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드 -->
“대족장.”
일단의 무리가 타르가이 베르겐의 움막을 찾았다. 전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복장을 한, 길이 남는 가죽을 통째로 옷처럼 걸친 이들. 족히 수십은 되는 이들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을 앞세워 들어왔다.
흑곰의 모피에 비스듬히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 있던 타르가이 베르겐이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그의 시선이 선두의 노인과 그 뒤의 이들을 향했다.
“낮잠을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기대가 되는군.”
잠겨 있던 목소리가 기대를 담아 활력을 띠었다. 선두의 노인이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를 비롯해 그의 뒤에 선 모든 이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없어 보였다.
“끝났습니다.”
“드디어…….”
타르가이 베르겐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향유하던 나른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패자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다가오자, 노인은 조심스레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함을 열었다. 은은한 빛이 함의 열린 뚜껑 사이로 흘러나왔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로 함을 닫았다.
“그대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틀 동안 푹 쉬도록 해라.”
“예.”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타르가이 베르겐은 제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허리높이의 단이 자리했고, 그 위에는 카락시아가 담긴 함이 올라가 있었다.
“좋은 날이군.”
제단을 마련한 곳은 살마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눈을 아래로 두면 살마드가 보였고, 조금 위로 들면 푸른 하늘이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초원의 바람이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 같다면, 이 바람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시원하기보다는 간지러운 느낌. 평생을 초원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영 익숙지 않은 바람이다.
잠시 눈을 감고 훈풍을 음미하던 타르가이 베르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은은한 자주색 눈에 따스한 빛이 드리웠다.
“시작하라.”
그가 명령하자 그의 뒤와 양 옆에 빼곡하게 서 있던 무자(巫子)들이 일제히 저마다의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힘 있는 목소리는 그대로 주문이 되어 신기(神氣)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신기는 함속의 카락시아에게 가늘게 이어졌다.
우우우웅-!
함의 뚜껑이 터지듯 열렸다. 그리고 환한 빛을 토하는 카락시아가 조금씩 떠올랐다.
카락시아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환하게 빛나는 구체 위로 반투명한 문양 같은 것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허공에다 글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신언(神言)!”
조금 뒤쪽에 물러서서 지켜보던 포라칸이 탄성을 토했다. 그는 카락시아가 뿜어내는 막대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적의를 드러내지 않기에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거대하여 뒷걸음질 치고 싶게 만드는 힘.
‘저것이 검은 들소의 힘인가.’
전사들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전사들 중에서도 특히 용맹하여 정예라 불리는 이들인데도 그러했다. 처음 선 자리에서 지금까지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은 포라칸과 콰이렌 뿐이었다. 그 정도로 카락시아가 드러낸 힘은 무시무시했다.
“하늘과 땅이 호응하는군요.”
의식 시작 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콰이렌이었다. 하지만 과묵한 그조차도 지금의 이 장엄한 광경에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그저 환하게 빛나는 구체와 신비한 문양만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느낄 수 있는 자는 그런 시각적인 것을 넘어 더 엄청난 것을 느끼게 되리라.
평온하게 흐르던 하늘과 땅이 용틀임을 했다. 대기가 흔들리는 물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제단을 중심으로 이 주변의 세상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 검은 들소야말로 본래 이 땅의 축이었지. 그가 패멸한 뒤로도 그의 힘이 이곳을 받쳤다.”
제국의 군주에게 쓰러진 검은 들소가 이후로 존재함으로서 이 땅을 지탱했다면, 이제는 직접적으로 그 힘을 풀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자연히 하늘과 땅의 정령들이 춤을 추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허나 모자라다.’
옛 전쟁에서 패멸한 후, 검은 들소의 혼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그것을 다시 얼마 모아 뭉쳐놓았다 하지만 본래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한 미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들소는 아무리 뿔이며 몸집이 크고 튼튼하다 해도 다리 한 쪽이 부족하다면 힘껏 달리지 못한다. 달리기는커녕, 제대로 서기조차 힘겨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부족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의식을 치르고 있다. 편법으로나마 부족함을 채울 방도가 있기 때문이다.
‘시작되는군.’
카락시아를 둘러쌌던 광휘가 하늘높이 솟구치더니 그대로 타르가이 베르겐에게 떨어져 내렸다. 흡사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신비로운 광경이었고, 장엄한 기적이었다. 신을 수단으로서 보는 초원의 전사들조차 그 경이로움에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경외에 사로잡힌 가운데, 오직 광휘에 휩싸인 타르가이 베르겐만이 고통의 순간을 인내했다.
“으으으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막대한 무게가 그를 짓눌렀고, 생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압력이 온몸을 찌그러뜨릴 듯 죄어왔다.
지독한 고통이 엄습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전능한 것만 같은 힘으로도 그를 괴롭히는 고통을 걷어낼 수는 없었다. 고통과 힘은 하나였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힘을 부리는 대가.
우드득!쇳덩이보다도 더 강력하다 자부했던 뼈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뼈마디가 어긋나는 것 같았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핏줄기가 새어나왔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온전히 섰을 때, 그는 다시금 언덕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초라하구나.’
그토록 굳건해 보였던 살마드의 성벽이 보였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 약해 보였다. 손 한 번 휘두르면 저 초라한 인간의 건축물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만이 아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취할 수밖에 없는 힘이군.’
적어도 이 땅에서 지금의 그는 절대자였다. 그가 지닌 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을 휘두르는 그는 너무나 미약하여 힘의 대가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것을 명확히 인지했다.
저 성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의 몸도 같이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타르가이 베르겐이 손을 뻗었다. 빛에 감싸인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가 힘을 쓰매, 맴돌던 정령들이 크게 울부짖었다.
*
쿠구구구!
한낮의 온기를 쬐고 있던 살마드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거센 진동에 한 순간 혼란에 빠졌다.
“꺄악!”
“뭐, 뭐야!”
“지진인가?!”
군관들이 나서서 소란을 잠재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전조에 불과했던 가벼운 진동이 지나고 곧장 들이닥친 거센 흔들림은 모두의 이성을 빼앗아갔다.
쩌적!
부실하게 올린 건물들에 균열이 갔다. 땅이 갈라지며 속살을 보였다. 거리를 오가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주저앉았고, 건물 안에 들어가 있던 이들은 서로 껴안은 채 이 느닷없는 재앙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정말 몇 안 되는 이들은 전혀 다른 것을 걱정했다.
“크윽!”
아란딜 페레모어가 벽을 짚어가며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평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던 그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격정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창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에 무너져 내리는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 여럿이 올라가 있던 성벽이, 여러 군데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 아무리 튼튼히 지었다한들 어차피 땅 위에 지은 것. 기반이 되는 땅이 흔들리고 쪼개어진다면 그 위에 선 것이 어찌 버텨내겠는가.
하지만 원망스러운 것은, 왜 지금이냐는 것이다.
‘우연인가? 아니면…….’
무정한 신을 원망하기 전에 그는 이 상황의 원인부터 따졌다.
우연이라면 신을 원망하고 운명을 탓하면 될 것이나, 만약 이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면…….
“무너진다아아아!”
“큭!”
상념에 잠길 시간이 없었다. 바깥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소리에 아란딜 페레모어는 카르골을 움켜쥐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꼬박 닷새가 흘렀다. 카리비온 하야신이 말했던, 적이 당도할 때까지의 최대 시간에 걸쳐 반군은 모습을 드러냈다.
호르빈켈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수가 불어난 반군은 산 아래를 까맣게 가득 채웠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기에도 두려울 정도였다.“정말 질릴 만큼 많군요……. 대충 봐도 2만은 넘을 것 같습니다.”할렌이 말했다. 그의 입은 멍청하게 벌려져 있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포위당했습니다.”
살라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반군은 말레이드의 동서남북 어느 곳 하나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최소 2만이라 잡아도 각기 오천. 사방 중 한 방향에 위치한 적만 해도 말레이드에 있는 전체 병력보다 많았다.
닷새 동안 말레이드에 도착한 병력은 다 합쳐 이천이 되지 않았다. 단일 병력으로 가장 큰 규모의 원군은 군터가 이끌고 온 시오도크의 원군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시오도크와 멜루니악의 두 개 군이 합쳐졌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리 생각해봐도 말레이드에 온 원군의 수는 확실히 기대 이하였다. 그만큼 각 도시며 성의 사정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다들 자기 보신하기 바쁘다는 반증이리라.
“군터.”
“예. 사령관.”
카리비온 하야신이 군터를 찾았다. 요 며칠 사이 그들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향후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와중에 사담도 적지 않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군터는 자신이 그를 일전에 베브로스에서 본 적이 있었노라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카리비온 하야신은 껄껄 웃으며 재미있어 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 그는 지금처럼 군터를 제법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렀다.
“자네에게 서쪽을 맡기고 싶네.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서쪽은 제 목숨을 걸고 사수하겠습니다.”
“하하. 든든하군. 그럼 맡기겠네.”
“옛.”
그리하여 군터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서문으로 향했다. 휘하 병력 오백과 기존에 서쪽 성벽을 지키던 말레이드군 오백을 더한 천 명이 그의 지휘 하에 들어왔다.
‘천인장이 된 기분이군.’
닷새 동안 말레이드의 군관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몸을 푼 적이 있었기에 백인장 다섯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들은 카리비온 하야신의 지시가 있은 후 깍듯이 군터의 지시를 따랐다.
“투석기가 보입니다.”
살라스의 말에 군터가 안력을 돋웠다. 확실히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기계가 여러 개 보였다.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그 수가 더 많았다.
“그리고…저쪽에 있는 것은 공성추인 듯싶습니다.”
살라스는 마지막에 덧붙이려 했던 “쉽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도로 삼켰다.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여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한 마디 말이 없어도 군졸들의 사기는 새까맣게 보이는 적의 수에 이미 어느 정도 꺾인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겪어보지도 않은 공성병기가 있다고 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군터는 그런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하여 크게 목소리를 냈다.
“걱정들 마라! 이건 우리가 했던 모든 싸움 중 가장 쉬운 싸움이다!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놈들의 목을 차례차례 수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성벽은 수만의 병력보다 더 강하다! 봐라! 2만이건 3만이건, 여기서 보면 다 개미새끼들처럼 보이지 않더냐!”
말의 내용이 신빙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압도적인 수의 적을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군터의 목소리는 장병들에게 힘과 자신감을 주었다.
“개미가 기어 올라오면 터뜨려 죽이면 된다! 설마하니 여기에 개미새끼에게 겁을 먹는 어처구니없는 겁쟁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하하하핫!”
가벼운 농이 무겁던 분위기를 흐렸다. 비로소 군졸들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때맞추어 북쪽 성벽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군터가 고개를 돌리자 북쪽에서 온 것이 분명한 병사가 내용을 전했다.
“사령관께서 적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셨습니다! 모든 병력은 태세를 단단히 하라는 사령관님의 명이십니다!”
“기꺼이 그리하겠노라 전해드려라!”
병사를 돌려보내고, 군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적들을 눈에 담았다. 일부 병사들이 공성병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투석기였다.
“투석기다!”
“정신 바짝 차려!”
돌덩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끝까지 올라간다 싶었던 그것들은, 곧 포물선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다음 챕터부터 제가 처음 생각했던 1부의 피날레가 시작 됩니다. 생각했던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재미있게 봐 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