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군데의 전투 -->
“이럴 수가…….”
성주와 총독이 나란히 서서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은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번 서로의 허점을 노리면서 으르렁거렸으니까 말이다. 감정의 공감대 같은 것이 형성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너진 성벽을 보며 그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란 망연자실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무너졌다고는 해도 큰 것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보수작업에 들어간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어 보였지만…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파손된 곳은 열여섯 군데입니다. 그 중에 크게 무너져 문제가 될 만한 곳은 아홉 곳으로…….”
윌리스 리에론이 성주에게 보고를 했지만 성주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듣는 듯, 넋 나간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윌리스 리에론의 보고가 끝나고, 성주는 적의 움직임에 주의하며 성벽의 보수작업을 진행하도록 하라 명을 내리곤 힘겹게 내성으로 돌아갔다. 총독 역시 어두운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리스 리에론의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허탈함, 두려움, 분노, 그 외의 복합적인 감정들과 지독한 불신까지. 할 수만 있다면 현실부정이라도 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그런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일부나마 윌리스 리에론과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도시가 자리한 지대에만 일어난 지진. 결코 우연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야만인 놈들에게 이런 술법을 쓸 만한 힘이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군요.”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더 일찍 이런 술법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무언가 제약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짐작입니까, 바람입니까?”
“글쎄요. 둘 다라고 해둡시다.”
절망이라 이름 붙여도 과하지 않을 곤혹스러운 상황을 앞에 둔 것은 모두가 같았다. 허나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애써 모른 체하거나 피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는다.
“놈들이 곧 무너진 성벽 쪽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상시대기 하는 병사들을 늘리고, 급한 대로 목책을 설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해야지요.”
사람의 진면목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끄트머리에서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윌리스 리에론은 아란딜 페레모어라는 사내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 자는 지금보다 더한 좌절과 절망이 손짓해도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설 사내라는 것을.
“원신의 가호가 있기를.”
“음?”
윌리스 리에론이 가벼이 성호를 그으며 축언했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의아하게 보자 윌리스 리에론은 가벼이 웃었다.
“이제는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도 원신의 가호와 함께 하시기를.”
서로 비슷한 웃음을 지은 두 사람이 주먹을 맞대고 돌아섰다.
*
“쿨럭!”
흥건한 핏물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포라칸이 급히 다가오려 하자 타르가이 베르겐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별 것 아니니 호들갑 떨 것 없네.”
“기력이 쇠하신 것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역시 한동안은 요양을…….”
큰 힘을 발휘할 때는 그 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는 카락시아를 이용해 땅을 흔들어 성벽을 무너뜨렸지만, 그 반동으로 몸 내부가 완전히 진탕되다시피 했다. 육신뿐 아니라 영혼마저 상처를 입었다. 원기(元氣)가 상한 것이다. 각혈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 중 하나에 불과했다.
“조금은…우습게 봤던 것인지도 모르겠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신을 품은 이후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 같은 것이 옅어졌었기 때문이다. 패멸한 신의 힘이라 얕잡아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자들의 상태는 어떤가.”
“셋이 죽고, 열둘이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
카락시아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쏟은 체력과 심력은 고작 이틀의 휴식으로 회복되기에는 너무 짧았다. 또한 의식으로 인한 여파가 컸던 탓도 있었다. 물론 타르가이 베르겐이 받은 정도에 비하면 자잘한 수준에 불과하다지만, 그들 역시 어느 정도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만 해도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오늘 밤에 출진하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괜찮겠는가?”
타르가이 베르겐은 지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무기력감은 정말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말에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거동조차 힘겨웠다. 직접 나가 싸우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몸이 호전될 때까지 기다리자니 적에게 시간을 주는 꼴. 결국 전투는 포라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함락시켜 보이겠습니다.”
포라칸의 눈이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야음을 틈타 초원의 군세가 포위망을 좁혀갔다.
어둠속에서 움직이지만 소리를 죽이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저 함성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하지만 이는 포라칸의 지시였다. 그는 한밤의 싸움이 결코 야습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때문에 이것은 야습이 아닌 야전이었다.
피차 서로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결국 이 싸움은 시간싸움이라는 것을 양쪽 모두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건가.’
고요하다. 덫으로 들어서는 사냥감을 기다리는 사냥꾼마냥,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적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면서도 들어가려 하고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이쪽에 전력의 우위라는 이점이 있다면 저쪽은 시간의 우위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점을 가지고 싸운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런 전투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군.’
타르가이 베르겐은 카락시아를 통해 검은 들소의 힘을 부렸다. 살마드가 위치한 지반을 뒤흔들었고, 성벽의 붕괴와 적의 동요를 노렸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일정부분 성공을 거뒀다. 살마드의 3중 성벽 중 일부가 붕괴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부’였다. 군대가 들이칠 수 있을 만큼 크게 무너진 곳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마저도 많은 수가 한꺼번에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크기였다. 그런 곳으로 병력을 들이밀다가는 좁은 곳에 뭉쳐 있다가 일거에 격퇴되기 쉬웠다.
답은 하나다. 소수 정예가 먼저 들어가 길을 여는 식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적들도 그를 의식하고 있을 터. 결국, 전장과 전투의 양상이 모두 정해진 셈이다.
살마드의 3중 성벽 중 가장 바깥쪽 성벽에 난 통로는 두 군데. 하나에는 포라칸이 직접, 또 다른 한 군데에는 콰이렌이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두 곳 중 한 군데에는 그가, 아란딜 페레모어가 있을 것이다. 기다란 칼을 휘두르던 그를 떠올리자 창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를 추격하며 벌였던 피 끓는 일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포라칸은 그가 향하는 곳에 아란딜 페레모어가 있기를 바랐다.
“대전사시여. 놈들이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보았다.”
초원의 자식들은 모두 눈이 밝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멀리, 자세히 볼 수 있다. 하물며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밤에 사냥을 다니는 짐승만큼이나 어둠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
포라칸의 눈은 살마드의 성벽 위에서 다급히 움직이는 몇몇 병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군을 여유롭게 움직였다. 마치 적이 대응할 수 있도록 사정을 봐 주는 듯했다. 부관으로 붙은 전사도 그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적에게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어째서……?”
“두려움이 번질 시간이 필요하니까. 바르바피들을 불러라.”
포라칸의 지시에 바르바피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 수가 오백에 조금 못 미쳤다. 나머지는 콰이렌을 따라가 있었으므로 이들이 포라칸의 군대에 있는 전부였다.
“부르셨습니까. 대전사시여.”
도열한 바르바피들을 쓱 훑어본 포라칸이 이를 드러냈다.
“있는 힘껏, 시원하게 울부짖어라. 도시 안에서 우릴 기다리는 놈들이 오줌을 지리도록.”
따로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바르바피들은 즉각 포라칸의 의중을 이해하고 샛노란 안광을 드러냈다. 짐승의 그것처럼 발톱과 이빨이 드러나고, 가지런했던 숨결이 사납게 헝클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크허엉!”
고요하던 밤하늘에 살의에 가득 찬 맹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침묵을 지키던 살마드의 성벽 안쪽에서 숨길 수 없는 소란이 일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호응하듯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개중 유난히 크고 길게 떨쳐 울리는 포효가 있었다.
“전사장입니다.”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양의 울음과 들개의 울음소리가 다르듯, 들개의 울음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도 또한 다르다. 또한, 늑대의 울음소리와 사자의 울음소리 역시 명확히 다르다.
오오오오오오-!
짙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포라칸의 입에서 모든 시끄러운 소리들을 잠재우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포효가 아니었다. 고막을 넘어 몸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거대한 울림이었다.
“간다.”
길게 이어가던 울림을 어느 순간 끊어버린 포라칸이 말의 배를 찼다. 그것이 신호였다. 수천 기의 기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린 성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
“쏴라!”
화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쏜다기보다는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성벽 위에서 바로 아래를 노리는 만큼 빗나갈 염려도 없었으니 조준도 필요 없이 그저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 화살 공격이 그리 큰 효험을 보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괴인들의 피부는 갑옷보다 두껍고 단단하므로, 병사들이 쏘는 화살은 꿰뚫기보다는 충격을 주는 역할로 끝이었다.
“진(陳)을 발동하라!”
적들이 목책을 박살내고 들이닥치자마자 땅이 빛을 뿜었다. 동시에 기세 좋게 돌진해오던 괴인들이 휘청거렸다.
바로 저 괴인들을 위해 짧은 시간 동안 살마드의 술사들을 총동원해 쇠약의 법술을 미리 진의 형태로 깔아 놓았다. 큰 범위를 덮지는 못하지만, 지금처럼 적이 좁은 통로로 뭉쳐서 들이닥친다면 이만한 술법도 없었다.
“장군! 오래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알겠다! 최대한 버텨라!”
한 순간에 쇠약해진 괴인들이 창에 꿰여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선에 선 병사들의 기이하다 할 만큼 긴 창 역시 괴인들을 위한 맞춤형 창이었다. 길이에 따른 무게 때문에 오랫동안 들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지금처럼 특정한 용도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괴물 놈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효과가 있습니다!”
부관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으나 아란딜 페레모어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술진(術陳)의 배치와 맞춤형 장창의 사용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효과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크허어엉!
푸른 안광을 빛내는, 다른 괴인들에 비해도 유난히 덩치가 큰 괴인이 거칠게 병사들의 전열을 헤집었다. 동시에 뒤편에서 진을 유지하던 술사들 몇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항상 이렇지. 전쟁이란 것은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아.”
아란딜 페레모어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카르골을 뽑아들었다.
========== 작품 후기 ==========
야심한 새벽입니다. 비축분으로 쌓아둘까 하다가 그냥 올립니다.
생각지 못할 때 받는 선물이 기분이 좋은 법인데, 제 글이 독자 분들께 조촐하게나마 그런 선물이 되었으면...하고 바라 봅니다.
그리고 그만쉴래님께서 말씀하신 간략한 지도는 제가 그림판으로 조잡하게나마 어떻게든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너무 저질스러워도 양해해주시길 미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