 하야신은 여유를 말했다. 그는 어느 때에도 여유롭고자 노력한다 했다. 군터 역시 지휘관으로서 그를 닮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정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또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적이 들이닥쳤다면 군사들을 적절하게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무작정 맞서 싸우라고 고함이나 열심히 질렀겠지.

“…….”

군터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적을 다시 보았다. 또 다시 돌덩이 두 개가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 개는 아주 정확하게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장님!”

“흥!”

살라스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군터는 콧방귀를 끼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돌덩이가 쾅! 소리를 내며 정확히 그가 발을 뗀 자리로 떨어졌다.

“염려마라. 이따위 눈 먼 돌덩이에 깔려 죽지는 않는다.”

병사들은 지금까지 두려워 떨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군터는 반쯤 쪼개진 돌덩이를 걷어 차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봐라! 별 것 아니다! 마냥 겁을 먹어 몸이 굳었을 뿐! 잘 보고 움직이면 이 따위 돌멩이,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 정신들 바짝 차려라! 그러면 아무도 죽을 일 없다!”

정말로 보고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군터가 직접, 너무도 여유롭게 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 중요했다.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아도 모자랄 판에 군터가 이토록 대담한 모습을 보이니 그의 용기가 삽시간에 병사들을 물들였다.

“직접 와서 싸울 엄두가 안 나니 저렇게 멀리서 돌멩이나 쏴대는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크게 함성을 질러라! 이따위 수작질로는 우리의 기가 꺾이지 않음을 알려주어라!”

“와아아아아아!”

긴 연설은 필요 없었다. 그저 굵은 한 마디면 충분했다. 기가 꺾여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억눌려 있던 기세를 활짝 피웠다.

살라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적이 억울해 하겠군요.”

“잔수작은 잔수작일 뿐이다. 성벽을 넘고 싶다면 멀찍이 떨어져서 돌멩이만 던져댈 것이 아니라, 직접 와 성문을 부숴야 할 거다.”

물론 운 좋게 돌덩이가 몇 번 성문 쪽으로 떨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반군에게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투석 공격도 얼마 지나자 시들시들해졌다.

‘드디어 오는가.’

적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전고의 웅장한 소리가 성벽 위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우리가 너희를 치러 가고 있다는 듯이 위압적으로 북을 두들긴다. 유치한 장난질이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자그마한 욕설 한 마디에도 뛰기 마련이라, 커다란 북소리가 이리 크게 울려대면 어느 정도씩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돌 던지기는 끝난 모양이다! 궁수 대기!”

“궁수 대기!”

전고 소리에 맞추어 드디어 적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맣게 밀려오는 병사들 틈에 큼직한 사다리들이 눈에 띄었다. 군터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을 보며 활을 들었다. 아군 궁수들에게는 이르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거리였다.

슈슝!신중하게 겨눈 화살이 맨 앞에서 걷던 병사의 미간에 틀어박혀, 밑동이 잘린 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쓰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동요하며 방패를 들었다. 아직 거리가 여유로워 안심하던 적들이 바짝 긴장했다. 덕분에 물밀듯 밀려오던 적의 진군 속도가 현저히 늦춰졌다.

‘방패 뒤라면 안전할 줄 알았더냐.’

두터운 철로 된 방패도 아니고 조잡하게 나무 판때기로 된 방패 따위, 우습지도 않다.

군터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활이 뚜둑! 하는 비명 소리를 질렀다.

슈웅!

신중하게 조준하여 날린 화살이 방패를 꿰뚫고 그 뒤의 머리통에 꽂혔다. 종전과 같이 썩은 나무가 된 적병이 뒤로 밀려나며 쓰러졌다. 주변의 적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쳇!”

하지만 그 대가로 손에 든 활이 헐렁해져버렸다. 고급이라고 할 수 없는 보급품 활이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남는 활을 가져오너라.”

군터는 언젠가 좋은 활 한 자루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반쯤 부러진 활을 내던졌다. 그리고 곧 병사가 가져온 활을 들고서 다시 열 발 정도를 쐈다. 여덟 명의 적병이 또 다시 쓰러졌다. 그 즈음 되었을 때는 적들이 완전히 아군 궁수들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었기에 굳이 공들여 활을 쏠 필요가 없었다.

“쏴라!”

성벽 위에 포진한 병력은 천 명에 조금 못 미쳤다. 그 중 궁수가 이백 오십 가량. 그들이 쏘아내는 화살들이 쉬지 않고 떨어져 내렸으나 소모되는 화살에 비해 쓰러지는 적의 수는 미미했다. 어쩌면 워낙에 수가 많아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름은?”

“준비 됐습니다. 언제든 명만 내리시면 됩니다.”

적들은 이제 지척까지 당도했다. 군터는 세로로 들리는 사다리를 보며 명령을 내렸다.

“올려 보내라.”

“옛!”

끓는 기름을 담은 용기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나르는 것은 말레이드의 시민들이었다. 당장 그들은 일선에 서지 않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언제든 투입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이런 보조 역할이었다.

‘민병이 투입될 정도라면 이미 최악이다.’

성벽 위의 공간은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훈련도 되지 않은 민간인을 무기만 달랑 쥐어 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투입될 정도가 된다면, 그건 이미 최악의 상황이라는 반증이다.

“공성추다!”

“사다리를 걷어내!”

사다리를 걷어내기 위해 달려간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제대로 된 철 방패를 든 병사들이 공성추 주변을 둘러쌌다. 그 보호아래 적병들이 꾸준히 공성추를 옮겼다. 잘 훈련된 정병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모두 잡졸은 아니라는 거군.’

자세히 보면 공성추 주변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묘한 느낌을 주는 병력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머리가 뜨거웠을 때는 몰랐는데, 냉정하게 다시 보니 그 차이가 미세하게나마 눈에 잡혔다.

“응?”

그때, 섬뜩한 감각이 뒷머리를 훑었다. 군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화살 한 대가 옆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떨어졌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

부릅 뜬 눈이 성벽 아래,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을 향했다.

두터운 방패병 여럿을 앞에 두고, 활을 붙들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군터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화살이 빗나간 것이 못마땅한지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하핫!”

그는 찌푸렸으나, 군터는 웃었다. 방금 전은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목숨이 날아갔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여유를 찾다가 방심을 해버린 건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전장이건만, 마음을 놓고 있던 대가를 단단히 치를 뻔했다. 그대로 화살을 맞았다면 정말 우습고도 허망한 최후가 되었겠지.

군터는 투구 끈을 조이고 내려놓았던 방패를 들었다. 등에 멘 칸젤이 왜 나를 쓰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가 긴 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사다리를 밀어내라!”

지휘관은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지휘관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병사들을 싸우도록 지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군터는 그 말에 일부 동의했다. 그렇기에 그는 직접 싸우면서 지휘했다. 이럴 때 그의 큰 목청은 상당한 이점이었다.

“컥!”

멱을 베인 적병이 뒤로 넘어갔다. 떨어져 내리면서 뒤따라 오르던 적들을 치고 간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사다리를 오르던 적병들이 멈춰섰으니까 말이다.

“크으음!”

힘껏 사다리를 밀어냈다.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십여 명의 적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장님! 위험합니다!”

“안전한 뒤편에서 목소리로만 싸우는 지휘관을 병사들이 어찌 믿고 따르겠느냐!”

사다리를 밀 때 화살 두 대가 어깨와 팔을 때렸다. 갑옷이 두터워서인지, 화살에 실린 힘이 약해서인지 갑옷을 뚫지 못하고 박히는 데 그쳤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카앙!

황급히 들어 올린 방패에 불똥이 튀었다. 금방 맞은 두 대의 화살과는 격이 다른 충격이 팔을 찌르르 울렸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방패병들에게 호위를 받던 그놈이겠지. 군터는 사납게 이를 갈았다.

짜증이 나도 지금은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뇌었다.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움츠러들지 마라!”

“기름을 부어!”

사다리를 타고 오르던 적의 머리 위로 끓는 기름이 쏟아졌다. 방패로 미처 막지 못한 기름이 손을 적시자 방패를 놓았고, 그러자 곧장 얼굴로 기름이 튀었다.

“끄아아악!”

한 명이 떨어지고 그 아래, 또 그 아래가 줄지어 추락했다. 살갗이 익어버리는 고통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쏴라! 공성추 쪽을 집중사격해라!”

수십 대의 화살이 공성추 쪽을 향했다. 하지만 방패병들이 밀집하여 주변을 메우고 있었기에 화살공격은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계속 쏴라!”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격을 지시하는 까닭은, 효과가 미미하다 해도 쏘아대는 화살 만큼 공성추가 움직이는 빈도수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성벽 위에 걸리는 수십 개의 사다리를 밀어내는 것만큼이나 성문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물러서지 마라! 싸워라!”

성벽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올라오려는 자와 떨어뜨리려는 자. 밀어내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이 고함과 비명으로 뒤섞여 이어졌다.

“아아악!”

사다리를 밀어내려다 눈에 화살이 박혀 쓰러지는 병사. 무턱대고 내리친 칼이 투구에 맞고 부러져 칼날조각이 목을 파고든 병사.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곳이 그 지옥이리라.

“싸워라! 밀어 붙여라!”

지휘관들의 독려가 병사들을 등 떠밀었다.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병사들은 이미 살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큰 강물에 한 잔 물을 흘려보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봐 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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