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드 -->
환영식은 성문까지 마중 나온 것으로 끝난 듯, 이후에는 조촐한 식사자리였다. 하지만 누구도 아쉬운 내색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과 가까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카리비온 하야신이었다. 귀족이면서 동시에 아란딜 페레모어의 오른팔이라고 이름이 자자한 사내. 만약 아란딜 페레모어를 따르지 않았다면 스스로 장군직을 지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명하고, 그 유명세만큼의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가 쌓은 전공 중 사람에게 회자되는 것만 해도 한 손으로 다 못 셀 정도로 많았다.
“시오도크의 상황은 어떠한가? 서신으로 듣기는 했네만…사교의 준동이 있을 뻔했다고?”
“그렇습니다.”
대장인만큼 카리비온 하야신과의 대화는 주로 군터가 맡아서 했다.
“티레토가 함락 당했다는 것은 예상 외였다네. 사교와 반군의 무리가 선이 닿아 있을 줄은 짐작했으나 장교들까지 그에 가담하고 있을 줄이야. 생각보다 훨씬 뿌리가 깊어. 당장 떨어진 것은 티레토지만 다른 곳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겠지.”
“시오도크의 성주께서 역적들을 색출한 이후 즉시 각 성과 도시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래. 다행스러운 일이야. 만약 시오도크까지 일을 당했다면 정말 힘들어질 뻔했어. 뭐, 사실 지금도 그리 쉬운 상황은 아니네만.”
“반군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만 오천 정도로 추정하고 있네. 진군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아 아직은 닷새 정도 여유가 있어. 문제는 놈들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다는 것이지. 각지의 도적들이 반군에 합류하고 있다네. 가벼이 볼 일이 아니야. 이대로라면 이곳에 당도할 무렵에는 최대 이만 정도까지는 불어나지 않을까 싶으이.”
“이만…….”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대군이다. 일찍이 초원의 대군은 3만이 넘었지만, 단순히 발만 붙들겠다는 심정으로 대할 때와 직접 맞싸워야 하는 입장에 섰을 때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도적들의 수가 그리 많습니까.”
“말도 못할 수준이지. 그동안 숨어서 도적질을 하던 놈들이 모조리 뛰쳐나온 셈이야. 관리를 피해 은둔해 있던 화전민들도 날붙이를 들고 산을 나서는 형편일세. 제국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자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면 되네.”
그래봐야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모이고 모여 천, 만 단위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우습게 여길 수 없다. 머릿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다.
“참으로 골치가 아파. 병력도 모자라 성문을 닫아걸고 지키는 게 고작일세. 그나마 자네들이 와 주어 다행이야.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당도할 원군만 바라볼 뿐이지.”
“그런 말씀을 하시지만 꽤 여유로워 보이십니다.”
“음? 그래 보이나?”
“예.”
카리비온 하야신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군터를 보다가 허연 수염을 쓸었다.
“다행이군. 사실 여유로워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네.”
“어째서입니까?”
“개인적으로 상수는 여유로움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거든. 설혹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수가 나올 확률은 확실히 적어지지.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면 어쩔 수 없이 서두르게 되는 법이네. 전장에서 그런 것은 굉장히 치명적이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들이키는 카리비온 하야신을 보고 있자면 전투를 앞두고 있다는 것마저 잊게 됐다. 저런 여유가 노력으로 나온 것임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무슨 좋은 수라도 떠오르셨습니까.”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백인장과 천인장이라는 직급의 차이. 또한 군터가 오백 원군의 대장이라면 카리비온 하야신은 말레이드를 책임지고 있는 임시 사령관이었다.
군터의 말에 다른 백인장들이 급히 끼어들려 했지만 카리비온 하야신은 탓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었다. 그에게는 군터의 당돌함이 무례보다는 고취된 전의의 표출로 보였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얌전하고 의욕도 없어 보이는 나머지 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백인장으로서는 드물게 패기가 넘치는 군터에게 흥미가 있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도 악수를 내는 것을 억누르고 있지.”
“악수라면?”
“뭔가를 하려 하는 것.”
“예?”
“전세가 좋지 않고, 닷새 뒤에는 대병력을 맞아 싸워야 하니 마음이 다급해지지. 그러니 뭐라도 해보려고 수를 도모하게 돼. 하지만 사실 그런 수라는 것은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크지.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더 깎아먹을 뿐이네. 그게 악수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허면…지금 상황에서 상수는 없는 겁니까?”
“무슨 꼭 적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상황을 뒤집는 것만이 상수가 아니야.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이라면 그것이 상수지.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게 상수네. 적을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지. 성벽을 보수하고,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물자를 정비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것들. 그리 해서 수성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야. 그러니 만약 자네에게 어떤 좋은 수가 떠오른다면 언제든 내게 이야기해주게. 타당하다 싶으면 자네의 의견에 따르겠네.”
그의 웃음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하지만 이제 군터는 그 여유 안에 무섭도록 조용히 갈린 칼이 잠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비장함은 군터로 하여금 덩달아 각오를 다지게 했다. 앞으로 며칠 뒤,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케인지모렌 성은 일단의 군세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그 군세의 통일되지 않은 무구와 깃발은 그들이 정규군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있는 힘껏 함성을 질러라! 저 성을 점령하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 재물이든, 계집이든 모두 먼저 집는 놈이 임자다!”
와아아아아!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조잡한 단상 위에 올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소리를 들은 이들이 무기를 들며 함성을 질렀고, 그 함성을 들은 이들이 뒤이어 또 함성을 질렀다.
“저 초라한 성벽 뒤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다 있다! 반짝이는 것! 향기로운 것! 맛있는 것이 다 있다!”
와아아아아!
한편. 성 밖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함성 소리는 성안에도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성벽 위에 화려하지만 뭔가 안 어울리는 갑옷을 입은 사내가 옆의 사내에게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막시밀리언 공. 정말 괜찮겠소?”
“문제없습니다. 수만 많다 뿐이지, 놈들은 사다리 외에는 변변찮은 공성병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신만 바짝 차리고 전투에 임한다면 이번에도 무탈히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그, 그럼 내 막시밀리언 공만 믿겠소이다.”
“맡겨주십시오.”
잔뜩 겁에 질린 성주가 뒤뚱거리며 성벽을 내려가자 막시밀리언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겁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많군.”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른 적이 없는 샌님이 아닙니까.”
뒤편에 서 있던 코르넬이 답했다. 막시밀리언은 성밖에서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도적들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네. 애초에 그러니 이곳으로 온 것이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정말이지 한심하군. 저런 자들에게 성주직을 내려주었으니 이렇게 주 전역이 위태롭게 들끓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테론을 탈출한 뒤 막시밀리언은 곧장 이곳, 케인지모렌으로 향했다. 그것은 케인지모렌의 성주가 리에론 가문에 줄을 댄 몇 안 되는 성주들 중 하나이자, 싸울 줄 모르는 겁 많은 샌님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원의 야만인들이 오테론을 함락시켰을 때부터 막시밀리언은 바크렌에 큰 혼란이 일거라 예상했다. 특히 오테론에서 가까운 성이며 도시의 인사들은 불안에 떨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여 막시밀리언은 자신을 받아줄 수 있고, 또 적당히 대접해줄 수도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떠올린 이들 중 가장 적합한 이가 바로 케인지모렌의 성주였다.
판단이 서자 막시밀리언은 즉시 케인지모렌으로 향했다. 역시 그가 예상했던 대로 케인지모렌의 성주는 그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가 패잔병 신세라는 것은 당장에 손이 급한 성주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막시밀리언은 작고한 사령관께서 “오테론은 틀렸으니 병력이라도 보존해 탈출하라.”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다는 핑계까지 댔으니 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 명령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위는 성주에게 있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막시밀리언이 800명 상당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천인장이라는 사실이었다.
막시밀리언이 케인지모렌을 택한 것과, 성주가 막시밀리언을 반가이 받아들인 것은 그 둘 모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오테론을 점령한 초원의 야만인들은 즉시 살마드로 진군했다. 그 수가 3만이 넘는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뜬금없이 반군이 깃발을 올렸을 때부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오히려 원군을 보내달라는 전령만 하루건너 하루 꼴로 당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겠군요.”
케인지모렌은 주둔 병력이 고작 300에 불과한 작은 성이었다. 때문에 이제까지 몇 차례씩이나 도적들의 목표가 되어왔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이 이끄는 병력이 있어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 규모부터가 비교불가였다. 전에 들이닥쳤던 도적들이 많아봐야 이천 안쪽이었다면, 이번에는 못해도 6천 이상은 되어 보였다. 어떻게 저 정도의 수가 한데 모일 수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커다란 깃발은 모두 문양이 같아. 한 우두머리에게 속한 건가.”
상상하기는 싫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본래 도적이라는 놈들은 고만고만한 놈들끼리는 쉽게 반목하지만, 자기보다 더 강한 놈이 있다면 기꺼이 숙이고 들어갈 줄도 안다. 힘의 논리라는 것이 더없이 깔끔하게 작용하는 부류니까 말이다.
“이제 곧 들어올 것 같군.”
적의 사기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음을 함성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도적놈들을 이끄는 자, 누군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병사를 부릴 줄 아는 놈이 분명했다.
“그래봐야 도적놈들이기는 하지만.”
막시밀리언이 혀를 찼다.
“아쉽구만. 군터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마음 졸일 필요는 없었을 것을.”
기병은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공성전에서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로 성 밖에서 유격전이라도 벌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막시밀리언이 아쉬워하는 것은 기병의 힘이 아니라, 선두에서 적을 압도할 용맹한 수하였다. 그 투스바이언과도 동수를 이룰 정도인 군터의 용맹은 저런 도적들을 상대로는 특히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 군터는 없다. 행방은커녕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이성적으로는 죽었을 확률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믿음, 기대보다도 바람이었다. 군터는 그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직접 손을 내밀어 거둔 수하였다. 뒤편에 있는 코르넬만큼이나 신뢰하는 부하이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 둘 모두, 살아서 다시 보세나.’
막시밀리언은 점차 움직이기 시작하는 도적들을 응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봐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날이 정말 덥네요. 모두들 힘 내시고 물 많이 드시면서 건강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