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드 -->
군터는 수하들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 이번 임무에서 그의 휘하로 배치된 두 개 백인대의 십인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아직 잠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호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그의 막사로 모였다. 그런데 그 수가 스물이 아니라 열아홉이었다. 빈자리 하나의 주인은 조금 전에 군터의 검에 목이 꿰뚫려 죽은 탓이었다.
“간혹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이렇게 따로 자리를 가진 적은 없는 것 같군.”
그들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조금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들은 조금 전 참사의 주인공이 자신들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히 허리가 곧추서고 군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군. 내가 이전까지는 내 휘하의 백 명만 이끌다가 갑자기 오백이나 되는 수를 통솔하려니 정신이 없었다네.”
군터는 조금 전 밖에서 피를 뿌리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던 이는 내가 아니라는 듯 잔잔한 말투로 그들을 대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만으로는 잔뜩 겁먹은 양들을 달래기에 부족했다. 군터도 딱히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겁을 먹든, 안 먹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부터 할 말이, 그 내용이 중요할 뿐.
“자네들의 처지를 알고 있네. 모시던 대장이 어느 날 갑자기 역모 죄로 목이 날아갔으니 혼란스러웠겠지. 은연중에 군부에서도 역적의 수하라며 손가락질 받은 것을 내 알고 있어.”
안 그래도 굳어있던 열아홉 십인장의 얼굴이 일제히 돌이 되었다. 군터의 말은 그들의 치부를 고스란히 들추고 후벼 파는 것이었다.
“화가 났겠지. 어쩌면 두려웠을 수도 있고. 그 역적들이 은밀하게 일을 꾸몄을 수도 있지만, 휘하 몇몇과는 속을 터놓았을 수도 있지 않겠나? 어쩌면 자네들 중에도 역적이 있을지도 몰라. 그 수가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겠지.”
“그…….”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려던 몇몇 이들이 서릿발 같은 한 마디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언제 차분했냐는 듯, 군터는 다시금 기세를 키워 그들을 억눌렀다.
그는 열아홉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십인장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았다.
“자네들 중에 역적들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성주께서도 주동자들을 벌함으로서 끝낸 일을 굳이 들출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둑이 제 발 지리듯 겁먹을 것도 없고, 억울해하며 화를 낼 것도 없다.”
약해빠진 겁쟁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없는 셈 치거나 괄시하며 군을 이끌 수도 없었다. 좋든 싫든 이끌고 가야 한다. 그렇기에 군터는 기세를 탄 지금 바로 이들에 대한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다.
“말했듯이 나는 자네들의 사정이나 과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 건 앞으로 자네들이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나와 함께 싸워줄 수 있느냐이다.”
군터에게 현란한 말솜씨 같은 것은 없었다. 좋게 구슬리는 말 따위는 할 줄도 모르고, 체질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투박한 말에 진심을 담았다. 통하면 좋고, 통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다. 애걸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는 그가 열아홉 십인장에게 건네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이었다.
“이번 전투는 틀림없이 위험하다. 하지만 꼭 절망스러운 것도 아니다. 말레이드의 성벽은 튼튼하고, 수가 적다한들 말레이드군은 바크렌 최고의 정예다. 반면에 반군이라는 놈들은, 내가 상대해본 바 오합지졸이다. 난 이 싸움을 기회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다른 백인장들이 서로 눈치만 볼 때 먼저 나서서 자원한 거다. 전쟁과 전투는 군인에게 있어 출세의 기회다. 이 싸움은 위기이지만 기회란 말이다. 내 말이 틀린가?”
누구 하나 대답하기도 전에 군터는 바로 말을 이었다.
“약속하지. 난, 나와 함께 싸우는 자와 고락을 함께할 것이다. 어차피 도망치면 역적이 되어 죽는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한 목숨 걸고서 이 기회를 담대하게 한 번 잡아보는 게 어떤가.”
그의 짧은 말이 이들의 마음에 얼마나 다가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이들 모두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대신 고민에 빠져든 것은 사실이었다. 군터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난 이 밤 내내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돌아들 가라. 돌아가서, 내가 한 말을 잘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마음이 섰다면 날이 밝기 전에 다시 날 찾아오도록.”
십인장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군터는 그가 한 말처럼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낮게 울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창을 옆에 둔 채 숫돌로 칼을 손질했다. 그러자 그의 창이 나도 해달라는 듯 칭얼댔다.
‘아서라. 넌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
날카롭기 그지없는 창날에 숫돌을 갖다 댔다간 칼이 갈리는 게 아니라 돌이 갈려나갈 것이다.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창은 계속해서 애처럼 칭얼거렸다. 그 꼴이 꼭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심술을 부리는 듯했다. 물론 그런 경우를 보지는 못했고 듣기만 했지만, 정말 들은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창이 어리광을 부리다니.’
누군가에게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하겠지.
계속 칭얼대는 창이 신경 쓰여, 군터는 결국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하기로 했다. 숫돌로 창날을 쓱 한 번 밀자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몇 번 갈지도 않았는데 아이 주먹만 한 숫돌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물론 창날이 더 날카로워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 그대로였다.
‘이제 만족하느냐.’
창의 기쁨이 울음으로 전해졌다. 군터는 픽 웃고 창을 다시 그의 옆에 세웠다.
‘그나저나, 정말 이름 정도는 붙여주는 것도 좋겠군.’
군인들 중에, 특히나 오랫동안 군문에 몸을 담은 이들은 종종 자신만의 애병(愛兵)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무기 관리에 공을 들이고, 사람처럼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면서 애착을 갖는 것이다. 실전에 많이 투입되는 이들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일종의 미신 비슷한 것이었다.
군터는 딱히 미신에 기대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생물처럼 감정까지 드러내는 녀석을 언제까지 평범한 무기처럼 여길 수는 없었다.
‘흠. 칸젤은 어떠냐.’
마음으로 뜻을 전하니 그의 창이 기쁘게 울었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인지는 몰라도 기뻐하는 것은 확실했다.
‘이제 네 이름은 칸젤이다.’
그의 창, 아니 칸젤이 기뻐하는 것을 느끼며 군터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칸젤이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으로 도망쳐 와 군터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기 전, 초원에서 쓰던 이름이 바로 칸젤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창에게 그의 옛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넌 또다른 나로구나.’
무기를 분신처럼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그의 옛 이름을 가진 이 녀석은 이제 또 다른 그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애착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계십니까.”
감상에 더 젖어드려는 때. 막사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터는 오늘 밤 일부러 그의 막사에 보초병을 세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듣는 귀가 없어야 다른 이들이 조금 더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듯싶어서였다.
‘우선 한 명인가.’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 하지만 아직 밤은 많이 남아 있다.
“들게.”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들어서는 십인장을 군터는 차분하게 맞이했다.
*
동이 트기 직전에 막사를 찾은 마지막 한 명을 끝으로, 열아홉 명의 십인장이 모두 그와 함께하기로 뜻을 밝혔다.
물론 군터는 그들이 모두 진심일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이들 중 단 몇 명만이 진심이라 할지라도 밤을 지새운 값으로는 차고도 넘쳤으니까. 혹 이렇게 말을 해놓고 당장 내일 탈영을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때는 보다 엄하게 처벌해버리면 될 일이다.
다음날. 군대는 아침일찍 열두 구의 시신을 버려두고 길을 나섰다.
군터의 곁에서 말을 몰던 살라스가 작게 이야기했다.
“다들 어젯밤에 일이 있기 전보다 얼굴이 좋아졌더군요. 대장님의 말솜씨가 많이 느신 것 같습니다.”
“말솜씨는 무슨. 난 무슨 대단한 말을 한 적 없다. 그저 잡아먹을 줄 알고 겁먹고 있던 놈들이 잡아먹지 않겠다고 하니 한 시름 놓은 것뿐이지.”
“한 마디라도 그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 제때 쓰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봐라. 지금만 봐도 말을 잘 한다는 말은 나보다는 네게 어울리지 않느냐. 아부는 집어치워라.”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
십인장들을 불러 마음을 터놓은 것은 그 스스로 판단하여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똑똑한 살라스가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뭐랄까, 부하기는 하지만 자신 없던 부분을 인정받았으니까 말이다.
“날이 나쁘지 않군.”
세찬 바람이야 여전하지만 그래도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정도 바람은 땀 식히기에 딱 적당한 정도로 여길 수 있다. 물론 아닌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레이드로 향하는 여정은 순조로웠다. 군터는 강행군을 이어갔지만 병사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 싶으면 조급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여지없이 군을 멈춰 세웠다. 그는 울벤트 리에론이라는, 아직까지도 이름이 기억나는 멍청한 작자처럼 실수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쉴 때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그냥 최대한 편히 있어라.”
군터는 휴식 도중에 병사들 틈을 거닐었다. 군례를 취하려는 병사들을 제지하고 꾸준히 그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그들에게 깊게 각인된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상관에 대한 두려움은 탄탄한 군율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과 경우에 따라 두려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상관을 어려워할지언정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가혹한 것과 위엄 있는 것은 다르다. 그것이 군터의 생각이었다. 그는 위엄 있는 상관이 되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최대한 노력하여 군졸들과 함께 했다. 식사도 같은 음식을 함께 먹었고, 때때로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을 격려해주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빛을 본 것인지, 그에 대한 병사들의 두려움도 말레이드에 닿을 즈음에는 조금 흐려진 듯했다.
시오도크를 나선지 보름여가 지났을 때. 군터가 이끄는 군대는 마침내 말레이드를 목전에 두었다.
“척 보기에도 견고해 보이는군.”
저 멀리 보이는 말레이드를 보며 군터가 감탄했다.
말레이드는 양 옆으로 굴곡진 언덕을 낀 자그마한 산에 위치해 있었다. 크기가 조금 더 작았다면 산성이라 부르기에 더없이 알맞았을 것이다. 저만한 규모의 도시가 들어설 정도의 산지가 결코 흔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말레이드가 위치한 곳은 그야말로 군사도시로서 천혜의 지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성벽도 높고 견고해 보인다. 저만하면 1만이 아니라 2만이 몰려와도 막을 수 있을 것 같군.”
“그것이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이 삼천 병력만 남겨두고 나설 수 있었던 이유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말레이드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가 꽤 지긋해 뵈는 무장이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게. 어려운 상황에 이리 와주니 참으로 고맙고, 든든하군.”
그는 군터를 처음 보는 듯 대했다. 실제로 그와 군터는 말 한 마디 섞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를 본 것은 한 번뿐이었지만, 그때 그에게서 받았던 인상이 꽤 강렬했기에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리 마중까지 나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말에서 내리고 그에게 군례를 취했다.
“원행에 노고가 많았네.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을 대신해 임시로 이곳을 맡아 지키고 있는 카리비온 하야신이라 하네.”
“군터라 합니다.”
카리비온 하야신은 부하를 시켜 군터의 군사들이 머물 곳을 안내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군터와 두 백인장을 데리고 공관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봐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천을 눌러주시고 쿠폰을 쏴주신 분들께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Hexen님 염려 감사합니다. Hexen님 비롯 다른 독자분들께서도 날이 많이 더운 와중에 지치거나 탈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왜때려요엄마님. 순수 무력 기준으로 보았을 때 군터는 그래도 C급 이상은 되는 수준입니다.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니 길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